책의 선택 > 권장도서 > 청소년

권장도서

탁류

지은이
채만식
출판사
문학사상사
페이지수
520
대상
우리나라 문단의 대표적인 작가 채만식의 장편소설. 채만식은 이 작품에서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사건을 놓고 사회의 비리를 풍자하고 있다. 정주사의 맏딸 초봉이는 가계가 어려워지자 제중당 약국에서 일하게 되는데. 혼기가 찬 데다가 용모가 예쁜 총봉이를 노리는 남자는 많았다. 굴곡 많은 인생을 산 가엾은 초봉이를 그리며 작가는 193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와 냉소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독자서평] 우리 시대... 진정한 탁류는... 탁류...... 말 그대로 우리가 흔히 물의 이미지로 연상시키는 맑음이나 깨끗함이 아닌 흐리고 알 수 없는 부유물들을 지닌 물이다. 동시에 대지를 기름지게 할 수 있는 풍요의 물이기도 하다. 심상치 않은 소설의 제목은 뭔가 의미심장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같은 이미지를 주었다, 그만큼 읽기 전의 기대도 컸고...... 그런 만큼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다. 소설은 탁류였다, 탁류가 주위의 대지를 집어삼키며 쓸려가듯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한 여인의 삶이었다. 강물이 깊은 숲 속의 작고 맑은 샘에서 시작된 것처럼 순수하고 연약한 작은 여인 초봉으로 시작한 파란만장한 삶이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에까지 모독을 가할 만큼 잔인하고 어찌 보면 강인한 여인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강이 흐르듯 때로는 돌아가야만 하는 험한 골짜기에서 맴돌기도 하고 다른 지류와 합쳐져서 더 큰 힘을 얻기도 하고 하면서 강은 쉴새 없이 흘러간다. 여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순수한 영혼으로 창조되어 세월의 풍파 속에 끝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고 흩뿌린 눈물만큼이나 강인해지고 스스로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 그를 의지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우리 옛 여인의 모습이다. 어쩌면 소설 속 초봉의 역할은 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추구한, 소설에 담고자 했던 가치는 그런 것이었는지도...... 내가 느낄 수 있었던 소설 탁류는 그런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초봉은 너무도 순수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티없이 맑게 아무런 사념도 없이, 끊임없이 솟는 샘의 모습이다. 순수한 만큼 연약하고 이지적이지 못한 꿈꾸는 소녀의 모습...... 그런 그녀였기에 모든 불행이 시작된 것일런지도 모른다. 처음에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세우고 행동했더라면 마음에 없는 결혼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고...... 하지만 그녀의 순수함을 탓하기엔 물은 너무 맑다. 어째서 낙엽 한 잎도 띄우지 않은 거냐고 물을 자격이 그녀보다 순수함을 먼저 잃은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물을 알지도 못한 채 급히 소용돌이 치는 좁은 계곡의 능선을 타고 흐른다. 자신을 만들어낸 산이 자신에게 상처를 줄 거란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초봉은 단지 스스로가 배워온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 정도로...... 그럴수록 순수한 영혼이 받는 상처는 큰 법이다. 초봉은, 작은 물줄기는, 점점 탁류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온 몸이 산산히 부서지는 폭포를 만난다. 무엇보다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은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초봉은 몸도 마음도 기진맥진해 버리고 무엇보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는 되찾을 수 없는 그녀 본연의 모습, 순수함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맑은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피는 아무도 지울 수 없듯이 그녀의 마음을 물들여 버린 금단의 독은 그녀를 현실 중심적인 인간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강에는 더 이상 푸른 빛이 없다. 검붉게 진흙을 띄우고 울부짖는 사나운 짐승처럼 표효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눈에는 맑은 빛이 사라지고 가슴에 남아있던 온기조차 잔인한 짐승의 손에 짓이겨져 버린다. 자신을 망친 인간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있는 초봉의 모습.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신 앞에 너무도 나약하고 위선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이다. 강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범람으로 주변의 농토를 썩히고 무수한 가옥을 침수시켜 버리고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죽은 형보의 시신을 무참히 짖밟는 악마같은 모습의 초봉이다. 그녀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은 상처가 날카로운 손톱이 되어 무고한 생명을 할퀴어가는 것이다. 강물의 본연의 깨끗함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다. 그런데 어째서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는가. 무의미한 인생이라면 깨끗히 포기할 수 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숙원이 있었다. 그녀가 무수한 고통을 참아내며 지켜낸 소중한 아이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녀에게는 지난 날 첫사랑의 순수함을 바쳤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것이 이미 쓰러져 버렸어야 할 그녀의 육신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바다가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바다. 자신의 모든 더러움을 포용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다시 본연의 맑은 모습으로 되돌려 줄 수 있는 바다가 상처 입은 강을 향해 손을 벌리고 서 있었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기다려온 모습으로...... 그것이 있기에 강의 흐름은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작은 옹달샘들이 기나긴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받아들여 주고 있는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 바다처럼 인간에게도 자신의 삶을, 그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어떤 힘이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막연한 느낌조차도 멀게만 느껴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여서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찾는 일이 먼먼 미래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 지금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이 곳 경기과학고라는 집단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 얻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 모습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뭘까.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자면 내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 닦는 것이겠지.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세상 보는 눈을 빨리 키우는 것이 될 것이고 말이다. 물론 교과서적인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능력을 키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점점 커가는 사람,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성장하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 세계를 키우고 싶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아침에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서 잠자리에서 하루를 마감할 때까지 숨쉬는 거겠지. 그리고 좀 더 빨리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 내 자신을 좀더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싶다. 견딜 수 있는 한 빠르고 강하게...... 그리고 바다를 찾아서, 나만의 바다를 찾아서 좀 더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 될 것이다. 이성적이고 좀 더 현명한 개체가 되기 위해서...... 바다의 품에 다시 안길 때까지...... 탁류 속에 청류는 없었던 것인가? 채만식의 탁류는 금강의 물줄기를 설명하는 데에서 부터 시작한다. 금강의 맑은 물이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의 줄기를 받아 대전과 공주, 부여를 거쳐 내려온다. 그리고, 시끄러운 장터의 소리와 함께 강경에서 부터 물은 탁해지고, 군산에 이르러, 창해한 바다에 온갖 깨어진 꿈조각들을 토해내는 것이다. 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점령하에 있었던 30년대, 군산은 일본이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내가기 위해 부설한 항구이다. 이곳에서 몰락한 양반인 정주사 일가로부터 이야기는 엮어진다. 정주사의 딸 미색이 고운 초봉이는 악인 고태수와 형보의 꾐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고,온갖 궂은 일을 겪게 된다. 태수와 결혼한지 10일이 안되어 과부가 되고, 겁탈을 당하고, 서울로 도망가지만 과거에 일을 했던 제약사의 사장인 제호의 첩이 되고, 그에게 버림받은 후 간악한 형보와 함께 살다가 형보를 죽이고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등, 온갖 세상난사가 맘 연약한 그녀에게 달려드는 것이다. 모사된 근대화와 일본의 점령, 그리고 무너진 가치관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가난했던 그들의 삶을 채만식은 사실적인 설명과 반어의 표현을 통해 실감나게 소설에서 설명하고 있다. 초봉이의 비극적인 인생사를 주된 모티프로 전개되는 탁류에서 과연 청류의 희망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글에서 계봉이나 남선생 등의 긍정적인 인물이나, 초봉이의 마지막 희망을 반문하는 대화는 일면 청류의 기색을 보이려 하고 있으나, 미약하거나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마는 아직은 도도한 청류의 흐름을 발견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전해 주는 소설이다.
다음글
천변풍경
이전글
삼대(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