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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는 모두 여행자다 - 방랑자들을 읽고
글쓴이 허수영

우리는 모두 여행자다


방랑자들을 알게 된건 대부분 그렇듯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 가 2018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다.
소식 듣고 바로 읽고 싶었는데, 아이를 키우며 400페이지 넘어가는 책은 손에 잘 안 잡혀서 겁도 났다.
게다가 책을 읽게 된건, 연말, 방학. 안 그래도 어려운 책인데 진도가 잘 나가진 않았다.


하지만 서평을 써야했고, 또 무엇보다 책이 재밌었다. 오랜만에 좋은 문장을 읽는 기쁨을 느꼈다.
책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감상에 쓰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그 문장을 읽고 나의 감상을 쓰는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옮기고 싶은 문장이 많았다.
그래서 너무 좋아 괴로울만큼 행복했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알 것이다.이 감정을.


책을 읽으며 여행 가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여행을 좋아하진 않는다. 좋아하는 게 많아 그 돈을 거기다 투자하니, 여유가 없었기도 했다.
외국도 세번인가 나가본게 전부고 그것도 가족여행이나 신혼여행 정도다.
어렸을 땐 파리도 가고 싶고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관광지도 가고 싶었으나, 나이를 먹으며
그런 생각도 없어졌다. 하지만 여행 에세이나 관련 책을 읽는 건 좋아한다. 사람도 한 곳에만 머물면 생각도 굳어지기에
여행 에세이를 보면 그 사람이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 경험, 생각이 새롭고 좋다.
이 책도 그랬다. 여행하면서 읽으면 딱 좋을 책.
소설, 에세이? 그 중에서도 연작소설? 아니면 단편집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어 머리 아프지만 그래서 너무 좋았다.
책을 읽는 내내 큰 배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멀미가 나기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거 같다가
나쁜 사람을 만나 속상하기도 하고. 세상에 없는 맛있는 음식을 먹은 거 같은 느낌.


해설에도 나오지만 어느 장을 펼쳐 있어도 무리가 없는 책이다. 아주 짧은 감상도 있고, 편지글, 중편 정도 되는 소설도 있다.
내가 읽은 걸 기억하기 힘들만큼 여러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나오지만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작가 본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작가의 이야기로 짐작되는 창작이나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서 결국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색깔이 엷어지고 모서리는 닳아서, 글로 적어 놓은 것들은 결국 희미해지고 사라져 버린다.

p.108 '여행안내서'중에서


그리고 거의 매 챕터마다 묘사에 감탄하곤 했다. 내가 작가라면 샘이 났을 거 같다. 아니, 좌절했을까.

벌집에는 비밀이 없었다. 소식은 유각형으로 퍼져 나갔다. 침실에서 침실로, 굴뚝으로, 화장실로, 복도로, 안뜰로. p.173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나를 아프게 한다. 유령이다. 유령 같은 통증이다. p.317


표제작이기도 한 '방랑자들'은 다 읽고 나서 긴 숨을 몰아 쉬었다. 주인공의 방황에 공감했고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다.
'9호실'에선 9호실 열쇠가 잘 분실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한 문장만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감탄했다.
사실 방랑자들은 읽고나서 뭔가를 덧붙인다는 게 의미가 없는 책이다.
한 문장,단락 읽어야만 느낄 수가 있다.
우리 모두는 여행자고, 여행할 때마다 새로 태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는 또 모두 죽음이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므로,
같은 곳을 향해가는 여행자인 것이다.
마지막 단락을 읽으며, 이 책을 어딘가로 떠날 때 지니고 가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떤 편견도 없이 문장 속에서 휩쓸리고 잊어버리고 또 다시 새기는 그 경험. 놓치지 말라 추천하고 싶다.


이 터널을 통과하여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차가운 공중 도로를 날아서 새로운 세계로 향할 것이다. 우리의 눈에 비친 그들의 미소에는 일종의 약속이 담겨있다. 그 미소가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p.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