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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생활문/수필

제목 내게 주어진 시간을 걱정만 하며 보낼 순 없잖아
글쓴이 조단비


나는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불안하고, 그렇지 못해도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기저에는 '타인의 기대를 앞으로도 충족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주는 만큼 나도 줄 수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할수록 나를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고 그보다는 내가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다', '어떻게 해야 실수를 줄이고 걱정이 덜할까'를 걱정하는 면이 있었다. 육체와 정신은 교감하기에 때로는 형식이 내용에 시너지를 더하거나 가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힘을 갖거나 할 수 있음을 어떻게 할지는 개인의 마음에 달려있다. 갖지 못하거나 할 수 없어도 그 일을 할 때가 있듯이. 건강함이란 양측이 원활한 상태를 일컫는다. 내게 있어 필요했던 건 '잘한다'가 아니라 '괜찮다, 좋아한다.', '그러니 함께하자', ' 네 마음을 이해한다, 나는 너에게 닿고 싶다'였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순간에서 내가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게 되는 때에는 항상 그러함이 담겨있었던 덕분이다.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의 꿈은 언젠가부터 행복해지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되었고,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그저 단조롭다 싶은 정도의 음률이 흐르는 평온함 속에 현존하는 일이 되었다. 무탈하고 잔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그것은 나 자신이 그렇지 못하거나 그럴 수 없는 때가 있다고 여기는 덕분일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잘하거나 못할 수만은 없고 자신에게 없고 있어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을 좇기 마련이니까. 근래엔 운동을 하면 잠이 잘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아 당황했다. 나는 아직도 누우면 이것저것 생각나는 일이 많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었나 보다. 어떤 일이든 '후회 없이', '후회가 아닌 것으로'라는 건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지만 잠시라도 어떤 일에 온 마음을 다하여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까 한다. 새벽마다 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창가에 스며든 아카시아 향기처럼 내가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을 중심으로, 나는 나로 살아가면서도 나를 찾아가고 있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분명히 아는 일은 불가능한 일임에도 어쩌면 스스로 그렇게 살아온 건 아닐까. 무엇이든, 무엇이 아니든지 괜찮아. 사람이 나무라면 나는 나대로 크고 있는 나무이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니. 휘어지거나 부러지더라도 각자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걸 보면 어떻게 어여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게 있는가와 관련 없이 좋은 건 분명히 있는걸. 누군가의 시위가 추울 땐 데우고 더울 땐 식힘으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온기의 존재처럼.

일전에 거미줄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묘사는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주렁주렁 맺힌 이슬, 굴절된 표면의 매끄러움, 촉촉함, 새벽녘 숨결을 머금은 진주알, 나뭇잎 싱그러운 들풀에 수를 놓은 은하수가 그물 다리 위에 걸려있다. 거미가 구슬을 꿰어다 뜨개에 엮으면 찬 기운이 바짓단 적시는 밤을 지나 낮에 불을 켜는 조명의 구체가 달린다. 거미줄은 항성과 행성, 거리와 거리를 비추는 소국의 거울이다.」 이렇듯 내 영혼의 물을 긷는 두레박은 나 자신에게 있다. 물방울은 거미에게 있어 자신의 설계와 더불어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손님과 같다. 우리는 곤충에 관하여 선별적이고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같은 잣대로 작용한다. 그건 서로 간의 차이에 기인한 바가 있겠지만, '나에게 좋은가 아닌가'가 '무엇이 이익이 아닌 이로움을 낳는가?', '나의 이익을 다른 이의 이로움으로 치환할 때의 고려사항' 보다 선행할 때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일인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아 무엇인 게 좋을 수도 있고 알아야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지만 이 또한 온전히 알 수는 없음으로, 어떤 시선으로 보고자 하는가 하는 '나 스스로가 느끼는바'에 의해 자타를 무엇으로 여기게 되는 건 아닐까 싶다. 이전 블로그에서도 그렇게 썼던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일관적인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의 삶을 관조하는 시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라서는 아닐까 싶다. 불변과 변화는 어느 시점에 머무르며 발생하는 것인가. 지식은 주입이되 정서는 자체에 기인해 기존의 것을 공고히 다지는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여전히 내가 지금 당장 느끼는 게 전부는 아니며 어떤 일이든 하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긴다는 믿음은 필요하다. 좋은 일이 생길 확률이 있다는 것만으로 도박에 뛰어드는 일은 어리석을 수 있지만, 생을 살아가는 일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가진 한계에 의해 필요할 때와 아닐 때의 경계 그리고 무엇이 확실한지 모호하다면 누군가가 자신의 잣대에 의해 이야기하는 칭찬과 비난에 좌우되고 함부로 영향을 주고받으려 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좋은 건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좋아서 좋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걸 보면 다른 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하면서도 괜스레 살피게 되는 건, 다른 사람과 나는 같지 않으며 그렇게 여겨질 만한 사람일까, 보답할 수 있을까, 이러한 제의를 받을 만큼의 능력이 나에게 있느냐는 고뇌가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기회는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나는 스스로 기회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칭찬한 이들에게 부담을 덜어내고 때로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는 부족한 제게 건네주시는 크고 작은 모든 호의에 감사한다고, 진심으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