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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올가토카르추크 - 태고의 시간들
글쓴이 조단비





《태고의 시간들》은 분할 점령, 1·2차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일어난 20세기(약 1910~1990 초)를 배경으로 가상의 마을 태고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이곳에서 사람과 사물, 식물과 동물들은 각각의 주체를 지니며 84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관점의 개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이전의 일이 이후의 일에 영향을 미치며 결합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시대의 동일함에 있다. 현실과 신화적 환상이 펼쳐지는 시점으로부터 독자는 올가 토카르추크가 부여한 인과율에 의문과 경이를 느낄 수 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를 겪는다. 삼대에 걸쳐 마을 내에 있는 개인과 서사의 맞물림을 보노라면 '생성과 소멸 안에 지속과 변형을 되풀이하는 유기체'라는 설명이 와닿지 않을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세포질처럼 동적인 순환과 정적인 유지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 속에는 개인의 이념과 태도에 의한 정쟁과 같이 보편과 개성을 넘나드는 일이 허다하지만, '행복'과 '평안'이라는 이윤의 추구에 맞닿아 있다. 삶과 죽음이 그림자처럼 서로의 뒤를 따르는 생에 있어 느낄 수 있는 실존과 고독은 인간의 생활 전반을 아우르며 시간을 넘어 소유할 수 있는 어떠한 것들에 관한 욕망과 자리에 관한 정착을 외친다. 유지와 안정을 향한 불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태고의 시간들을 읽다 보면 심리학을 전공하고 프로이트로 인해 사상의 격변을 경험하며 칼 융의 사상과 불교에 관심을 둔 올가 토카르추크의 철학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백강과 흑강이 맞닿은 방앗간



1. 크워스카


"왜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하죠? 나는 당신과 동등한데"


크워스카는 한 여름 태고에 나타난 소녀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술집에서 푼 돈과 끼니로 욕망의 배출구를 찾아 그의 성을 매수한 남성들이 꺼림칙함을 느꼈던 건 크워스카 자신이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며 동등한 선상에서 그들을 바라보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크워스카는 훗날 라틴어 천사(Angelus)를 의미하는 허브 안젤리카와의 관계를 통해 딸 루타를 낳는데 성장한 루타와 우클레야의 결혼을 허락할 때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 동계에만 그의 집에 머무를 것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데메테르를 연상시킨다. 예언과도 같은 크워스카의 능력은 홀로 숲에서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낳다가 숨진 아이를 향한 고통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역병이 횡행할 때 꿈속에 나타난 천사가 전했다고 하며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치유력이 있으리라 일컬어지는 식물, 안젤리카와의 교접으로 페르세포네와 같은 루타가 태어났다는 건 죽은 아이의 재림과 동시에 사망한 아이가 자신의 곁에서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위험을 배제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던 소망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망은 루타로 인해 깨진다. 크워스카가 전쟁을 예언하고 숲에서 살다가 고립된 나머지 아홉 자녀 중 일곱을 잃고 유산에 유산을 거듭하며 유산하지 않은 아이를 지우고 실종된 두 자식과 백강에서 익사한 남편을 둔 플로렌틴카가 자신과 호의를 나누었던 독일 군인에 의해 키우던 개들과 자신마저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여 루타가 평소대로 플로렌틴카 할머니께 가던 중 러시아와 독일 군의 경계선에서 그들에게 무참히 성폭행을 당하고 만 것이다. 게노베파에게 한 말 "젊은 여자는 다 나이 많은 여자의 딸이지. 게다가 당신한테는 이제 딸도 아들도 필요 없잖아."와 겪은 일로 인해 선택을 하게 되고 숲으로 온 자신과 같이 행복을 찾아 방황하던 루타가 떠나간 이후의 서술 "언젠가는 그 공간에서 어린 계집아이 하나를 발견하게 될 거라고 크워스카는 믿었다. 그 아이를 데려가서 루타의 빈자리를 채우리라고 그녀는 다짐했다"를 거쳐 최종적으로 임종을 앞둔 이지도르에게 속삭인 말 "세상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얼른 떠나렴. 다시 돌아오라는 꼬임에도 절대 넘어가선 안 돼."라고 하는 일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독립성과 자주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의존적으로 순환되고 있는 크워스카의 내면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크워스카는 신화적 인물로써 신의 전언을 대리하는 성스러움을 지닐뿐만 아니라 젖에서 사람을 치유하는 모유가 흐르는 기적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에게 휘파람을 불던 목수와 질색하는 교구신부를 향해 치마를 들어 올려 둔부를 내보이고 나쁜 인간과 육체관계를 맺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태고의 시간들에서 나오는 모든 질서와도 관련이 있는데 신의 소리를 듣지만 그 자신은 신이 아니고, 《태고의 시간들》에서는 신조차도 속해있는 무언가에 의한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하나의 유기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의 현존은 고사리 꽃과 같이 기적을 탐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행사하며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병든 노모의 종기를 고치는 일과같이 기적은 작위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본디 걸어야 했을 길로 그들을 인도한다. 변화되는 모든 행위의 근간에는 시간이 들더라도 균형을 유지하는 조화와 질서가 잠들어 있다. 궤도를 이탈하는 것 또한 궤도 내에 자리 잡은 일로 자연의 섭리이다. 그것은 크워스카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2. 게노베파

 

전장에 간 미하우의 부재로 홀로 뱃속의 아이를 짊어지고 방앗간 일을 해야 했던 게노베파는 크워스카의 육신을 취하려 했던 이들과 달리 아무런 대가 없이 그에게 동전을 던지는 연민을 베푼다. 성녀 Genovefa(독일식 표기 발음은 제노베파)라는 이름에 걸맞게 둘째를 낳았을 때에도 크워스카가 자신의 딸과 그의 아들을 바꿔치기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뇌수종에 걸려 일찍 죽으리라는 진단을 받은 이지도르에게 연민을 느껴 사랑이 샘솟는다. 5년에 걸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고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게노베파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크워스카에게 빵을 건네며 "남편이 오고 있다"는 예언을 듣고 남편이 오기를 매시간 기다리며 집을 비우지 않고 성당에 가지 않으며 상실의 시간을 보낸 몇 달 후 17세 전후로 보이는 어린 유대인 청년 엘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미하우가 돌아오기 바로 직전 그와 하룻밤을 가지며 이후 이지도르가 태어나기까지 심적인 고난을 겪는다. 《태고의 시간들》에서 딸은 정복욕을 가지고 전장을 시작하는 아들과 달리 종전을 암시하는 생명력을 가진 징후로써 여겨진다. 손가락이 잘린 세라핀 댁에 딸이 태어남을 다른 이들이 축복하였듯이 게노베파에게 아들을 수태함은 엘리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정절을 지키지 못함에 있어 미하우에게 했던 "그 어떤 남자도 날 건드리지 않았어요"라는 부정의 말, 결백의 호소와 더불어 가정과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행위 전반에 대한 전장의 신호이자 불길함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지도르의 뇌수종은 세상 밖에 배출되어 고난과 함께 생을 부여받는 의미를 지닌다.



3. 파베우와 상속자 포피엘스키

 

사회적 성공과 정점을 이루고 싶었던 파베우 보스키는 자신의 아버지인 보스키 영감과 같이 평생 지붕 위에 올라 널을 맞추며 살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언제나 미래를 바라보며 대책을 세우고, 과거의 자신이 상속자와 같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떠했을지, 미시아를 만나는 것처럼 현재와 같은 선택을 하였을지를 상상하며 더 나은 길을 도모하고자 한다. 파베우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물건을 타인이 만지는 데 혐오를 느끼고, 고된 노동으로 거칠어진 누이들과 축사와 같은 환경에 증오를 느낀다. 파베우에게 있어 신은 자신이다. 이러한 욕구는 그로 하여금 출발선이 다르지만 지식과 교육이라는 수단을 빌려 사회적 지위를 정복하여 자리매김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는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다. 누구도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업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우클레야를 필두로 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권력을 지닌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고 그들과 함께 사창가에 드나들며 여자를 샀다.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썼다. 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느라 미하우가 딸의 미래를 꿈꾸며 파베우와 소중히 지은 집은 때때로 술과 음담패설, 고성과 연기로 자욱했고 파베우는 그 앞에서 가족들이 각자 악기와 역할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연주하는 일을 뿌듯이 여겼다.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수 있던 딸 아델카의 실수에 관대하지 못했던 것, 오랜 가사와 노동에 몸이 망가진 미시아에게 사창가의 여성에게 꼬박 해온 피임을 하지 않은 것, 가정을 뒤로한 것, 일을 쫓아다닌 것, 어떠한 지위로써 자신을 수식하며 권위를 행사했던 일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항상 타인의 것으로 자신의 미래와 더 나은 가능성을 꿈꿨지만 그것밖에 이룬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 뒤에 무엇이 남을 수 있겠는가? 미시아가 사망하고 돈을 벌어 올 때까지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여 짐과 이방인으로 취급했던 이지도르를 양로원으로 보내며 자신과 보스키 영감이 지었으나 폭삭 무너져내린 누이 스타시아의 지붕을 보며 홀로 남은 집에서 파베우는 공허함을 깨닫는다. 깨달았다기에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다. 생존을 향해 투쟁을 하고 치열하게 내달리며 각자에게 서로의 역할로 정체와 등급을 매기고 짐을 나누어왔으나 삶은 오로지 그만이 견뎌야 할 고독과 함께였다.

사람들과 대조되어 나은 상황에서 그을림 없이 부유한 삶을 살아갔으리라 여겨지는 상속자는 나이가 들수록 삶에 관한 회의를 느끼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지속된 전쟁은 그가 가지고 있다 여겨지는 일들을 되돌아보게 했고 포피엘스키는 그 속에서 재생과 부패 몰락에 관한 비인간적인 삶의 구조를 엿보게 된다.

"젊은이는 성장을 거듭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바쁘다. 어린 시절의 작은 침대에서 방과 집, 공원, 도시, 나라, 세계로 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분주할 수밖에 없다. 성년기가 되면, 뭔가 더 원대한 것을 꿈꾸게 된다. 그러다 사십 줄에 들어서면, 전환점이 찾아온다. 젊음은 그 고유한 강렬함과 스스로의 에너지 속에서 지쳐간다. 어느 날 밤 혹은 어느 아침 인간은 경계를 넘어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래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게 된다." p42

포피엘스키는 서술에도 나와 있듯 자신이 하는 모든 종류의 낙관주의가 결국 청년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기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면 이 또한 새로움에 관한 추구에 불과했을까 스스로의 사유와 가장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당면한 일들에 몰입해 있는 동안 단절되어 가는 소통은 포피엘스키를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분리시켰고, 감싸주길 바랐던 아내는 잔소리꾼으로 품 안에 있던 자식들은 정서적으로 멀어져 아버지를 비웃는 이들로 느끼게끔 변모시켰으며, 미래파 화가인 마리아 셰르와 불륜을 저지르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불확실한 야망을 동경하게 하면서도 파베우와 같이 '언제든지 열어보고 되돌아볼 수 있는' 가정에서의 안정과 확실함을 유지하고 싶은 열망을 들끓게 했다. 마리아 셰르와의 만남과 그의 미국행은 그러한 상속자가 가진 젊음의 영속과 쾌락의 휘발성,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하는 매개이다. 포피엘스키는 평생에 걸쳐 죽는 순간까지 죽음과 너머의 삶에 집착하며 질문을 던진다. 자신과 함께 불륜을 저지르던 젊은 애인이 떠나감으로 관절염을 얻은 어느 날 자신의 정서와 다리를 치유하기 위해 아내가 들인 유대인 치유사 랍비와 통역사 소년이 주고 간 게임으로부터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생을 갈구하여 자신의 무덤에 함께 묻기를 당부한다.

태고의 시간들에서 게임을 진행하는 건 상속자 한 사람이지만 모두이기도 하다. 시간과 전쟁의 풍파에 앞서 영원이란 없고 모든 것은 몰수되며 변화와 새로움이 탄생한다. 소유의 길에 생을 바쳐온 파베우와 포피엘스키가 지닌 삶의 형태는 다르지만 변화에서 유지에 이르는 집착으로부터 동일성을 느낄 수 있으며 각자의 패러독스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결핍으로 게노베파와 같은 일을 상습적으로 저질렀음에도 유사한 듯 상이한 태도를 지닌 파베우와 포피엘스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다. 어쩌면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며 보듬어주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4. 스타시아와 미시아


스타시아와 미시아는 파베우와 포피엘스키의 관계처럼 닮아있다. 깨끗한 환경, 하이힐을 신은 발, 여리여리 한 손목과 고운 손 다정한 부모, 고른 땅과 햇볕 아래 지어진 새 집 그리고 동반자. 미시아가 가지고 있는 건 스타시아가 원하던 바였다. 새 집을 짓는 일을 통해 딸의 미래를 도모하고 결혼을 늦추고자 하는 미하우를 보며 보스키 영감은 아내가 죽고 딸들이 시집을 간 뒤 성미가 급한 자신의 폭력과 고성을 받아들이며 시중을 든 유일한 딸 스타시아에게 자신의 모든 돈을 긁어모아 집을 지어주기로 결심한다. 지독한 열등감과 경쟁심이었을까 아니면 자식을 측은히 여겼기 때문일까,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의 발로였을까 미하우네 땅 바로 옆의 땅을 사들이며 모방한 집은 그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그렇듯 불만족스러운 세상에서 스타시아는 시중을 들다 숨죽여 울며 점심마다 빈번하게 상상을 한다. 비교로 인해 불행해지는 현실에서 자신의 절실한 욕망이 삶의 기류에 융합되어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며 꿈꾸던 장면을 능동적인 행동으로 옮긴다. 그렇기에 꿈에서 깨어나듯 생을 자각한다. 스타시아는 현실에서도 환상을 쫓으며 미시아에게 자신의 바라던 모습을 대입하는 인물이다. 둘 모두 《태고의 시간들》에서 상징하는 바처럼 혼돈으로의 기로를 열듯이 첫아이로 아들을 낳는다. 스타시아의 유일한 아들은 그의 정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상상 속에,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정체만이 도움이 될 뿐이다. 아들은 항상 자신의 살 길을 찾아 떠나 있다. 사람과 교류를 하면서도, 타인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 하면서도 긁어모은 환상으로 자신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그는 늘 외로움에 시달렸다. 스타시아는 고독사하고 나서야 영원히 편안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시아는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싶어 하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찾아내고 마는 작은 행복은 그의 아버지 미하우와 수호천사가 그에게 주고자 했던 영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희극적으로 뒤틀리고 일그러진 삶에서 그를 일견 가장 평범하고, 평면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아버지인 미하우가 걱정할 정도로 파베우가 피임을 거부하여 끊임없이 배출되는 아이(여기에서 미시아는 피임을 함으로 사창가의 여성과 동일한 의미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정을 등한시하고 사창가에 드나드는 남편 파베우와 그의 지위를 위해 일하고 마주 보아야 하는 일상, 처음으로 남편과 다툰 그 해 늦가을 백일해를 앓다 사망한 자식은 이후 일어날 수 있는 그의 항변과 모든 울음을 삼켜버렸고, 부르트고 상한 몸, 늙어가는 육체, 잃어버린 젊음과 외모, 잇단 가사와 노동으로 얼룩져 정착된 현실에 찌들어 돈을 벌기 위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일들을 죽기 직전까지 하는 것 그리고 그렇기에 아픈 자식을 위해 사창가의 여성에게 받은 약으로 자식을 살린 남편의 모순을 모른 채 용서하는 것,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행했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 자신만의 시간의 결여,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을 하도록 만들었다. 죽기 직전 가정을 꾸리던 모든 일에 손을 놓는 것으로 마감했던 그의 삶은 전쟁을 겪는다는 시공간 안에서도 소리 없이 파고드는 일상적인 불행의 집합체였다. 아버지가 주신 그라인더를 쥐고 터키식 커피를 끓여 마시는 그의 한결같음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과 다른 내일의 일관성을 의미하고, 그 속에서 자신과 모두의 생과 역사를 부여잡고자 하는 고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러한 시점에 있어 수동과 능동은 누가, 어디에서 정하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스타시아와 미시아는 바로 옆에서 동시성을 강조하며 대립되는 장면들을 부각시킴으로 일치를 이룬다. 이들은 옆이지만 옆이 아니고 사선처럼 비껴간 시선으로 서로 다른 공간을 바라본다.



5.상속자의 아내와 딸


18세기 초상화처럼 정체된 조화로움을 지닌 상속자의 아내는 타인이 보기에 남편인 상속자의 지위에 얹혀 소유하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를 원망하지 않았고 가족이 살 길을 도모했다. 상속자 일행이 홀로 또는 한 가정 내에서 서로의 수난을 짊어지기 보다 나은 상황에 있는 가문의 일가친척의 도움을 받아 사업의 물꼬를 트고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건 사실이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주저앉았어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들은 같지 않다. 그러나 그렇기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상속자가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피부 암에 걸려 사망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가치를 담아 아이디어를 생성하여 구두의 신발 밑창을 만들었듯, 식구만이 아닌 마을에 속한 사람들과 크워스카에게 자신이 가진 것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성 안에 불러들인 초기와 같이 상속자가 게임과 신발 밑창 어느 하나에 빠져 자신만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을 보듬으며 집안을 이끈 게 상속자의 아내라는 점에서 그의 강인함을 발견할 수 있다.

상속자의 딸은 위와 같은 사태에서 자랐다. 아이를 낳기 전 몸매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시대적 요구와 기호를 파악하는 데 감각이 있었다는 평가와 대조적으로 전쟁이 끝난 뒤 변혁을 이룬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여 사망한 것이리라 여겼다. 그렇게 이지도르를 보며 상속자의 딸이 한 말, "정상적인 가정마다 그런 사람이 한 명씩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광기의 단면들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누군가가요. 그가 일종의 안전밸브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주는 걸 수도"(p320)에 미시아는 고개를 젓는다. 상속자의 딸이 정상적이고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학문을 배우려 하며 이로써 낙천적인 태도로 삶을 대한다는 점에서 젊은 파베우의 믿음과 결부되는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더 나아지고 바뀌었기에 이전과는 다르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걸 초기의 미시아와는 달리 후반의 미시아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저마다의 짐을 서랍처럼 짊어지고 있는 삶에서 한 인물에게 모든 것을 몰아넣을 수는 없으며 확실하거나 불확실하기만 한 일은 없고 어떤 것이 정상이고 비정상인가는 규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6. 미하우


5년 동안 전쟁에 불려갔던 미하우는 미시아를 보자 돌아오지 않는 시간과 공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했고 자신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으로 여기며 사랑했다. 그렇기에 미시아가 원하는 일들을 다 해주면서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한 건 아닐까. 미하우는 자신의 딸이 언제까지고 어린아이로 남아 시간 속에 멈추게 하여 영원한 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에게 있어 미시아의 월경은 자신으로부터 떠나간 딸의 노화와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다. 파베우와의 결혼을 반대하면서도 그의 행복을 기원하며 집을 지었고 엘리가 죽은 뒤 몸이 성치 않게 된 게노베파를 돌보기 위해 자식들을 피난 보내고 마을에 남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주들에게 줄 생크림을 만들 우유를 남겨두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미하우는 자신의 집에 러시아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숨겨주기도 하고 끝났다고 여긴 악몽의 시간이 눈앞에 다시 펼쳐짐에 있어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그가 포탄이 태고 마을에 떨어지고 숲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태고를 한 번만 보게 해달라는 게노베파의 청을 못 들은 척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게노베파가 그곳에 두고 온 게 자신의 물레 방아와 같은 시간이 아니라는 걸 미하우가 알았던 건 아니었을까.



7. 이지도르와 루타


안정된 삶에서 불안정으로의 경험은 그를 세상 속에 녹아들게 했으며 그러므로 세상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이 있는 공간과 위치에 상관없이 이지도르와 루타를 보며 든 생각이다. 루타는 "마을에 가면 안 돼. 거기 가면 큰일 난다. 어떤 때 보면, 거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술 취한 사람들 같다니까. 어찌나 굼뜨고 게으른지.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면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고" 하는 크워스카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숲에서 자란다. 땅속에 있는 버섯의 박동을 느끼며 태고의 경계를 알고 있는 루타는 마을에 있는 이들과 어울리고 싶어 한다. 이지도르를 만난 것도 루타가 라일락 나뭇가지에 앉아 마을과 누군가의 새 집을 들여다보듯이 이지도르가 자신의 새 집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뇌수종으로 인해 입을 다물지 못해 침을 흘리며 미시아네 집에서 살아가던 이지도르에게 루타가 경계의 비밀을 전하기 직전, 이지도르는 크워스카를 만난다. "너는 똑똑한 아이야. 그리고 마음씨도 착하지. 언젠가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루타에게 크워스카가 자신에 대하여 항상 묻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다. 크워스카가 기적을 일으키고 예언을 할 수 있는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일들은 큰 의미를 가진다.

경계를 보고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음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지도르에게 '우리에게 다른 세상은 필요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던 루타는 전쟁이 벌어진 뒤 이지도르에게 이반이라는 러시아 군인이 수간을 하며 이야기한 대로 욕망을 쏟아낼 수 있는 구멍 취급을 받으며 독일과 러시아 양측의 군인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정신을 잃고 나서도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 이지도르와의 행복을 버리고 우클레야의 소유로써 갖은 폭언과 폭행, 전시를 당하며 중요한 사람이 입고 다니는 옷을 걸치게 된 루타는 크워스카가 어떻게 나쁜 인간과의 관계에 초연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사람은 화려한 옷을 입고 직책을 지녔으리란 루타의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루타는 우클레야와의 관계에서 외설과 일상을 오가는 사진을 전리품처럼 남기고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브라질로 떠난다.

이지도르는 태고 마을 내에서 죽는 순간까지 루타를 그리워하며 수취인의 거주지가 불명하여 보낼 수 없는 마음 대신 사용한 엽서를 모아 다양한 기업에 카탈로그를 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편지가 누락되는 일로 돈을 벌어 브라질로 가는 것을 꿈꾼다. 그렇게 생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종 구조가 이종 구조로 바뀌는 세상의 규칙을 발견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로원에서 흩어져내린다.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살아온 이지도르와 루타 크워스카의 모습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생의 조밀성이다. 누군가를 향한 일은 자신에게도 속할 수 있는 일이다. 크워스카가 이지도르에게 우호적이며 죽은 영혼에게 그 자리를 떠날 것을 촉구하는 이유와 루타의 대용을 빈자리에 들이기 위하여 찾았던 이유는 자식이 바뀌었다는 게노베파의 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생을 가로지르는 세상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지도르가 현상과 두려움 너머를 바라보며 퇴화된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사유하여 현재를 살아온 이유는 타인보다 감정과 두뇌의 발달이 더뎌 모르거나 깨어나지 못해서, 뇌수종에 걸린,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지도르는 내게 있어 크워스카의 말처럼 태고의 시간들을 통틀어 순수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인간 내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가장 현명한 인간이었다.



8. 아델카

 

담배를 피우며 끝자락에 등장한 아델카는 시대가 변했음을 알리는 전령처럼 보인다. 독립해서 살아가는 아델카에게 파베우는 왜 아들을 낳지 않았는지 묻고, 미시아와의 자식 모두가 딸만 낳았음을 이야기 함으로 전쟁의 종막을 고한다. 남편이 너를 버리고 떠났느냐는 물음도 매한가지이다. '아들과 남편'. 파베우의 물음은 아델카가 생각해온 의미를 지니지 않았을 수 있지만 응어리는 지워지지 않는다. 이지도르를 양로원에 보내고 혼자 남은 파베우는 일전에 겪었던 미시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사물이 정지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델카에게 집을 관리하며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음을 성토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홀로 투쟁하며 살아간다고 여겨 외로웠던 파베우는 죽는 순간까지 이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델카가 떠나 있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그 틈에는 메울 수 없는 편린이 들어섰다. 세월 속에 자물쇠를 열며 손을 떨고 있는 아버지는 작아졌고, 그는 키가 커졌다. 너무 늦게 돌아와 이미 모든 게 끝났으며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파베우와 잠시 '머물다 갈 수도 있다'는 아델카는 세대가 교체되어도 생의 맥락에 있어 유사해 보인다. 파베우 몰래 짐 가방에 커피 그라인더를 챙겨 손잡이를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델카의 모습은 되돌릴 수 없는 누군가가 레코드에 담아 놓은 시간을 돌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에슈코틀레 성모화가 인간에게 말했듯이 축복을 내려도 받아들이는 건 그 자신의 일이다.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억압과 여성과 남성, 사물, 동물, 식물 모두가 주체가 되어 각기 다른 입장과 사회의 현실을 공통과 다름으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태고의 시간들》은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영혼의 존재성 & 태고의 의미



《태고의 시간들》은 전쟁의 순간에서 죽음을 엿보고, 전쟁이 없는 곳에 살아가면서도 전쟁을 치르며 죽음과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놓지 못하는 이들을 그려내고 있다. 생명의 탄생과 융합 그리고 소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는 가운데 지속되고 변화되는 변함없음이란 역사의 기반이 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자 누군가의 원형으로 생명, 동작, 원적인 순환, 유지와 태동을 반복하며 이곳에 있다. 각 인물들이 그려낸 소유와 허물, 나의 것이란 그러한 모든 것이자 자아의 실현인즉,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구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노화를 포함하여 파베우가 미시아의 유언을 듣지 않은 채 이자도르를 양로원에 보내고 상속자의 딸이 게임판을 무덤에 묻지 않으며 스타시아의 아들이 유품을 챙기지 않고 다만 그가 원했듯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간 것은, 또한 그러면서도 아델카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를 가져간 건 이지도르가 미시아에게 '당장의 이익을 위해 버섯의 뿌리를 캐면 남아나지 않는다'는 맥락의 조언을 하였듯이 생이 남겨진 이들의 몫이라는 걸 역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고에서 말하는 「아주 먼 옛날」의 일화들은 현재까지도 내려와 반복되며 자취를 남기는 일들이다. 신화는 서로의 흔적과 내면 안에 살고 있다. 죽음은 액면적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환경과 환경은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며 누군가를 살리거나 죽게 한다. 공포와 같은 감정에 얽매여 살면서도 죽을 것인가, 죽으면서도 살 것인가. 생명은 기존에 이 땅 위에 있었던 이들의 숨이자 역사를 담고 있다. 그로 하여금 끝이 났으나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 이 글은 독서진흥을 위해 글나라북클럽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개인이 작성한 후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