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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영화감상문

제목 오늘의 엄마 / 강진아
글쓴이 노문희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엄마의 꿈을 듣고서야 엄마가 자신에게 해 준 모든 것이 희생이었음을 깨닫는다. 정아는 언제나 엄마에게 요구하기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키워 주고 먹여 주고 들어주고 챙겨 주는 사람이니까. 이토록 일방적이기만 한 관계였다는 사실이 정아를 찌른다. (253페이지)

 

누구나 이별한다. 세상 인연이 다 그렇다. 하지만 그 죽음을 생각하고 이별을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현실에서 준비해야 할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문제가 있다. 내 의지대로 명확하게 가를 수 없는 마음이 죽음에서 파생한 생각의 꼬리를 이어간다. 언젠가 이별을 마주해야 할 모든 인연이지만 그 타이밍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온도마저 다르다. 3년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애인을 잃은 정아에게 엄마의 암 소식은 달랐다. 애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너무 아팠고, 3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녀는 과거의 기억에 몰두하며 산다. 그러다가 닥친 엄마의 폐암 말기 판정 소식은 그녀가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느리게 흘러간다. 애인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가 이제는 엄마를 '잃어가는' 이별을 걷고 있다.

 

누군가와의 이별은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정아가 기억하는 엄마의 세월은 억척스럽게 두 자매를 키워낸 엄마의 모습이었다. 식당에서 일하거나 건물의 청소를 하거나,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자매를 키운 엄마의 현재는 폐암 말기의 환자다. 자매의 보호자였던 엄마를 이제는 자매가 보호자가 되어 돌본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칠 일이다. 고생하며 나를 키우고 돌봤던 엄마의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순간이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엄마를 잘 돌보고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그냥 간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테지. 자매 역시 엄마의 진심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 채로 기한 없는 간병인이 된다. 서울과 부산, 경주를 오가며 이어지는 간병기는, 막연하게 이별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면서 잘 마무리하고 싶은 목표가 되어간다.

 

매번 겪는 이별이라고 해서 익숙해질 수 있을 텐가? 그냥 횟수가 늘어가고 거듭 리셋될 뿐 언제나 그 이별 앞에서 우리는 낯선 감정에 휩싸인다. 이별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겪어내야만 한다. 그게 현실이고, 그게 이별과 익숙한 우리의 자세다. 정아는 아픈 엄마 곁을 지키며 일상을 유지해나간다. 긴장했다가, 익숙했다가, 짜증 내고 투정하기도 했다가... 인간이기에 간병 앞에서 겪는 마음의 고충까지 이해해야 하지만, 바로 뒤돌아서서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다시 또 서로에게 접근하며 환자와 보호자로, 엄마와 딸로, 이 이별을 함께 준비해야 하는 자매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의 사랑을 느낀다.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엄마라는 존재를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동백도 안 졌더만 찔레꽃이 폈어요?"

"네, 올해는 나란히 폈더라고요."

"보고 싶네요."

엄마는 볼에 홍조까지 띠고 신이 났다. 그때 한의사가 질문을 바꾼다.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있어요?"

단순히 말을 받아 묻는 것도 같고 치밀하게 의도한 것도 같아서 정아는 조금 놀란다. 엄마는 입을 닫고 시선을 떨어뜨린다. 한의사가 단호한 말투로 거듭 묻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엄마요."

"그래요? 엄마가 보고 싶으세요?"

"네." (134~135페이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신의 엄마에 대해서? 소설 속 자매는 엄마가 아픈 후로 엄마를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엄마가 좋아하는 들판의 야생화는 꺾지 않을 때 가장 예쁘다는 것. 꽃이 예쁘다는 말에 당장 꺾어 와서 꽂아두고 싶은 마음이 다 표현되기도 전에 엄마의 속내를 듣는다. 그냥 두고 봤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게 꽃이라고. 하나둘,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에 관해 더 알고 싶다. 엄마가 궁금하고, 엄마와 이야기하고 싶은 공통된 관심사를 위한 게 아니다. 처음에는 '엄마'라는 한 사람의 취향이나 생각에 관해 궁금하던 것이 어느 순간 그 의미를 점점 옮겨간다. 이미 한번 누군가를 잃어본 정아가, 이별 후의 시간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는 아니었는지 묻고 싶어진다. 줄곧 죽은 애인을 놓고 살지 못했던 그녀의 시간에 이제는 엄마까지 더해질 것이기에, 그 기억에 붙들려 사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기억으로 머물게 하는 담담한 시간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보일 그 상실의 슬픔이 누군가에게 강제한 슬픔이 아니라, 그냥 내가 느끼는 슬픔 그대로 머물게 하려는 마음. 시간이 흘러도 그렇게 계속 당신을 기억하고 알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멈추지 않는 것. 엄마가 아픈 후에야 알게 된, 엄마와의 이별을 느리게 준비하면서 겪은 상실의 진정한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달라질 게 없는 일상과 습관, 성격까지 익숙하게 보이는 건 또 뭘까. 엄마를 잃어가면서도 엄마를 알고 싶은 마음, 그렇게 알아가는 엄마의 시간에 뭉클하고 애틋하면서도 지금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슬픈 거다. 그래서 투박하게 노력한다.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은 바람은 여전하지만, 매번 원래의 성격대로 무뚝뚝해지는 자신을 탓하기도 웃기다. 엄마가 아프고 엄마와의 이별이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유로 그녀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참거나 숨기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항상 엄마를 걱정시켰던 딸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모습을 정아에게 확인한다. 엄마의 아픔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현실이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그녀의 삶이 존재하고 중요하니까.

 

슬픈 일을 겪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성장할 수 없는 게 또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정아의 솔직한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얼마나 더 많은 이별을 경험할 우리일지 모르지만, 소설 속 자매와 엄마가 서로에게 접근하는 이별의 방식은, 투덜대는 것 같으면서도 고요하게 마음을 읽게 한다. 우리에게 이별은 필연이고,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잘 이별해야 하는지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실의 고통을 감당하고 겪어내는 게 최선이라는 것인지, 남은 시간 더 많이 알고 싶은 바람으로 계속 가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별하는 엄마를 궁금해하면서 정아가 알아낸 엄마의 시간은 엄마가 떠난 후에도 그녀의 기억에 남아 상실의 시간을 채워갈 거라는 것. 그 기억으로 슬픔을 감당하는 게 또 하나의 방식이 될 것 같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보이던 작은 딸의 모습이 점점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너무 현실적이고 생생해서 경험한 이들만이 공유하는 감정을 같았다. 엄마의 폐암 소식에 정아와 언니는 역할 분담하여 그 모든 일을 진행한다.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하고, 수술하고 항암을 하고, 재활을 위한 병원을 알아보고, 다시 또 반복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들이 낯설지 않았다. 가족이 아프다는 건 그런 거다. 아픈 사람 본인도 힘들지만, 그 아픔을 대처해야 하는 가족에게도 똑같이 힘든 시간이 된다. 오랜 시간 중노동을 하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일에 몇 년을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지나고 보니 알아두어서 나쁜 것 없는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런 경험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행복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