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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청] [북클럽3기신청] 라이팅 클럽 - 강영숙
글쓴이 노문희


습관처럼 책을 읽고 그 기록을 남긴다. 단순한 내용 정리가 되기도 하고 너무 와 닿아서 내 감정과 이야기가 많이 섞이기도 한다. 책을 읽어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박한 바람은 점점 커졌다. 그저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다짐은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바람으로 남았다.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책을 읽었다고 누가 후기를 남기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그런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잘 쓴 글에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그대로 잘 표현되면 기분도 좋다. 어쩌면 책을 읽고 그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잘 표현되었는지 하는 만족의 문제인 듯하다. 이 소설의 모녀, 계동의 글쓰기 모임의 사람들, 해컨색의 라이팅 클럽 사람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책을 쓰느냐 아니냐,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앞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영인의 엄마 '김 작가'는 작가 지망생이면서 동네 글쓰기 교실을 운영한다. 좀 거창하게 들리는 글쓰기 교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딸 영인이 보기에 그냥 동네 수다방이다. 그런데도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세상 진지하다. 영인이라는 이름보다 화자인 ''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계동의 이 글쓰기 교실에서 태어난 글들을 쓰레기로 여겼다. 기껏해야 남편과 아이들 이야기에 일상을 푸념하는 글로 채워진 문장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모임의 대표 격인 김 작가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영인은 또래 아이들보다 좀 더 빨리 자란다. 김 작가는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엄마의 모습이 없는 엄마였기에 영인은 그에 대한 분노로 글쓰기에 치열해진다. 어린 나이부터 책을 손에 들고 뭔가 그럴싸하게 보일 이미지를 만들며, 정말 필요한 문장을 찾으려 계속 읽고 쓴다. 점점 그녀의 글쓰기는 분노의 쏟아냄은 물론이고 자기 삶에 화해하는 글쓰기에 이른다. 이는 그녀의 오랜 세월이 만든, 어찌 보면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생을 거쳐 온 그녀만의 재산이 되는 과정 같다. 만년 작가 지망생인 엄마에게 대항하고자 진짜 작가가 되겠다며 열심히 써댄 그녀 노력의 결과 말이다. 이렇게 쓰는데, 안 써지면 안 되는 거지.

 

생각해 보면 나는 김 작가와 떨어져 살았던 어린 시절에도 쓰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혼자 놀기 위한 대본이 필요했던 것 같다.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등장인물, 혼자만의 날씨, 그래서, 그런데, 그랬거든, 그건 아니고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했었다. 이야기만이 시간을 이길 수 있었다. (257~258페이지)

 

참 특이한 소설이다. 처음에는 저렇게 자식을 방치하는 엄마가 있을까 싶다가도, 누군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은 엄마의 갈증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상과 본인의 미래가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현재의 자기 삶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걸까. 보통의 삶이라고 하기 어려운 김 작가의 현실은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더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바랐을 글 쓰는 삶을 계동의 평범한 주부들과 이루어가는 모습이 흥미롭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쓰자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생각만 하지 말고 일단 쓰라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글을 쓰는 여성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저마다 옆구리에 노트 한 권 끼고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그려본다. 남편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꾸리는 일상을 운명처럼 여긴 그녀들의 오늘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김 작가와 대조적이면서도 비슷하게 흐르는 영인의 인생은 또 어떠한가. 글쓰기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 이 모녀는 각자의 삶에 치열하다. 문인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뭔가를 쓰는 김 작가, 아무 배경도 없고 부모의 사랑도 없이 세상에 소리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하는 영인. 처음에는 읽는 것으로 가슴을 채우고 계속 쓰면서 분노를 잠재웠다면 점점 글쓰기의 욕심은 진짜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거였다. 결국, 이 소설은 영인의 글쓰기 성장 과정이었다. 영인이 작가가 되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글쓰기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보는 것들, 그런 영인의 시선을 우리가 따라가면서 같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혹시 글쓰기는 경험으로 채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경험한 게 많은 사람이 쓰고 싶은 게 많은 거로 여겼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하게 보고 겪는 사람이 아는 것도 많은 거 아니겠나. 보이는 게 많을수록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거로 생각한다. 그러니 영인의 경험은 쓸 수 있는 게 아주 많은 거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성장이 글쓰기의 길을 열어준다. 동성애를 겪고, 외모와 환경에 주눅 들고, 무작정 고백하는 짝사랑에 거절당하는 게 쉬운 인생일 수 없다. 성인이 되었다고 그녀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친구의 죽음이나 사회생활, 이상하게 시작된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내면의 경험까지 꽉꽉 채워간다. 영인은 그 모든 순간에 글을 썼다. 그녀가 처음부터 글쓰기의 의미를 찾았던 건 아니다. 삶이 혹독해질수록 글쓰기는 치열해졌고, 그렇게 자기와의 싸움처럼 이어진 글쓰기가 습관처럼, 당연한 일상처럼 된다. 이제는 무엇을 쓰는가 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 그 자체에 삶의 의미가 생긴 거다. 그렇다고 그녀가 글쓰기의 의미를 모른 채 아무거나 쓰지는 않는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작가 J의 가르침대로 묘사를 위한 관찰을 습득한다. 사람과 사물의 모습, 표정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다듬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동안에는 관심 없고 몰랐던, 무시하기까지 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엄마인 김 작가의 인생에도 관심이 생긴다. 자기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무엇이든 써왔던 엄마,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로만 보였던 계동 글쓰기 교실 사람들의 이야기가 글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였다. 그들이 글을 쓰는 목표가 등단이나 출판이 아니라, 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문장에 담긴 삶을 보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보통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게 전부일지 모른다. 그냥 쓰고, 그냥 읽고, 소박한 서로의 문장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글쓰기의 즐거움,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216페이지)

 

"학생은 왜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해?"

J 작가가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보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내가 J 작가에게 되물었다.

"그래, 재미있어서 그래. 재미라는 게 뭘까. 아마 사람들이 소설을 재미있어하는 건 사람들 사는 모습이랑 소설이 제일 비슷하기 때문일 거야. 안 그래?"

"네 맞아요."

생각을 안 해 봐도 J 작가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101페이지)

 

이쯤 되니 독자인 나는 소설을 왜 읽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쓰는 존재 이전에 읽는 존재였던 영인처럼, 나도 소설을 즐긴다. 그 이야기 속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허구의 세상에서 틈새로 끼어든 현실의 한 자락을 마주할 때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에서는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한다.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 고통을 마주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을 온갖 세상, 많은 사람의 삶, 세상 구석구석의 감정을 읽는다. 혹자는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발전을 하겠느냐고, 뭐가 변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소설이 없다면 우리는 또 어디서 세상의 다른 시선을 보고 누군가의 인생에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경험하고 가끔은 너무 알 것 같아서 우울한 기억을 꺼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또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쓰기 위해 모이고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읽기 위한 의미를 계속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