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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라북클럽

제목 책의 엔딩 크레딧
글쓴이 노문희


어쩌다 보니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다 보니 습관처럼 계속 읽게 되더라. 누군가는 어렸을 적부터 책을 손에 들었다고 하던데, 나는 서른이 다 되어가는 때 읽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우연히 손에 잡힌 책 한 권 읽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졌다.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우리 집에는 제대로 된 책장도 없었고, 누가 책 읽기를 즐긴 적도 없어서 집에 책이 있던 것 자체가 신기하다. 어쨌든, 그렇게 책과 나는 이렇게까지 이어져 온 인연이 되었는데, 막상 책을 대하면서 궁금했던 것은 해결되지 않았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나만 궁금했던 건 아니지?

 

책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가장 먼저 글을 써야 하는 작가도 궁금했나 보다. ^^ 어느 날 작가는 편집자와 대화하다가 깨달았다고 한다. 자기가 쓰고 세상에 나오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랐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3년여의 세월을 취재하면서 이 소설을 완성해냈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또 놀라고 만다. 며칠 인쇄소 견학하고 담당자 취재하면 다 아는 거 아니었어?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단 며칠 만에 책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다 알 수도 없고, 결코 쉽게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소설의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인쇄소에 입사한다. 나름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테다. 출판사 편집 담당자를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책 제작 일정을 의논한다. 출판사에서 건네받은 자료로 제작 공정의 모든 과정을 담당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 상황에 부딪힌다. 내 맘 같지 않게 흘러가는 일을 몸으로 경험한다. 편집부에서 요구하는 방향과 인쇄 현장의 작업이 같지 않은 것은 비일비재하다. 내 작품을 내놓는 데 애정을 쏟는 건 당연한데 작가와 디자이너의 일방적인 무리한 요구에 좌절하기 일쑤. 무엇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고민도 많아진다. 책이라는 대상이, 책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작업 환경이 사양 산업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가고, 꼭 종이책이 아니어도 되는 전자책이 활발하게 보급되고 있으니, 처음 책을 대하던 마음과는 별개로 생계를 생각하면 암울한 게 이 시장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책을 향한 애정을 놓지 않는 주인공이다. 상사와 동료에게 핀잔을 들어도, 수시로 변경되는 작업 상황에 당황하더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분야라고 해도, 여전히 그의 마음속 책은 처음과 같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하게 책의 정의에 이르게 된다. ‘책은 필수품이라고 말이다.

 

읽다가 문득 작은 방 하나를 채운 책장을 둘러봤다. 줄이고 줄였는데도 여전히 벽 한 면을 차지하는 책장에 꽂힌 책들, 그걸로도 부족해서 바닥 여기저기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 한숨부터 쉬어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선뜻 정리하고 버리지 못하겠다. 방문을 열면 훅 끼치는 책 냄새, 한여름의 장마 때는 꿉꿉한 냄새까지 피어오른다. 추워서가 아니라 책 때문에 집안의 난방을 켠 적도 여러 번이다. 환기가 중요한 것 같아서 책이 있는 방의 창문을 일부러 조금 열어두고 지낸다. 한번 읽고 꽂아두기만 했지,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을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 판권을 표시하는 부분을 한번 휙 훑어보는 정도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다. 작가가 글을 쓰면 출판사에서 그 글을 받아 교정하거나 다른 부분 확인하고 인쇄소에 넘기겠지. 인쇄소에서는 그 파일 그대로 기계 설정하고 책으로 만들어내면 끝. 이렇게 말하고 보니 참 단순해 보이는데, 이 소설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단순함의 디테일을 보여주었다.

 

작가, 출판사 담당자, 인쇄소. 크게 보면 책을 완성하는 구성은 이 정도일 텐데, 나는 단순해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각자의 영역, 역할이 분명 있지만, 책을 대하는 자세나 책의 완성을 향한 마음은 구분이 없었다. 누군가 책을 만드는 것을 보고 출산과 비교하던데, 딱 그거 아닐까. 애정을 담고 아껴주고 쓰다듬으면서, 별일 없이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는 일.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랬다. 모두가 고생해서 만들고 있지만, 특히 인쇄소 베테랑들의 자세를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하고 정확하게 잉크를 배합한다고 해도, 사람 손이 하는 정교함은 따라올 수 없을 듯하다. 오랜 시간 같이 일해온 기계를 동료 대하듯 하는 것만 봐도 일하는 자세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책의 엔딩 크레딧에 기록되어야 할, 단순히 인쇄소의 이름만 적힌 것을 보면서도 느끼게 된다. 그 인쇄소의 이름에 수많은 사람과 가족의 이름이 담겨 있다고, 이 책이 그들의 노력과 애정으로 만들어졌다고, 바로 책의 뒤편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을 이제는 안다고 말이다. 책 제목 그대로, 책의 엔딩 크레딧에 올려질 이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겼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에 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앞으로 책은 어떻게 우리 곁에 남을 것인지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책에서 찾으려던 정보는 검색 하나로 간단하게 해결되기도 한다. 이미 들어왔지만, 책을 읽는 사람이 줄었다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어떤 수치로 보고 듣지만, 실감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은근 느끼는 건 나부터도 책을 사거나 읽는 게 줄었다는 거다. 작년과 올해가 다르다.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진 것도 있고, 책을 앞에 두고도 집중해서 읽는 게 점점 어렵다. 굳이 종이책이 아니어도 디지털 시대에 이제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전자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곤 한다. 자려고 누워서 잠깐 읽거나, 밖에서 자투리 시간에 읽거나. 휴대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읽을 수단이 있는데, 굳이 종이책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종이책의 매력과 만족감은 분명 다르다.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책의 내용, 손으로 만져지는 촉감, 이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만족감 등 종이책을 갖고 싶은 이유는 다양하다. 그 다양함 속에서 책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인쇄기는 활기차게 움직이며 오늘도 새로운 책을 세상에 내보낸다. 책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스러져 갈 것이다. (477페이지)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책 제작은 계속될 것이다. 우라모토의 눈앞에서 확실하게 계속되고 있다.

완성을 기다리는 책이 끊이지 않는 한 책이 없어진다는 공포에 떨고 있을 틈이 없다. 스스로 선택한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앞으로도 책을 만들어갈 것이다. (478페이지)

 

주인공과 인쇄소 사람들은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책이 필수품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피난처에서도 책의 공급을 반가워했다는 말에 괜히 울컥해지기도 했다. 코로나 상황에 책의 판매량이 늘었다는 말도 들었다. 본의 아니게 감금(?)당하다시피 생활하다 보니, 굳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심심하거나 무료해서 책을 구매했다고 하더라도, 책은 아직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이하는 대상이다. 그러니 책을 쓰는 사람도, 그 책을 발견해서 출판으로 이으려는 사람도, 세상에 내놓으려 열심히 인쇄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우리 곁에 존재해야 한다. 책을 중심으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프로의 자부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책을 읽는다고 우리 삶이 갑자기 바뀌지 않겠지만, 우리가 책으로 얻는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안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의 여행이든, 타인과의 소통이든, 지식이든, 무언가는 각자 다르겠지. 상관없다. 각자의 가슴에서 원하는 책을 만날 수 있다면야, 그 어떤 책이든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니까 말이다.

 

책과 사람은 일대일로 만난다.

독자는 설사 재미없네하며 던져 버리는 책에서도 뭔가를 건진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 인생을 바꿔 놓기도 한다.

책은 그런 것이다. (62페이지)

 

잉크 냄새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책이다. 책이 더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