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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생활문/수필

제목 할머니 댁 아궁이
글쓴이 노윤

할머니 댁 아궁이


할머니 댁에 있는 아궁이는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다. 우리 할머니는 경상남도 함양에서 살고 계신다. 우리 가족이 2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함양에 도착하면 거름 냄새가 창문으로 솔솔 들어온다. 반가운 냄새를 맡으며 넓은 논밭과 산자락을 지나면 할머니 댁에 도착한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나는 가장 먼저 아궁이에 가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도시에만 살아서 할머니 댁에 가면 낯설었던 경우가 많았다. 화장실과 부엌 창고까지 모든 곳이 어색했지만 유일하게 익숙했던 곳이 바로 아궁이다. 아늑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불을 지피고 있다 보면 재미있고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아궁이를 좋아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 댁에서 불 지피는 걸 좋아했다. 도시와는 달리 시골에선 불 지피기가 쉬웠다. 넓게 트인 앞마당 위에는 간이 부뚜막과 솥이 있었고 한쪽에는 장작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나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기만 하면 신기하고 재밌었다. 하루 종일 불앞에 앉아 있어서 얼굴이 시커멓고 옷에는 재가 가득 묻어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솥을 태울 뻔하거나 장작을 너무 많이 써서 할머니께 혼나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 지피는데 자신이 생겼다. 내가 어느 정도 불을 다룰 줄 알자 할머니는 그동안 내가 몰랐던 장소를 알려주셨고 그때 처음 알게 된 곳이 바로 아궁이였다.

아궁이는 할머니 집 뒤편 구석에 있는 작고 따뜻한 공간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는 마당에 있었던 것보다 더 크고 두꺼운 부뚜막과 솥단지가 있다. 그리고 은은한 숯 냄새와 희미한 불빛이 아늑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추운 겨울에 할머니 댁을 가면 나는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아궁이에서 불을 지폈다. 아늑한 공간에서 불앞에 살며시 손을 내놓고 있으면 추위에 얼었던 몸과 마음도 서서히 녹았다. 방이 따뜻해지고 불이 서서히 꺼지면 숯불에 할머니가 농사지으신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했는데 시골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야식이었다. 그래서 아궁이 안에만 있으면 어떤 추위도 두렵지 않았다.

아궁이에 있다 보면 한걸음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볼 수 있다. 집에서는 보일러 한 번만 켜면 금세 방이 따뜻해지고 가스레인지 레버를 돌리기만 하면 바로 요리를 할 수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빨리 목적을 이루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과정은 갈수록 짧고 간단해진다. 반면 할머니 댁의 아궁이에서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앉아서 불을 지켜봐야 한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집중하다 보면 그동안 급하게 달려오기만 하느라 보지 못했던 내 삶의 과정도 자연스럽게 돌아볼 수 있었다. 특히 아궁이가 만들어주는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은 성찰과 사색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내가 아궁이에서 나만의 시간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아궁이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아궁이는 어릴 때는 나의 따뜻한 놀이터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성찰의 공간이었다. 내 주변에는 나처럼 삶의 과정을 보지 못하고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춥고 힘들 때 의지할 만한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언제든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나온 삶을 함께 돌아보고 고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나부터 아궁이 밖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삶의 과정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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