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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북클럽2기] 김우창 - 법과 양심
글쓴이 조단비

 

  

Epiphany Philos Humanitas 법과 양심 / 김우창 지음 / 에피파니 출판

 

 

 

 

인간의 문제는 부도덕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다. 양심의 인간은 그 양심이 이데올로기적일 때 다른 양심의 인간에 대해 잔인하다. 정치적 정의의 실현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악인을 만들어 내는 사회 조건을 향한다. 그리하여 악인도 희생자라는 관점이 성립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악인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불교의 자비는 인생이 슬픔의 바다라는 생각에 이어져 있다.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모든 것에 열어놓는다. 좋은 사회란 진실의 사회라기보다는 인간적 현실의 여러 요소가 균형을 이룬 사회이다.

 

- 법과 양심의 서문에서

    

 

 

1. 성문화된 법에 이르기까지

 

 

 

법이 모든 경우를 포괄하지 못함으로 발생되는 고통은 전제에 관한 가능성을 요구하며 때로는 일어나고 난 뒤에야 어떠한 안건에 관해 사유하게 합니다.

 

현실은 행위와 해석이 동시 발현하여 공동의 가치를 창출합니다. 그렇기에 진실(사실 관계)에는 현실적인 요소가 어떠하였는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포함하여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왜 일어났는가(6하 원칙)'를 이야기 함으로, 그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맥락의 사례로부터 해당될 수 있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게 아닐까 합니다. 다양함과 다름은 같을 때도 있지만 다르고, 불변함으로 과거에 안착된 행위와 가치에 따른 변화는 다르며 그것이 미칠 수 있는 영향도 다릅니다. 따라서 국가와 공동체와 같은 구조가 지닌 양심은 개인의 일상적 행위와 맞닿아 있기에 진실은 현실과 같고 개인이 내포한 사유(감정과 해석 및 동기)와 그것이 드러난 행위의 사실적 관계(입장)에서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의 표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의 내부 성찰을 거쳐 도덕을 발견하는 건 형식주의와 상대주의의 위험성을 안고 있으면서도 개인에게 있어 보편타당한 의무로의 발돋움을 선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법과 양심에서는 감정만 있고 원칙이 없거나 원칙은 있고 감정이 없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하여 개인이 사유할 수 있는 넓은 시선을 주지합니다. 정답보다 그에 가까운 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도록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무엇이 합리적인가'와 같은 '선택'에 관한 사유가 중요한 까닭은 주관적 개인이 모여 창출해내는 객관적 사유에 있습니다. 선택의 합리성은 실체와 개념에 이르러 적합한 것과 그럼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또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내는 효율적인 것만이 아니라 개인이 그렇게 여기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사결정은 시공간과 같은 환경이나 구조, 정보와 같은 조건에 의해 한계가 있음에도 서로의 삶에 있어 영향력을 지닙니다. 그렇기에 양심은 무조건적인 행동 강박이 아니라 성찰의 과정을 그 배후에 가지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 드러나는 관용과 화해와 용서를 포함하는 도덕적 심리적 자산의 일부(중략)보다 깊은 심성과의 관계는 미묘하게 그의 수난의 체험들을 통해서 확실하여지는 것(p10)이며 양심은 윤리를, 윤리는 구조화된 절차인 법을 생성하고, 법은 인간의 정체와 실존과도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이야말로 법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고, 법은 사회와 생활에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 정체의 형성과 소통

 

 

 

청와대 국민청원이 등장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마다가 지닌 가치의 난입과 정보의 불분명함으로 야기되는 일도 있지만, 윤리적으로는 타당하나 법적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분쟁을 타인과 공유하여 논의하려는 건 '잃어버린 도덕에 관한 갈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소통이란 개인의 삶에서 찾은 안건을 공동체 내에서 적절히 다루는가에 있습니다. 사회는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어떠한 형식을 빌려서라도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발생할 여지가 있는 덕분입니다.

 

우리가 법의 의미를 삶의 본질 자체가 또는 적어도 지금 보이는 현상 그것이 도저히 도덕적 행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p54) 법이 어떻게 존재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법의 위치를 생각하는 것이다(p93)라고 하였을 때, 오늘날의 법은 통치와 피통치자의 권리를 생성하고 제한합니다. 이것은 국민이 주권자가 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이 대두된다. 이때 법은 국민이 국민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법적 제약을 받아들이는 사회 협약이 된다. 그러면서도, 법은 다수 의지를 초월하는 규범성을 갖는다.(p97)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은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동시에 제한합니다. 이때 이 법이 가하는 제한은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중략)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공정성, 정당성, 평등, 정의 등의 문제이다. 분명하게 정의될 수는 없으면서도, 이러한 주제들이 계속적으로 논의가 되어 마땅한, 그리하여 끊임없이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권리의 문제를 넘어서 경제적 평등 또는 분배의 문제로 연결된다(p100)고 하였듯이, 법과 양심에선 윤리적 행동의 정당성은 목적의 달성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 있고 행동의 연속이 사람 자체를 형성함을 밝히며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부도덕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정의를 위한 투쟁도 힘의 사용-부도덕한 수단-을 요구한다. 정의를 위한 투쟁은 쉽게 권력이 가져오는 특권의 유지를 위한 투쟁이 된다.

 

오늘날에 와서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서열이 아닌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은 사실에 있어서가 아니라 가능성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법과 양심법률인과 부도덕한 사회 에서

 

 

 

관념적인 혼동 그리고 그에 따르는 법적인 혼란의 문제를 떠나서도 사회적 도덕의 원천을 특정한 공동체-국가로서 정의되는 공동체에 한정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매우 왜곡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p229)

 

도덕적 선택은 사실성과의 투쟁을 포함한다. 이 투쟁의 상황은 거의 선택을 포기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선택의 포기까지도 하나의 선택이라고 말한다.(중략) 궁극적으로 칸트의 지상명령이 그러한 기준의 역할*1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행동의 검증의 기준이다. 그리고 이성의 명령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개인적인 삶의 구체적인 경로와 역사적 구체적 현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여러 형태로 구현된다.(p238)

 

삶의 일관성은, 그 많은 부분에서, 집단의 전통과 역사가 보여주는 서사의 일관성에 의존하여 획득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도덕적 일관성의 요청 또 거기에 따르는 그 나름의 이성적 반성을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현실적 어려움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부이다. 일관성은 경험적 차원에서의 이성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명제가 다른 명제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들은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총체를 이루지는 못한다.(p251)

 

일상적 차원에서 사람의 행동은, 추상적 개념이나 이상보다는 그때그때의 상황적 조건과의 대결에서 위험과 실패와 성공에 대한 고려에 따라 행해진다.(p251)

 

하나의 선택은 하나의 선을 선택하면서 다른 선의 가능성을 희생하는 것이다.(p261)

 

한 사람의 의식 속에 추리되고 검증되는 진리는 보편적 진리이면서, 역설적으로 그 보편성은 어떤 시점에서의 역사적인 제약 속에 존재하는 보편성이다.(p273)

 

정직성이란 자기 동일성을 말하니까 일관성의 유지를 말하고, 그것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일체성을 확인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모든 행동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운 것을 연습했는가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전래의 가르침, 윤리적 가르침에 충실했는가를 재 보려는 것입니다.*2(p312)

 

 

 

*1 도덕의 의무화 

*2 발전과 변화를 포함합니다. 溫故知新의 맥락에 있습니다.

 

    

 

이렇듯 법이 공동에게 있는 탁월함에 관한 가치에 기인하여 있고, 탁월함에 우위가 있다면 아름다움은 그렇지 못한 것에 비해 좋은 것이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라 정의되며 비교의 대상이 존재함으로 자기 정체와 가치를 양산함과 다름없을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이 되는 그것 없이는 그것일 수 없으므로 탁월함은 그렇지 못함에 의존하고 그렇지 못함은 그러함에 의존하여 서로를 정의합니다. 누군가의 시점에 있어서는 그러한 것도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그러할 수 있다는 건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낳습니다. 경험은 반응을 이끌어내 기준을 생성하며 그에 따른 선택지를 남깁니다. '그럼에도''그렇기에' 창조는 기존의 것, 인식할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생성되며 연상과 왜곡에 내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과 생각에 따른 행동이라 하는 현실이 녹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의 차별성을 부여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부터 원인을 상정하지만 위험에 관한 인식은 이성과 직관, 감정과 연관됩니다. 따라서 있었던 일을 다른 것으로 하는 것과 있어서 어떻게 살아가는 건 다르고, 개인이 원하는 서사와 실존한 역사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개인은 주어진 일대로의 여부를 떠나 자신의 서사를 역사로 현존하게 하려 할 때가 있으나 이것은 판단 혹은 창작에 한정됩니다. 그러면서도 서사는 역사를 나타내는 데 필요한 지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대로의 일이며 그대로에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생태, 행위, 식습관, 기능과 같은 차이에 의한 동물 각기의 행동 양식과 더불어 개별적인 존재로의 즉자와 대자를 오고 가며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은 그대로를 인식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에게 있는 가치, 이 책으로 이야기하자면 '양심'은 타협을 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하게 되는 동기에 속하지만 다른 이가 헤아리기 어려움으로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실존과 의미 사이에 있는 미묘함을 설명하기 위해 법과 양심에서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역할이나 소속과의 갈등에 관한 다양한 예시를 듭니다. 그중에서는 16세기 르네상스 시기 영국의 정치 철학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는데, 볼트가 쓴 연극에서 그는 양심에 따라 살겠다 하면서도 그에 맞지 않는 왕과 의회의 법인 즉, 결정에 따르려는 행동을 보입니다. 그의 연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인 자기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옳은 것, 또는 바른 것이 아니라 법이 허용하는 것, 허용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자신은 알뿐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옳고 바른 것은 물결처럼 변한다. 그러나 법의 세계는 "빽빽한 숲"과 같다. (중략) 법의 나무가 모두 베어져 없어지고 악마의 바람이 불어닥치면, 너는 어디에 숨을 것인가(p174)

 

    

현실은 해석이라 하는 인식의 바깥에 있으면서 인식 내부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하나의 뉘앙스를 보더라도 그것에서 올 수 있는 발전의 가능성이나 함의 점을 찾는 일, 어떠한 주장이 함축되거나 포함되지 못했다고 여기는 건 별개의 경험에 따른 연상 혹은 사실에 입각한 의견일 수 있고 개인의 해석이나 동일한 덕성을 두고 서로 다른 구체적 사건을 부여하여 성질을 제한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법은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행동이나 언어에 의하여서만,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 말하지 않는 것, 행하지 않는 것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p176)그러나 모어가 침묵으로 자신을 변호하였듯이 증상은 사유를 내포합니다. 원인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으로 하고자 하는 일, 무엇을 느끼고 그로부터 원하는 게 무엇인가에 가깝습니다. 좋지 못한 일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과 그로부터 좋은 부분을 바라보는 일에는 차이가 있듯이 걸맞음은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하거나 서로 다른 맥락의 이야기로부터 그것을 이끌어내려함으로 생성과 충돌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더 좋다고 여기는 일, 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하고 싶은 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개인이나 사회 통념상의 옳고 그름은 모든 상황을 내포할 수 있는지의 여부나 밝혀진 사실 외의 다른 것이 있을 가능성을 알 수 없고, '무엇에 관한 무엇'이란 어떠한 행위에 관한 시비를 가릴 때 실제로 더 옳은 일이 있는 덕분에 파생되지만 사실과 해석은 저마다의 합리성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정의에는 '무엇을 위한 정의인가'라는 물음이 뒤따르게 됩니다.

 

인간에 관한 사려가 아닌 명분의 표지로써의 옳음을 소유하려 할 때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사람은 이데올로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고통을 드러내 바라보는 것과 고통 속에서 가진 개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바라보는 것처럼, 시선은 태도와 방향성을 낳습니다. 미화는 기존의 것을 보다 아름답게 그려낸 것과 아름다움에만 시선을 두는 일, 그렇지 못한 것을 그러한 것으로 만드는 일, 어떠한 교훈을 주는 일이나 행동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체계화하여 이렇다면 이러한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는 일은 그것이 전혀 다른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고정불변의 무엇을 생성해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식은 생성과 탈락을 반복하며 현재로선 변화는 불변함에서 오고, 불변함은 변화로부터 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자타와 관련해 어느 것을 획일화하기에 조심스러우면서도 그렇게 하는 건 사회 문화 인식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을 향유하기에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법과 양심을 읽고 어느 한 가지만을 중점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개인과 사회가 가진 의미 속에 "인간은 존재의 사실적 조건과 스스로의 희망 또는 욕망 사이에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p188), 양심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수는 없다. 그러나 자유와 당위의 양극 사이에서 양심은 여러 형태를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다양한 전개 속에서 여러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p189)"고 하였듯이 법과 개인의 가치에 관한 인륜적 사고의 다양함을 개괄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덕분입니다. 그로 하여금 어떠한 결과를 위해 탈락하는 문장이 아닌, 서로 연계되어 있는 문장 사이에서 저자가 하지 않은 결론에 관한 걸 이야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감상을 쓰기에 조심스러운 면이 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