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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장도서

천변풍경

지은이
박태원
출판사
깊은샘
페이지수
365
대상
[독자서평] 사람사는 이야기-내 이웃을 보는 눈으로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상', '김유정'등의 구인회에 가담하여 문학활동을 했었지요. 그가 쓴 '천변풍경'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그랬던 것처럼, 청계천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가 구보씨...'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가 구보씨...'를 읽고 박태원의 작품을 난해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느꼈던 분들에게 이 책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갈 것입니다. 이 소설은 식민지 하의 피폐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짧은 삽화로 만들어 여러 개 이어서 많든 장편소설입니다. 제가 읽은 <깊은샘>에서 나온 '천변풍경'에는 당시 청계천의 빨래터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담겨 있고, 뒷면에서 박태원의 생가를 중심으로 청계천 주변을 간략하게 그려 놓아 글 속에서 서술자의 시각이 청계천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다가 갈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서문에는 춘원 이광수가, 발문에는 월탄 박종화와 임화가 서평을 해 두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말은 '정말 훌륭한 소설이다' '이런 소설을 본적이 없다'입니다. 그렇습니다. 30년대 중반 그 힘든 시대를 살면서 이런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썼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세련된 문체와 신선한 구성 방식이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이 소설은 잦은 시점의 변화로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들려줍니다. 그 많은 화자들 중에 특히 이발소에서 일하는 재봉이의 시각은 참 깜찍하다고 하겠습니다. 채만식의 '치숙'에 나온 소년처럼 제 생각대로 마구 말하고 남을 관찰하는데는 매우 뛰어난 소질을 지닌 청년입니다. 그 청년의 눈을 따라 청계천을 둘러보노라면 어느세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웃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 작품의 장점이라고 할지 단점이라고 할지, 시대의 어두운 면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은 생각해 볼만합니다.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는 사람들, 다방으로 흘러가야 하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 할일 없이 떠도는 룸펜들...그들의 모습을 좀더 깊게 들여다 보아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픈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가지 않고 알콩달콩 늘어 놓는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 말할 때 취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합니다. '천변풍경'을 읽으면서 저는 가장 사실적이고 가장 따뜻한 시선으로 60여년 전 우리 이웃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yes24/jjh8114 님이 쓰신 서평> 사라져 가는 삶의 요체 '천변 풍경' 나는 아직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한없이 무거운 물음에 『천변 풍경』만큼 명쾌하고도 가슴 뭉클한 해답을 내어 놓는 소설을 만나지 못했다. 일찍이 위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삶의 본질을 분석하고, 증명하려 했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삶은 '일상'과는 점점 더 멀어져서 오로지 관념과 현학취만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삶' '인생' '죽음'에 관한 사유를 앞선 세대의 전유물쯤으로 여기고 도회시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기실 우리들은 언제부턴가 '무엇인가'라고 제기되는 의문들을 철학이라는 테두리에 가두어 금기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격리된 그것들은 좀처럼 '근원적' '심오한' '피상적'이라는 꼬리표를 뜯어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같은 현상의 기저에는 무언가를 분석할 때 흔히들 그러하듯, 삶마저도 처음과 끝을 구분하려는 소위 '구역화'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이러한 고민을 하는 내게 삶은 한 곳으로 몰아넣어 함몰시키고 유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의 길고도 다채로운 궤적을 통해, '삶이란 그 무엇도 아닌 다만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 나가는 것'이라 전언한다. 소설 속 인물들의 추레한 일상과 다양한 그네들의 면면이 우리네 삶의 풍경에 다름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가슴 언저리가 뭉근하게 아파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청계천가에 모여 사는 이들의 속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소심하고 비사교적이면서도 오입질을 하는 민주사, 바람둥이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에 견디지 못해 돌아온 이쁜이, 술집 여급으로 사랑을 꿈꿨던 하나꼬와 기미꼬, 그리고 처녀과부로 무작정 상경한 금순. 그들의 내밀한 사정은 청계천 빨래터 마누라쟁이와 이발소 소년 재봉이를 통해서 그려진다. 특히나 박태원이 포진시킨 몇몇 인물들의 촌철 살인의 대사와 약자끼리의 모종의 연대의식으로 무장한 얄미운 패악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귀기가 느껴진다. 그러므로 당대에 『천변 풍경』이 최고의 문학적 기교를 갖춘 작품으로 상찬되었다는 것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의 진면목은 그러한 기교 외적인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먼저 현실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만 그 시대의 풍속,유행을 묘사할 뿐인 세태소설로 『천변풍경』을 분류한 임화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 소설이 단순한 세태소설이 아닌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해서 시종일관 어떤 기시감 속에서 헤매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막 약관을 넘어선 내가 그 시대 서민들의 일상을 체험해 봤을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그 낯익음은 우리네 현실과 소설 속 풍경이 오버랩됨으로써 가할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때국 흐르는 일상에서 맴돌고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의 욕망은, 질척거리는 우리네 생활의 동선과 철저하게 조응한다. 구역화된 시대를 그리는 세태소설이 이정도 울림의 '공감'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또한 박태원은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하층의 인물 군상들을 묘사하는 기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다. 얼핏 하나의 이야기 속에 묶일 수 없어 보이는 인물들을 그는 천변이라는 공간에 모아놓는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렇게 모인 이야기들을 『천변풍경』이란 하나로 봉합했음에도 그 이음매를 전혀 느낄수 없다는 점이다. 그 까닭은 박태원이 소설 속 인물들의 공간(청계천)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도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소설 속에서는 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통해 증명 된다.(예를 들어, 이쁜이 남편은 식당집 여자를 좋아하고, 점룡이는 이쁜이를 좋아하는 식의 얽킴) 따라서 이 부분은 한 사람이 잃은 시간을 다른 사람이 움켜쥐고 있다는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같은 이유로, 감성적 측면으론 속물적인 욕망에서 반드시 생겨나기 마련인 피 가해자의 모습이 한량없이 유쾌 할 수 있었으며, 현실반영적 측면으론 복잡한 역사적 컨텍스트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천변풍경』을 세태소설이라 분류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앞서 말한바 있는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은 청계천 빨래터에서 돌연 시작되었다가 각각의 인물들의 애환을 돌보지 않은 채, 발작적으로 끝난다. 어찌보면 지나치게 방관적으로 보일 법한 이러한 결말에서, 나는 그럼에도 삶은 지속된다는 의미심장한 전언을 발견했다. 그네들의 삶은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도 엄연히 존재 했고, 소설이 끝난 후에도 분명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고단한 생활을 때로 혐오하면서,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연민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맺어진 인연은 이제 막 정을 트려고 할때 소설처럼 끝나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박태원은 다만 천변가 사람들의 지엽적 생활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시작이 그러하듯 종언도 예측 할수 없는, 삶의 지속성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럴진대, 우리는 아직까지도 <천변 풍경>을 단지 세태소설이라 분류할 수 있을까? 지금의 청계천은 소설 속 인물의 호언장담이 무색하도록 일찍이 복개되어 검은 아스팔트가 깔려있다. 그 부근에 늘어선 대형 상가 건물과 복개된 도로를 질주할 자동차들을 생각하면,나는 어쩐지 가슴에 묘한 씁쓸함이 가득찬다. 내 가슴 속에 구질 구질하다 못해 더러 구차하기까지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뿌리깊게 박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어디 이 그리움의 정체에 구차함만 있겠는가. 박태원이 그 장식없는 눈길과 투박한 진심의 힘으로 그려냈던 진솔한 인생이 그리운 것일테지. 자본주의와 과학의 득세로 바라봐야 하는 삶은 곤고하기 그지 없다. 나는 그 질척한 삶의 한 가운데서, 지금도 『천변 풍경』과 같은 진품이 주는 유쾌함을 기다린다. 어드메선가 누구 하나쯤은 적막의 내공으로 이 고단한 현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그 침묵이 걷히면 낮은 곳에서 삶의 진실을 이야기 할 현대판 『천변풍경』을 볼 날이 오지 않겠는가. 그 생생한 진심의 날에 다시 한번 마음이 베일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 이 마음의 결락을 견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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