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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올가 토카르추크 - 방랑자들
작성자 조단비 작성일 2019-12-18
작성일 2019-12-18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 최성은 옮김 / 민음사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당히 명석한 질문이 제공되면 알아서 이해할 거라고 조용히 단정 짓는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에게 대답한다. 그러고는 지금껏 아무것도 몰랐던 비밀을 자신에게 털어놓는다. 둘째 가설은 더욱 치명적이다. 우리는 한결같으며 우리의 반응은 전부 예측 가능하다는 가설 말이다.

p30




서로 다른 100개의 에피소드가 만나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방랑자들》은 각자의 섬과 섬이 맞닿는 지점을 관조(觀照) 하는 입장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경계'란 작가의 다른 책 《태고의 시간》을 포함하여 나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관한 실존적인 고찰을 담은 메타포의 총체이다. 방랑자들에서 등장인물들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자신을 규명하며 각자의 자리에 도달하기 위한 열망을 품고 있다. 이곳에서 여행은 생애에 해당되며 의미를 파괴하며 의미로의 형식을 추구하는 방랑이자 순례하는 이를 목표로 삼은 순례의 길, 또는 서로의 삶에 방문하는 이방인으로써의 소통 내지는 소통을 향한 단절과 같다. 절단된 다리에게 보내는 편지, 버려진 아파트, 선면구체, 인간의 손이 아닌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대지의 젖꼭지 등의 파편에서 나오는 인지처럼 작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여행에서 수집가가 전리품으로 진열해놓은 물건들, 시체, 진귀하거나 괴이한 형상은 에피소드에 따라 변화하면서도 일관된 규칙성이 있다. 수집가의 새로움은 기존에 있던 육체처럼 지배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현현하는 물리적인 소재에 관한 탐미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세상을 보이지 않는 감시자에 의해 돌아가는 파놉티콘과도 같이 만든다. 시공간과 상관없이 쓰인 연대의 배치와 그 유사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원시시대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형성된 문명의 발전은 어쩌면 형식만이 예측 불가능하게 변형되어 내려오는 원형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메타포(Metaphor) :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법이자 은유 또는 상징.

(제목은 방랑자들이지만, 인생 중에서도 경계에 관한 여행과 방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경계를 책의 중심으로 꼽았습니다.)

* 파놉티콘(Panopticon) : 죄수를 감시할 목적으로 1791년 법철학자인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설계한 원형의 감옥으로, 자신이 감시를 받고 있다고 여긴 죄수들이 간수 없이 스스로를 감시하여 내면화한 사회화의 체계를 상징하는 팬옵티시즘(Panopticism)을 파생했다.



1. 씨줄과 날줄로 '만들어진' 실존에 관한 서사




'작가'라는 말은 내게 너무 진지하고 심상찮은 단어였다. 인생은 늘 나를 비껴가곤 했다. 나는 그저 그 흔적을, 남겨진 허물만을 찾아낼 뿐이었다. 간신히 위치를 파악했나 싶으면 생은 벌써 저만치 멀리 달아나 있었다. 내가 발견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누군가가 다녀간 뒤, 공원의 나무줄기에 새겨 놓은 "나 여기 왔었다."라는 글귀뿐이었다.

26p

내 신드롬의 명칭은 '재발성 해독 증후군'이다. 이 용어를 있는 그대로 직역해서 요약하자면, 어떤 이미지를 향해 끊임없이 돌아가려는 의식의 작용,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인 추구를 의미한다. 이는 '잔인한 세계 증후군'의 변종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발표된 신경 심리학 연구 논문들에서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중략) 내 감수성은 기형학(畸形學)이나 괴짜를 향하고 있다. 나는 이런 기형의 상태 속에서 존재가 참모습을 드러내고 본성을 나타낸다는 고통스럽고도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아이쿠." 소리, 완벽하게 주름 잡힌 스커트 아래로 삐져나온 속치마 솔기. 벨벳 의자 덮개 밑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낸 흉측한 금속 받침대, 부드러움에 대한 환상을 뻔뻔하게 깨뜨린,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스프링 하나.

p33




실존의 의미는 대게 두 가지의 형태를 띤다. 운명(運命)과 같이 초월적인 존재에 의하여 탄생하는 선천적인 것과 본질이 규정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자기 존재를 선택하는 후천적인 것. 관계로부터 생성되는 존재로의 역할을 자신의 고유성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인간의 실존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단일적 차원의 실존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본질에 관한 상실은 결핍된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저마다의 방향성을 갖는다. 《방랑자들》에서 이야기하는 여행이 도달할 곳을 향한 방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도입부에서의 서술과 같이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가치와 열병에 의한 신드롬을 앓고 있다. 그렇기에 책의 시작은 모든 책 내용의 마침표이고, 서로 다른 모순처럼 보이는 일들은 개인의 욕망에서 튀어나온 움직임이자 일관성을 의미한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각기의 사람과 사물로부터 동식물을 개괄하는 이미지의 윤곽을 그림으로 본질에 닿고자 하는 인간 공동의 서사를 이끌어냈다. 그가 포착해낸 것은 여행길에 올라 뜨개질을 하면서도 정주하여 방적하고 있는 순간이다.

여행지에서 떨어진 아내와 자식을 찾아 헤매는 쿠니츠키, 흑인인 아버지를 황실의 호기심의 방에 박제한 황제에게 항의의 편지를 쓰는 딸 요제피네 졸리만, 다리 한 짝이 절단된 해부학자 필립 페르헤이언을 포함한 다양한 학자들, 대양과 관련된 이들, 아픈 아들과 남편을 돌보아야 하는 가정으로부터 도망친 여인과 날뛰는 여인, 탐험가 쿡과 여행사를 차린 쿡(Cook), 첫사랑의 요청을 받고 그를 안락사하기 위하여 방문한 여인 등이 이루는 에피소드는 수많은 시간의 결합을 통해 삽화에 그려진 지도처럼 세상을 비추는데, 이전의 에피소드가 이후의 에피소드를 짐작할 수 있는 장치가 되면서도 아무렇게나 펼쳐 들어 읽을 수 있고 때로는 여러 번 되새김질하여야 느낄 수 있는 문장으로부터 나의 것이 분리되고 또한 통합되는 향수와 환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보는 만큼 안다'는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자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각 또한 알 수 있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통하여 바라볼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상실과 죽음, 추모가 일상화된 존재에 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2.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




공항을 지으면서 살아 있는 생명체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이곳에서 재난이 일어나지 말라는 뜻에서.

p102

개들은 무더위에도 사슬에 묶여 있어요. 간절히 물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강아지들은 어찌나 꽁꽁 묶어 놨는지 두 달이나 지났는데도 걷지를 못해요. 어미 양들은 한겨울에 눈 속에서 출산을 하죠. 농부들이 하는 일이라곤 트럭을 몰고 와서 새끼 양들을 실어 가는 것뿐이에요. 레스토랑 수족관에서는 로브스터를 키웁니다. 손님이 손가락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순간 끓는 물에 집어넣어 죽이기 위해서 말이죠.(중략) '악행에 관한 리포트' (중략) 진정한 신은 동물이에요. 신은 동물 속에 있죠.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에요.

p106

그녀가 몇 번이나 역사적 사실을 혼동했음에도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것을 보면 여행객들 또한 그녀의 이야기에 딱히 열중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p166

그가 유리 인간의 신체를 바라볼 때마다 주목할 가치가 있는 부위가 강조되어 드러났고, 반대로 현시점에서 별 의미 없는 것들은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p207

저기 바깥에도 있어요. 사방에 존재하죠. 고약한 건, 그게 대체 뭔지,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p344

여행 심리학에서는, 두 장소의 유사성에 대한 인지도는 두 장소의 거리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서로 가까울수록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고, 낯설게 여긴다는 것이다.

p540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Stranger on a train phenomenon)은 비밀이 샐 염려가 없으며 말의 결과가 영향을 주지 않을 낯선 상대에게 자신을 털어놓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관한 설명이 본문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비행장에서 만난 인물과의 대화뿐 아니라 등장인물끼리의 마찰은 내게 있어 '이방인 현상'처럼 자신만이 아닌 가까운 거리에 놓여있는 이에게 낯선 느낌을 받으며 단편적인 몸짓으로 자신을 털어놓으려는 행위처럼 보였다. 여행 심리학자들이 제시한 여행의 궁극적인 단계는 죽음에 관하여 끈질기게 묻던 내가 3년 전 토해놓은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맥락이 닿아 있었는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불확실한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 혹은 타인의 무언가를 뱉어내며 정서적인 치유와 가치를 얻으려 할수록 어딘가의 정지된 불협화음이 들려오고, 소실된 하모니와의 융합을 되찾기 위한 행동이 그것의 파괴를 부르는 건 아닐까 하였던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텍스트에 온전히 담기가 어려움과 같이. 이를테면 블라우 박사는 젊은 여학생들과의 하룻밤을 유도하며 질에 관한 사진을 수집했고, 모든 인간의 몸을 보존하여 인체의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과 공유함을 통해 불멸함을 남기고자 하였지만 자신 보다 늙은 여자에게 있어 그 대상이 자신이 되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안전하기 위하여 원하는 이미지의 형상화를 실제에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노화가 진행될수록 블라우 박사는 시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여학생들이 가진 젊음에의 생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노화를 막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죽음과 달리 육신은 명확하게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비밀을 공유함으로 친숙함을 느끼고자 하지만, 비밀은 친숙한 대상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구간에 있다. 여행에서의 만남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건 순례자가 순례자와의 거리를 좁힐수록, 또는 넓힐수록 볼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춤을 추는 여인에게 다가가 춤을 추는 사람과 눈물을 터트리는 사람의 차이와 같이 순례자의 목적이 순례자를 향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코끼리에 관한 낭만적인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코끼리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아온다는 거였다. 코끼리 무덤에 관한 설화는 코끼리를 사냥하기 위한 밀렵꾼의 거짓말에 기반한 환상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서로의 살갗을 주고받는 생애에서 누가 코끼리이고, 밀렵꾼이 될 수 있을까. 인생에서의 재난은 누구에게 일어난 것이며 누가 그것을 방지하고자 하는가.





3. 죽음과 표본의 전시와 공유성



"피부만 남겨 놓는 거죠. 그러니까 '몸'이라는 단어의 온전한 의미를 구현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저 일부에 불과합니다. 건초로 만든 인체 모형으로 외관만 드러내는 것이죠. 미라는 시체 보존법 중에서도 상당히 유감스러운 방법입니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듯 시늉만 할 뿐입니다. 사실상 명백한 속임수이자 서커스의 눈속임이죠. 왜냐하면 겉모습이나 외피만 보존했으니까요. 실제로는 시체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관념적으로 보존에 반대되는 개념을 지향하니까요. 지극히 야만적이죠."

p215

인간의 가장 강한 근육은 혓바닥이다. (생략) 그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p271

이동성은 현실이 된다.

P345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 그자에게 저항한 사람은 바로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했어.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혔어. 그리고 곤충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된 육신은 인간적인 눈과 비인간적인 눈앞에 던져졌어. 실은 주로 비인간적인 시선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런 광경을 가장 즐기는 게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야.

p391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발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고 서로 바라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기에. 우리는 문자와 이니셜을 서로 교환하고, 종이 위에 서로를 불멸로 남기고, 서로를 플라스티네이션 처리하고, 문장의 포름알데히드 속에 서로를 담글 것이다. (중략) 누가 이것을 읽을 것인가? 곧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승무원들이 게이트 앞에 서서 승객을 맞을 준비를 끝내자 지금껏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승객들이 벌떡 일어나서 기내 수화물을 챙긴다. 탑승권을 뒤적거리고, 채 읽지 못한 신문을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각자 머릿속에서 말없이 양심의 성찰을 한다. 여권과 표, 서류 등등을 모두 챙겼는지, 환전은 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그리고 그곳에 가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제대로 된 방향을 선택했는지. (중략) 그 미소가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 태어날 것이라고. 이번에는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P602




물건에도 권리가 있는데 육체라고는 없을까? 외적인 것들에 관해 저작권이 있는 거라면 전시자는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걸까? 다른 동식물에 대한 권한을 인간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을 공용의 것으로 치부하는 데에는 어떠한 의미가 깃들어 있을까? 그리고 누가 그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

《방랑자들》을 읽고 나면 좀처럼 가시지 않는 의문이 딱지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프랑스에서의 여행을 마치며 고향인 폴란드로 돌아온 쇼팽의 심장처럼 색상과 형태, 문화와 국가, 인종이 다르다고 하여금 흑인이나 두 개의 몸과 머리를 지닌 태아, 동물의 머리를 한 사람 등을 호기심의 방에 박제하여 옮겨놓는 일은 평등하지 않다. 일상에서 횡행하는 경쟁이 균형을 깨는 일이고 유지로의 거세(정지)가 생애를 보존하는 움직임을 낳는 거라면 이동은 죽음을 향하여 전진하는 시초이자 필수불가결한 행위로써 기존의 정지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안락사와 잊힘은 남김으로 누군가의 호기심과 희열이 담긴 욕망의 더미 속에 표본으로 전락한 채 뭇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신이 가진 불멸을 바라며 살아있는 상태로 회귀로의 순환을 반복하는 여생에서 '공감'은 전경과 배경의 반전과도 같이 전시된 육체의 표본에 있으면서도 본질은 미지의 내부에서 비롯됨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등장인물들이 타인의 육체를 통하여 소유하고 싶어 했던 것은 스스로이고, 따라서 타인을 향한 일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지으며 관계에 구체화하여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처럼 자신을 남겨놓기 위한 아우성이 아니었을까. 정체의 박제를 위한 자기실현의 욕망이 육체의 혈관과 장기 다발, 근섬유의 꿈틀거림 아래 녹아들어 피부와 뼈를 욕망하게 하지만, 피부와 뼈가 아닌 피부와 뼈에 연계된 무언가에 그토록 보고자 했던 게 잠재되어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 우산이 인격체라면 우산의 뿌리는 면과 철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잊은 일련의 일들은 순환의 교차지점에 등장하는 신, 카이로스를 생소하게 느낄 만큼 원형을 대물림 해오면서도 본질을 격리시켰고 인간이 가진 서로의 시야는 나와 타인을 비교하며 어렴풋이 같아 보이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 인해 가까운 존재를 멀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여기에는 현존하는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이기도 하다.

* 방랑자들을 읽으며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을 첨부합니다.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1943년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론을 제시한 이후에는 인지와 심미에의 욕구가 추가되고, 말년에 들어서는 초월 욕구가 추가된다. 매슬로의 이론이 가지는 한계는 훗날 앨더퍼의 ERG라는 유사한 지점을 묶어 축소된 이론으로 보충되는데, 존재(existence), 관계(relatedness), 성장(growth)의 3대 욕구를 말한다. 그리고 각 단계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동적으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