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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클럽2기] 앤드루 포터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글쓴이 조단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출판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사물에 대한 시선인 즉 감각의 형성을 돕는 것이 빛이라면, 이를 수조의 여과기처럼 받아들여 자신의 그물을 통과한 감각이 잔류하게 하는 곳이 사람이고, 책에서 등장하는 물질이란 대상 자체에게 와 닿는 실체라기보다 그러한 감각이자, 현존하고 있는 기억을 나타내는 지표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기쁨이라 이야기 했을 때 한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정의는 각각의 상황과 결부되어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의미의 제한을 어떻게 명료히 하는가가 관점에 관한 표현이라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다른 의미에서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게 한 작품입니다. 이 책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담담히 그려냄을 통해 개인의 시점이나 인물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맥락과 간극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일상적으로 나열한 사건의 소재는 자극적이고 때로는 격정적이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차분하게 스며드는 것이 묘미입니다. 앤드루 포터가 써내려간 단편집은 기교가 없는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 또는 말이나 태도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독자에게 작가의 감정이나 결론을 전달하기보다 자신의 느낌에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그렇기에 읽기에는 쉽지만 단편의 전체 내용 없이 손꼽아 말하기엔 어려움을 안깁니다. 그럼에도 밑줄을 그은 문장이 있다면 아래와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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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자주 우리와 떨어져 사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책임을 묻기에는 너무 어렸다. 대신 아버지가 우리 삶에 남긴 빈 공간에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이상화시켜 채워 넣었다. p19


이 문장에서 그 비평가는 아버지의 영화를 젊은 천재의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이후 세월이 흐른 뒤 깨닫게 된 것인데,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단어들과 그것들에 실린 무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p20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렇게 몇 분여를 보낸 후에야, 우리는 마침내 뒤로 돌아 우리의 지나간 행동을 직면한다. p87


무언가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강해져서 그것에 대항하려 애쓴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강해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p117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나의 중요한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P125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P126

그는 말했다-그것은 이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말이다-그는 말했다. “얘야, 이 일은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란다.” P154


레이철을 생각할 때면, 10미터 아래로 강을 두고 철로 다리를 건너던 그 경주에 대한 기억이 주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발을 디디는 곳을 보지 않았던,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P180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진행성 양쪽 귀 난청으로, 그 말은 태어날 때는 아무 이상이 없거나 한쪽 귀에만 문제가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양쪽 귀가 다 안 들리게 된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그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귀가 안 들리던 아이들, 자기들의 청력이 언젠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을 품어본 적 없는 아이들보다 가르치기가 더 힘겹다. 그러나 이런 모습, 자기들이 읽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나마 입 밖으로 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 아이들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p183


이미 깨져버린 걸 어떻게 도로 붙이겠어. p208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 누군가를 알게 돼. 익숙하게 된다고. 그이가 완벽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망할 새끼처럼 구는 경우가 안 그런 경우만큼 있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작년부터 그이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를 위해 따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어. 그게 자꾸 발목을 잡아, 그이가 벌써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p245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것은.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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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에만 있는 역자의 말에 의하면 리처드 파인만에 따르면, 낮에 램프를 켜놓고 보면 빛의 입자 100개 중 평균 4개는 반사돼 돌아오고 96개는 유리를 통과한다. 어느 누구도 빛의 입자가 경로를 선택하는 과정을 알지 못하며 특정 입자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 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상처와 실망, 좌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지요. 빛의 움직임에 삶을 비유한 것처럼 책에는 마음에 상처와 구멍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 트라우마, 혼동, 죄의식, 내가 한 게 아니라도 내 일처럼 여겨야 할 때와 내 일이 아니다라고 해야 할 때, 사회적인 시선에 관한 두려움, 선택과 책임, 벗어나고자 재구성하며 더욱 얽매이는 일, 그때는 몰랐거나 혹은 안다고 생각했던 것, 무리로부터 소외된다는 것, 만난다는 것, 그러기를 바라는 것에 관한 서사와 감정이 등장합니다. 개인의 회고 또는 고백, 간직해둔 비밀처럼 보이는 글을 읽다보면 인물의 삶에 연루되어 변화하는 순간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구멍12년 전 죽은 친구에 관한 죄책감에 자신이 죽는 꿈을 꾸는 이의 이야기로 진실 대신 화자의 파편적인 회상만이 남겨져 있고, ‘코요테에서는 20년 뒤 방황하는 한 사람으로 다가온 부모의 심정과 자신에 관한 이해와 바람이, ‘아술에는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부부가 집에 들인 교환학생 아술을 매개로 드러나는 유년시절과 현재의 심리와 갈등이, 소설의 타이틀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는 자신과 닮은 이상과 처한 현실 같은 두 남자 사이에 서 있는 여자의 이해 아닌 이해와 깨달음의 순간이 담겨 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만 개인과 개인 간의 스쳐지나갈 수 있는 무언가를 포착하여 장면을 만드는 조밀함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 대게 회고록과 유사한 단편들에 비해 관계에 관한 점진성이 돋보이는 머킨이나 폭풍과 같이 주제로 삼고 싶은 이야기를 두고 인상적인 부분에 관한 감상을 적을 수도 있었지만, 이는 모든 글에서 받는 인상과 마찬가지였으므로 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문학에서 공동으로 사유되는 것은 개인이 가진 문제이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각할 기회가 있는데, 책을 읽고 오래도록 생각해보았지만 덜컥 많은 것이 떠오르다 스며들어 함몰되는 듯한 긴밀함을 표현할 수 있는 방도가 제게는 없던 덕분입니다. 그래서 다소 책을 소개하는 글로 마무리된 면이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