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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소설

제목 참기름 냄새
글쓴이 최효서
우리 아버지는 참기름을 참 좋아하신다. 고기 드실때도 아무 것도 안 찍고 참기름에만 찍어드신다. 참기름 냄새를 맡고 계시면서 우는 모습을 얼마나 보았던지. 어느 날 그냥 무심코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너무나 무뚝뚝한 성격이었던 우리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던 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담담하지만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그러니까 너이 할머니 말하는거다. 아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참기름 가게를 열었다. 가난한 달동네였던 우리 동네는 싸고 맛있는 어머니의 참기름을 좋아했지.
나도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루종일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고소하고 달큰한 냄새에 취해 하염없이 앉아있거나 엄마 몰래 손가락으로 한 방울 찍어먹곤 하였다. 그 조그만 한 방울의 기쁨을 난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단다. 기름이 못 쓰게 되었다며 어머니한테 혼난 뒤로는 그러지 않았지만 유년 시절 나에게 가장 즐거운 기억은 그것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온화하고 우리한테 먹을 것을 아끼지 않았지만 참기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셨다. 그 당시 나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에 눈물 콧물을 짜면서 혼났지만." 난 이 대목에서 아리송하면서도 너무 웃기어 소리내어 웃었다. 이렇게 점잖은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혼난 장면이 상상되어 웃겼던 것이다. 황당해 날 쳐다보던 아버지도 피식 웃으셨다.
"그런데.." 아버지 표정이 갑자기 확 굳으셨다. 나는 그냥 기다렸다. 몇분 후, 아버지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국민학교를 다닌지 몇 년 되지 않아 일이 생겼단다.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어머니 성격을 닮아 웬만한 놀림에는 콧방귀도 안 뀌었지. 키가 작다고 놀림을 받았는데 지금 그 녀석들이 날 보면 뭐라고 할까. 흐흐.그렇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데 우리 반에 아버지가 커다란 슈퍼를 시내에 하신다는 용만이가 나한테 스믈스믈 오더니
"야 난장이. 너이 아버지 돌아가셨다며?" 하고 똘마니들하고 키득키득 웃어대더구나. 난 아직도 그 녀석을 용서 못 하겠다. 난 아버지를 거의 기억 못하지만 막상 들으니 화가 불끈 치솟아서 용만이를 때려눕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지. 용만이 아버지가 화가 나서 우리 학교에 찾아오신거야.
우리 엄마도 오셔서 나랑 교무실에 들어갔지. 용만이는 저그 아버지 손을 꼭 잡고 흘겨보고 있더구나. 나는 용만이 아버지가 하셨던 말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참기름 집 아들 주제에 귀한 내 아들을 이렇게 해놓으면 어떡하냐.' 이러면서 대뜸 너도 맞아봐라 하면서 내 머리를 확 때리는게 아니겠니. 그런데 내가 화나는 건 용만이 아버지 말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름한 옷차림의 엄마와 뻔지르르한 양복은 내 어린 눈에도 차이가 났으니까. 그 뒤로 나는 참기름 냄새를 병적으로 싫어했다."
"!"
"이 아버지 유치하지? 그런데 나는 그 이후로 몇 년동안 어머니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보니 벌써 대학 졸업반에 들어와 있었어.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전화를 듣고 병원에 뛰어왔지.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이셨지. 난 그 얼굴에 안도하고 옆에 앉았어.
그런데 어머니가 내 어릴 적에 잠자기 전에 해주셨던 옛날 이야기 하듯이 아슴아슴 눈을 감고 당신의 이야기를 하셨다.
'진만아. 엄마는 처음에 돈 벌이가 시원찮아 참기름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많이 사가니까 이 엄마는 너이 아버지가 하늘에서 주시는 선물인가 보다 하고 기뻤지. 용만이 아버지가 했던 말이랑 엄마가 창피해서 네가 그랬던 거 다 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엄마 자신한테 화나고 진만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네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했지. 진만이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해주려고. 남 부럽지 않은 자식 만들고 싶었다. 너는 내 아들이니까. 그렇게 해서 너를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나는 참기름 장사 했던 것을 창피해 하지도 않을거고 후회하지도 않을거다. 내 하나뿐인 목표는 너를 잘 키우는 것이니까. 모든 어머니들이 마음 아니겠니.' 하시더라. 내가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까 내 손을 잡으시면서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후회하지 않아도 ,진만아. 그냥 그 일은 네 마음 속에 묻어두거라. 잘 커줘서 고맙구나.' 하면서 눈을 감으셨다. 주무시는 것 같았지. 몇 분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나는 어머니의 참기름 가게 앞에서 있었던 것 처럼 하염없이 앉아있었지."
어느새 나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딸아.지금의 난 참기름 가게 앞을 지나가면 행여 어머니의 냄새가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그 고소하면서 달큰한 냄새를 맡고 있곤 한다. 그건 바로 행복하면서도 슬펐던 내 유년시절의 기억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니깐 말이야."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난 아버지의 제사마다 참기름 한 종지를 놓곤 한다. 아버지가 하늘에서도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고 기뻐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