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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영화감상문

제목 [서평]<내가 여기에 있어>, 아드리앵 파를랑주 지음, 이세진 옮김, 웅진주니어, 2020
글쓴이 고청훈

'선 두 개'로 목적지향적 일상을 과정지향, 자연지향적 일상으로 바꾸기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멈추어야 내 마음이 보인다고 했다. 멈춘 후에야 보이는 것이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멈추어야 비로소 인도의 작은 돌 틈을 뚫고 자란 풀들이 보이고, 도심 속 새소리도 걸음을 멈추고 귀기울여야 비로소 들을 수 있다.


 

<내가 여기에 있어>‘2020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한 그림책이다. 어느 이른 아침 주인공 소년의 머리를 뱀의 꼬리가 두드린다. 꼬리부터 뱀의 몸통을 따라 집과 정원, 거리를 따라 나선다. 도시를 벗어나 숲에 접어들고 해가 저물어 잠을 청하고, 아침에 다시 걸어 드디어 뱀의 얼굴을 마주한다.


 

뱀의 얼굴을 마주하기까지 소년은 그저 말 없이 걷는다. 눈으로 따라 걷는 내게 소년은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목적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소년이 뱀에게 집과 정원, 거리와 숲에서 마주친 사람과 동물들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복잡하지 않은 그림 속에서 놓치고 지나친 것들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금 천천히 보게 되면서 비로서 놓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뱀의 얼굴을 마주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자연과 생명들도 중요하고 이야기하는 듯 했다. 목적 지향적인 시각을 내려놓으라 하는 것 같았다.


 

뱀의 몸통이 때로는 길로 보이고, 때로는 낮과 밤을 가르는 경계로도 보이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 했다. 일상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자연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듯 했다.


 

널 다시 보게 되면, 네 몸에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선 두 개를 그려 줄게. 그건 우리 둘만의 신호야.
내가 여기에 있어.’라는 뜻으로 말이야.”(29)


 

목적 지향적인 일상에 지쳐 있을 때 의식적으로 선 두 개를 그어, 과정과 자연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조금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일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