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마당 > 글쓰기마당 > 글나라북클럽

글나라북클럽

제목 장 폴 사르트르 - 자아의 초월성
글쓴이 조단비


 

자아의 초월성 /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지음,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옮김 / 민음사 출판

 

 

코기토(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부터 자아와 무에 이르기까지, 사르트르 현존주의에게 묻다.

 

 

 

자연과학의 도식은 고대 기하학과 측량법에서 시작되어 갈릴레이, 데카르트, 칸트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체계화 되었습니다. 학문은 역사와 진리처럼 현상에 관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며, 적용되는 사례를 밝히는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이에 '볼 수 있는 것, 보이는 것, 발견한 것이 모든 것인가'하는 물음과 함께 경험에 의해 지각되는 세계의 명징성은 예로부터 우리의 인식과 관련하여 수많은 결론을 도출하는 탐구 과제가 되었습니다.

 

대상 보다 대상의 부분적인 요소와 규칙성을 관념화하고 있는 사회에서 객관화된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을 찾으려는 방법론의 부각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으로부터 주머니 속의 못처럼 튀어나온 논점은 후설과 같이 '실존 내지는 현존하는 존재'에 관한 이념이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혹은 '무엇에 의해' 생각하는가를 떠올려 보았을 때, 우리는 사람에 관해 생각함으로 존재하는가, 존재함으로 생각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상화되는 존재 없이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대상에 관한 근본적인 사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앞에 놓인 사물은 우리가 무엇으로 사용하며 정의를 내림으로 무엇으로의 정체성을 지닙니다. 존재하는 것을 즉자, 정체가 부여되는 것을 대자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필통을 보고, 그것을 그것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 그것에 어떠한 의미를 담지 않는 한, 우리가 존재에 부여하는 의미를 제외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 무엇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현상에서 '무엇'인 것이, 초월된 '그대로의 시점'에서는 그저 '존재'하고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본질에 관한 탐구는 가치의 부여에 있고,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존재 자체는 생각이 아니라 '현존'해 있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이야기 합니다. 혼자서는 그 자체의 자신으로 그대로의 존재가 훼손되지 않지만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대자와 즉자처럼 때마다 다른 운동성(능동과 수동)이 생성되고 상호적인 가치의 교류가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고, 책임의 소재가 사람의 실재하는 행위에 있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서문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사르트르의 철학적 연구로 간주할 수 있는 최초의 저작물은 <자아의 초월성에 관한 논고>입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타자간의 갈등을 인식과 행위에 입각하여 개별적인 인간에서 합치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사상의 바탕을 담고 있습니다. 자아의 초월성은 도입,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 1부에서는 나와 자기를, 2부에서는 1부를 토대로 자아(Ego)의 구성을 이야기 하며 결론을 도출해냅니다.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함께하던 카뮈나 메를로-퐁티, 아롱과 다른 노선을 걷기도 하였으며, 홉스와 루소처럼 서로가 가진 사상에 따라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사회구조(미래지향)와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개인의 희생이 가진 부조리함(지금-여기)을 성토하다 끝내 결별에 이르기도 했지만, 목적을 위한 수단에서 차이를 보였으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식민주의와 냉전시대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르트르는 엄밀한 경위에서 부르주아로 태어났으나 물질적인 풍요와 인간의 가치와 이상,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대를 겪고, 노동자나 하위계층과의 연대를 통해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 비판등에서 언급하는 초월적 자유를 통해 그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핵심을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사르트르는 자아의 초월성이라는 스케치를 통해 시선의 투쟁이라는 현존을 불러들였고, 현상의 객관적 의미형성을 향한 주관성으로의 회귀로 우리가 기존의 과학 이론과 같이 지각 세계에서 도형을 인식할 때 형태와 감각을 분리하여 각기의 요소를 통합하거나 탈락시킴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 무엇이 실재이고, 주관인지에 관하여 무언가에 빠져들거나 얻음으로 형성되는 도피와 행각, 성취, 감정만이 아닌 이성이 가진 의존성, 타자와의 관계, 우연과 필연(원인-과정-결과라는 인과적 양상) 등에 관하여도 있을 수 있는 공동의 논점을 사유하게 합니다. 이중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실존에 있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현재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의 결과물이라면, 이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적응에 따른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가능성)에 불과할까요. 여기 이 자리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수많은 질문들 앞에 사르트르는 인간존재는 인간에 의해 용도가 정해진 채 만들어진 물건과 달리 어떠한 목적과 의미 없이 생에 우연히 내던져진 것이므로, 생의 의미와 목적은 인간 스스로 창조해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 방식에 필연적인 책임과 불안을 지닙니다. 무한한 자유와 함께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인 까닭입니다. 더불어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만 실존은 존재에 의존하여 변화합니다. , 실존은 무한한 자유에 놓여있으면서도 존재에 의존하여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선택은 보편적 총체성안에 수렴됩니다. 그렇다면 개인으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총체성 내에 수렴되는 과정을 개념화 한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자아의 초월성은 존재와 무에 이르러 사르트르의 사상의 기초가 되는 전반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나와 자기

 

나의 자아는 타인의 자아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바깥이자, 세계 안에 있다.”

 

의식은 지향성(intentionnalité)에 의해 정의된다. 지향성을 통해 의식은 자신을 스스로 초월하고, 스스로 벗어나면서 스스로 통일한다.(p32), 하나의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의식 전체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고유한 속성은 나와의 관계가 어떠하든 간에 의식 자체에 속한다.(p33) 모든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toute conscience est de conscience de quelque chose).(p41)

 

 

사르트르의 반성적 의식대상에 대한 의식으로 자기의식이 되기에, 자신을 대상으로 회상과 의심을 하는 초월적인 의식입니다. 비반성된 의식은 기억이고, 자신에게 있던 기존의 의식(경험)에 대한 반성 작용(회고)에서 비로소 (Je)’가 등장하며 나는 스스로 초월하고 벗어나며 통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상학적 사유에서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고, 나와 그 밖의 타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의식은 책을 읽거나 시계를 보고 초상화 감상에 몰입할 때와 같은 비인격적 자발성을 내포합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관한 감상을 할 때 대상에 대한 의식은 있고, ‘는 없습니다. 이렇듯 사실적 차원에서의 의식은 표상에 관한 존재 의식과 같은데, 내외적인 운동성(능동과 수동)을 수반합니다. 반성된 것은 이러한 의식으로부터 정립된 것입니다. 비반성된 것은 존재하기 위해 반성됨이 필요치 않지만, 반성됨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비반성된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에게 있어 비반성된 의식은 반성된 의식 위에 선행하며 총체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고려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비반성된 욕망의 성질이, 대상을 욕망할 만한 성질들로 파악하면서 그 스스로를 초월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할 뿐이다.(중략) 반성의 경우, 즉 오직 이 경우에만 정서는 그 자신을 욕망, 공포 등으로 정립한다.(생략) 자아의 삶(vie égoïste)이 위치하는 곳은 이 반성의 층위이며, 비인격적 삶이 위치하는 곳은 비반성된 층위이다.(물론 이것은 모든 반성적 삶이 이기적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비반성된 삶이 반드시 이타적이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p65)

, 그것은 행위들의 통일성으로서의 자아이다. 자기, 그것은 상태들의 그리고 성질들의 통일성으로서의 자아이다. 이 하나의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들 사이에 사람들이 설정하는 구분은 문법적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단지 기능적인 것으로 나타난다.(p68)

 

 

2 자아의 구성

 

자아는 반성된 의식들의 직접적인 통일이 아니다. 이 의식들에는 내재적통일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통일로 그 자신을 구성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그리고 상태들, 행위들이라는 초월적통일이 존재한다. 자아는 상태들 및 행위들의 통일이며, 필요하다면 성질들의 통일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는 이러한 초월적 통일들의 통일이며 그 자체 초월적인 것이다. 그것은 비반성된 태도의 대상-(pole-objet)으로, 종합적 통일의 초월적 극이다. 이 극은 오직 반성의 세계 안에서 출현할 뿐이다.(p69)

 

상태는 반성적인 의식 이전에 현존하여 반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감정과 행위를 의미합니다. 반성은 사실과 권리에 제한적입니다. 나의 대타존재그것으로 있었던 것으로서, 내가 그것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대타존재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없을 것이다(p72 존재와 무에 관한 주석, 678~679 발췌) 에 의하면 내가 무언가로부터 무엇이라는 감정을 느꼈을 때, 다른 무엇으로 바꾸고자 할 때, 오히려 타자의 존재와 사실을 승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표현력이 풍부한 몸짓은 전달하는 의미와 그것이 스며드는 질료(표정, , 신체) 사이에서, 마술적인 의미로, 사로잡힘(possession)의 관계를 은폐할 수 있다. “모방자는 사로잡힌 자이다.(Un imitateur est un possédé.)”(p101 상상계에 관한 주석 45)라는 언급에서 반성이 가지는 환원적 요소를 돌아본다면,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감정은 경험과 동시에 출현하거나 체험을 통해 그 자신을 형성하며 일시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으로 나뉘어, 순간은 반성적 의식에 명징함을 부여하지만, 지속성에 있어서는 의식하지 않고도 존재하기에 불확실함으로 실재하면서도 초월적인 대상이 됩니다. 반성이 인식 밖의 것을 단언할 때 있을 수 있는 오류는 감정의 착각착각이라는 결과를 위한 상징적 체험이나 해석을 가정하며, 성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 그러니까 자기기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발적 의심의 과정인가, 기획에 관한 문제인가 하는 모호함에 속합니다. 이처럼 사르트르에게 있어 감정은 충동이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위해 무화하고자 하는 세계 앞에 의식이 행하는 상태로 파악되는 것입니다.

 

위의 전개에서 사물들 안에서 취해진 행위와 심리적인 행위는 모두 초월적인 것에 속합니다. 시간 내에서 행위는 순간이고, 반성은 하나의 직관 내에 순간의 총체인 의식들을 통일합니다. 성질은 상태로 구현되고, 그것이 없을 때에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태들의 임의적 통일로서의 성질들이 필수적인가 하면, 사르트르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결여가 미완결, 유예, 잠재성 따위의 형태로 사물에 찾아오는 것은 인간존재에 의해서이다(p84 존재와 무에 관한 주석, 345 발췌)에 따르면 초승달을 보고 보름달이 될 것이라고 말할 때, 보름달이 초승달의 잠재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즉자존재(en-soi)에 관한 대자존재(pour-soi)인간의 선택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상태들과 행위들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통일을 자아에서 직접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나무, 이 탁자는 종합적 복합체들이며 각각의 성질은 다른 성질들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각 성질은 같은 대상 X에 속하는 한에서만다른 성질과 결합되어 있다.(p88) 성질은 분리되지 않으며 총체성과 관련지을 때만 그것의 모든 의미들을 획득한다.(p89) 성질들은 자기를 규정하는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어떤 것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p95)

 

자아는 자신의 내밀함으로 반성적 층위로도 자신을 파악할 수 없게 도주하고, 자체의 내부성에 의해 타인의 의식을 파악할 수 없게 합니다. 자아의 내부성은 스스로를 알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취하지만(타자의 눈을 빌린 객체화) 필연적으로 거짓된 관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속합니다.

 

 

나는 생각한다의 지평에서 나타나는 나는 의식의 자발성의 생산자로 주어지지 않는다. 의식은 나에 맞서 출현하고, 그 이후 나에게로 향하며, 나와 다시 합류할 것이다.(p116)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대상들에 대한 의식이자 전부이며, 의식은 자기 원인으로 영향을 받지 않지만, 자아는 반성이라는 활동을 통해 자신이 생산한 것에 관한 반동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최종적으로 의식의 소유주가 아닌 대상으로서 체험에 관한 생성(자기는 세계와 동시적이다)으로 옮겨가며 그 자신의 초월성에 대한 존재이유가 됩니다.

 

 

 

자아의 초월성에서 사르트르는 불확실함과 어려움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꺼내 보임으로 이론의 방향을 구축하고 유아론과 선험론을 타파하기 위한 활동을 개진해왔습니다. 자아의 초월성은 철학적 논의를 위한 초기 스케치라는 점도 있겠지만, 내용에 앞서 전제되는 사상의 이해를 필요로 하였고, 착안된 부분이 서로 면밀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결론에 이르기까지 난해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습니다. 현대 실존주의의 한 인물로 그려지는 사르트르의 사상은 우리에게 인간은 신의 '지적 디자인(intellectual design)'을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미래로 투기(投企)하면서 스스로를 창조해나가는 존재”(출처존재의 우연성)라는 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예술가와 사상가들의 모티브(motive)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상태는 자기 안에 있었던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저는 자아의 초월성을 바라보며 어떠한 결과로 알고 있던 것은 정말로 아는 것에 속하는가를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자유에 따른 나의 실존적 불안과 책임을 떠넘길 존재로 다른 존재를 상정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나와 내게 영향을 받는 타인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는 결론과 동시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점까지도 짚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유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 유아론 : 실재하는 것은 자아뿐이고 다른 모든 것은 자아의 관념이거나 현상에 지나지 아니한다는 입장.

* 선험론 : 경험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전제나 조건, 가능성, 인식.

 

사르트르의 말대로 텅 비어 있는 내면에 대한 공허한 자기 성찰이 불필요한지에 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실천적인 차원에서의 책임의 주체로서 훗날 타자는 나의 지옥이다’,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의 공존으로 시선에 따른 존재의 함의를 찾는 일은, 자아의 초월성에서와 같이 의식은 나의 의식이 아니다구체적인 자기의식이다를 논하는 일처럼, 서로 다른 양쪽 면의 구심점을 체계화 하는 일에 속해있지는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