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마당 > 글쓰기마당 > 글나라북클럽

글나라북클럽

제목 (신청)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글쓴이 나난희

봄순씨가 사는 동네엔 긴 겨울이면 장사꾼이 찾아온다. 작은 트럭에 동그란 밥상, 일바지, 버선, 양말, 신발, 냄비, 이불 등등 온갖 생활용품을 가지고 온 장사꾼은 하루 종일 여자 노인당에 모여 물건을 판다. 장사하는 아주머니는 간식거리를 사 오며 물건을 광고한다. 할머니들은 이 아주머니의 물건이 싸고 품질이 좋다며 산다. 봄순씨는 겨울에 오는 이 아주머니가 노인당에서 혼자 자는 게 안쓰러워 당신 집에 아주머니를 데려가 함께 저녁을 먹고 잠을 잔다. 봄순씨 말을 들은 나는 노발대발한다. '그 아주머니가 나쁜 맘이라도 갖고 있으면 어쩌려고 모르는 사람을 잠까지 재우냐고' '너는 뭔 세상을 그리 험히 보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리 험한 사람 얼마 없다.' 사적 공간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기준이 다를 수 있다. 나는 봄순씨의 절대적 환대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김현경의 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환대에 대한 이야기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대다. 환대는 사람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람 사이의 일이니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사람 행세를 하고 사람대접을 받는데 물질적인 조건들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p.26

유전자가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태아, 노예, 사형수, 군인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의 수행은 사람을 연기한다는 의미와 사람을 존재하게 한다는 의미를 둘 다 갖는다.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p.83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대접을 받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람다움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사람답게 연기해야 하고 그 연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상호작용 질서는 인정투쟁 속에서 불안정하게 재생산되는 역사적 구성물이며, 무시와 모욕은 구성물에 내밀한 균열을 그것의 현재안에 있는 다른 시간들을 나타낸다.p.107

무시와 모욕을 당하면 정말 균열이 일어난다. 무시와 모욕은 현재이지만 나는 통째로 나의 지난 시간이 무시되었다고 느낀다. 현재안에 있는 다른 시간은 이런 의미다. 무시와 모욕은 하지 말자. 내가 타인의 행동을 비난할 순 있지만 남의 지난 삶을 무시하는 어마어마하게 못된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p.197

가장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다. 주는 힘을 주는 거라니,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니. 내가 도움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건 타인의 환대를 통해 가능하다. 사다리를 치우지 않고 사다리를 꽉 붙잡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개인의 친절에 기대지 않고 사회 시스템으로 정착된다면 받은 사람이 받았다는 자괴감 들지 않고, 주는 사람이 뻐기지 않는 환대가 된다.

절대적 환대는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이다.p.208

저자는 절대적 환대 없이 사회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론적으로 저자의 말은 옳다. 하지만 신원을 묻지 않은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는 지속까진 모르겠지만 얼마간의 시간 동안 가능은 할 수 있다. 넓은 마음을 갖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라니. 이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가. 저자는 환대를 사적인 공간의 개방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적대가 불법적 행동의 용인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말한다.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죄에 대한 처벌이지 사람에 대한 처벌은 아니란 것이다.

김현경의 책은 사람에 대해, 사람이 갖는 장소에 대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환대의 필요성과 유용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와 내 가족과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한다. 학술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는 중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수준이 있는 책이지만 읽기 어려워 던질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충분히 도전 가능한 책이고 읽을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