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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이별
글쓴이 이슬이
4월의 공기는 아직까지 따뜻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지구 온난화를 탓하며, 그는 몸을 움츠리며 주머니 속에 양 손을 찔러 놓은 채 빠른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해 뜨기 직전의 하늘은 연한 남색으로 주변을 어슴푸레하게 비췄다.
걸음을 늦추지 않고 그는 단지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새어나와 공중으로 스며들었다.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곤히 잠든 단지 안에서 유일하게 깨어 움직였다.
연한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들이 곧 타오르게 선명한 주황으로 변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그는 무심한 눈초리로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열 번째의 일출, 그녀와 헤어지고 열 번째로 맞는 아침이었다.
버스가 그의 앞에 멈췄다. 삑, 카드를 갖다대자 울리는 기계음은 귀에 익숙했다. 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때 유명했던 발라드 가수 K를 닮은 기사의 옆얼굴을 흘끗 쳐다보며 그는 K에 대해 생각했다. 스캔들에 휘말려 소문도 없이 사라진 K. 그가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버스는 아침의 거리를 달렸다. 창 밖으로 그녀와 자주 가던 카페가 스쳐갔다.
그녀는 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여름엔 500원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앳되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입맛이 어른스러웠다.
단 것을 잘 못 먹는다고 했다. 언젠가 그가 마시던 프라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고는 녹아내릴 만큼 달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그는 음료수 대신 물을 주로 마셨다.
헤어지고 나서 그는 다시 음료수를 마시려고 했지만, 싱거움에 길들여진 혓바닥은 그녀의 말마따나 녹아내릴 만큼 달다며 아우성했다.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야.
휴대폰을 꺼내들며, 무의식적으로 카카오톡에 들어갔다. 잠시 기본 배경의 채팅방 목록을 바라봤다.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게임 하나 깔려 있지 않은 바탕 화면은 삭막했다. 그는 도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헤어지기 전 카톡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잠깐 만나자고 해서 카페에 갔었다. 자주 가던 곳이 아니었다.
쌀쌀했는데도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대화는 길었고, 같은 말의 끊임없는 되풀이었다, 그는 회상했다.
밝은 색의 코트, 쇄골이 드러나는 스웨터. 그녀는 대화하면서 머리카락을 자주 잡아당겼다. 입술 색이 예뻤다. 아직 오지 않은 봄처럼 예뻤다. 그녀에게만 미리 봄이 온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봄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맞은편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채 세 모금도 마시지 않아 그대로였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안내방송이 그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말했다. 벨을 누르고 카드를 찍었다.
거리에는 출근길의 직장인들이 많았다. 그는 두꺼운 외투와 하얀 입김 속 표정 없는 얼굴들의 틈에서 걸어갔다. 여기서 전라로 뛰어다닌다면 이 기계 같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떤 표정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저 생각 뿐이었다. 자신도 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른쪽으로 꺾어 높은 건물로 향했다. 그가 일하는 회사였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발걸음을 옮겨 회전문을 통과했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느리게 내려왔다. 대부분의 층에서 멈추며 꾸물대었다. 추측일 뿐이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문이 열리며 엘리베이터는 꾸역꾸역 사람을 토해 내고는 다시 집어삼켰다. 사람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와 벽 쪽에 붙어 섰다. 거울이 보였다.
검은 머리, 짙은 눈썹. 평범하게 생긴 피곤해 보이는 삼십 대의 남성. 나이와 꼭 같아 보이는 그와 달리 그녀는 앳되었다. 연예인을 닮았다는 소리도 왕왕 들었다.
왼쪽 눈 밑엔 검은 점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눈물점이라고 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거울 속 머리칼 사이 듬성듬성한 새치가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사라졌다. 그는 피곤해 보이는 자신과 마주보았다.
십삼 층, 엘리베이터는 멈췄다. 가득 찬 사람들을 조심히 헤쳐가며 그가 내렸다. 카드를 찍자 유리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몇 명의 동료들이 그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짧은 목례로 화답한 그는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은 환하게 밝아졌다가 설정된 밝기로 다시 어두워졌다.
오늘은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나 오늘도 삼십 분을 일찍 왔는데. 회사에 도착하면 언제나 삼사십 분쯤 남고는 했다.
주로 옥상으로 나가 그녀와 통화하곤 했었다. 송신음이 여섯 번 울리면 막 일어나서 잠긴 목소리로 그녀가 전화를 받곤 했다. 오전 수업은 주로 신청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화를 끊기 전 종종 수화기 건너편에서 쪽, 그녀가 날리는 작은 키스가 들렸다. 일이 끝나고 잠깐 만나면 언제나 그녀가 내 키스는 잘 받았나요 물었다. 그는 알면서도 종종 모른 척했다. 그녀는 뾰루퉁해 그의 등을 두드리곤 했다.
그는 얼굴을 감쌌다.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떡하란 말인지, 그녀의 많은 부분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 버렸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책상에 이마를 가져다댔다. 서늘했다. 눈을 감았다.
길고 매서운 꽃샘추위, 언제나 봄은 다시 오려나. 그는 울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