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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글

제목 나의 친구였던 너가 있던 자리에는 너의 펜만 남아있다.
글쓴이 권규린

오늘 너가 준 펜을 버리려 마음 먹었다. 세월은 무시할 수 없고 시간은 무시할 수 없다던데, 우리가 친구로 보낸 4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너에게는 이제 내가 없고, 나에게는 이제 너가 없고, 우리에게는 이제 서로가 없다. 너와 나의 시작점부터 올라와서 우리의 끝까지, 하염없이 되내이며 자책도 해보고 다른 결말도 만들어 보곤 했다. 나의 잘못인 것은 확실한데, 이미 누구의 잘못인지는 상관이 없더라. 너가 나를 받아주면 예전처럼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와 내가 함께 웃고 대화를 나눠도 이상한 느낌이 드는게 이상했다. 아마 난 그때, 너와 나의 속에 더 이상 서로를 담을 공간이 없다고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린 그때부터 서로에게 지나간 옛사람이 된 걸까. 아니면 너에게는 내가 그 전부터 지나간 옛사람 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우리 생각을 많이 한다. '너'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의 생각. 그리고 나는 아직도 너에게 미안하다. 우리의 관계의 시작이 나고, 관계의 끝의 시작도 나였다는 게 참 미안하다. 끝까지 함께 살아보자고, 버텨보자며 웃는 게 우리였지만 끝을 약속하던 우리는 끝이 어딘지 몰랐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모를 이별은 갑작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우리가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이별인가 싶지만 그때의 우리와 헤어지는 것이니 나는 감히 이별이라고 말하고 싶다. 둘이서 나란히 세상을 바라보던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별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관계의 끝을 바라보던 나는 우리의 관계의 끝의 끝이 아니라 관계의 끝의 시작을 봤다. 관계의 끝의 시작이 나라는 걸 알고나서 나는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보다 혹시 너도 우리의 관계의 끝의 시작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너라면 너가 끊은 관계보다 타인이 먼저 끊어버린 관계를 더 슬퍼할 테니까. 4년 동안 붙어있던 내가 관계를 먼저 끊었다고 하면 너는 또 혼자서 얼마나 힘들어 하겠나. 나는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파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는 사실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우리의 이야기였지만 결말은 각자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너는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살아가면 된다. 아니, 전보다 더 많이 웃으며 살아가면 되겠다.  


관계의 끝을 바라보면 관계의 끝의 끝이 아니라 관계의 끝의 시작이 나온다. 가끔은 관계의 끝에서 처음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건 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이다. 어쩌면 너에게는 관계의 시작과 끝이 나와 다를 수도 있겠다. 나는 관계의 끝의 끝을 모르고 끝의 시작을 안다. 너는 관계의 끝의 시작을 모르고 끝의 끝을 아려나. 아니면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려나.


너가 사준 펜은 글이 잘 써진다. 펜을 버리려 마음 먹으니 오히려 펜이 나의 나날들에 함께하기 시작했다. 관계의 끝에서 관계의 시작을 바라보듯, 끝에서 시작으로 변하는 펜을 보고 나는 펜에서도 우리를 발견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일상에서 종종 우리를 찾는다. 이 펜이 소중한지 모르던 그때에 비해서 나는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마지막까지 너를 배우고 너에게서 배우는구나. 


연휴가 시작되었다. 이번년도에는 행복한 적 없다던 너가 조금이나마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행복한 적 없다던 너도 가끔은 나에게 웃어주었으니 앞으로도 다른 이들에게 가끔은 웃어주라. 


다음에 너를 만나면 

그 시절의 너를 말해주겠다.

괜히 빛나보이고 왠지 아름다워 보이던 우리의 시절을 말해주겠다. 


그때가 되면 

마지막까지도 너를 배우던 내가 

감히 너를 알아도 될까. 


2021.02.11 

(고등학교 1학년 권규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