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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이제야 언니에게 / 최진영
작성자 노문희 작성일 2020-05-13
작성일 2020-05-13


그날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날 그 일이 없었어도 그는 분명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207페이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통은 법이 가해자를 처벌하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위로한다. 물론 이것도 사건으로 접수되고 제대로 수사를 했을 때 얘기다. 마음 같아서는 피해를 본 그대로 가해자에게 돌려주고 싶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으로 범법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법이 그만의 방식으로 위로해준다고 해도, 인간의 마음에 내려앉은 고통의 무게를 줄일 수는 없다. 평생 사라지지 않을 분노의 무게도 여전하다. 그러면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세월은 흐르고 점점 사람들에게 잊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그런데 말이다. 법의 심판이라도 받는 경우에도 그런데 아예 법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가해자는 가해자가 아닌 게 되고 피해자는 그런 일을 당할 근거를 제공한 이가 되는 일이 되기도 하는 현실이, 억울하게도 우리 옆에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끔찍한 그 날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기록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날의 일을 결코 찢어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고스란히 들려준다. 그날의 사건은 한 사람의 인생을 비틀어놨으며, 가장 아름다울 시기를 가장 비참하게 보내게 했다.


열여덟의 이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당했다. 당숙은 제야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너를 아낀다고 말하며 제야의 정신까지 폭행했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제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숙은 마치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제야와 저녁 인사를 하고, 다음에도 다시 만날 약속을 남기며 애인 대하듯 문자를 남긴다. 그때 제야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멍하던 제야는 혹시나 당숙에게 무서운 일을 당할까 봐, 당숙 밑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봐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가 당한 일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는 생각에 경찰서로 가서 신고한다. 제야는 그 피해에 관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내 인생이 서너 개쯤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느냐고 말하면서, 이번 생은 이대로, 이대로 재수 없게, 미친 사람들, 그런 일이 어떻게 운이고 재수인가. 그에게만 생이 한 번뿐인 듯 실수 하나로 인생을 망칠 수 없다고…… 그 사람은 이미 망가진 사람이다. 스스로 망가져서 나까지 망친 사람이다. (84페이지)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는가. (133페이지)


왜 세상 많은 일에는 돈과 권력이 법보다 앞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걸까. 제야의 신고는 경찰관들이 연락한 당숙의 등장과 함께 없었던 일이 된다.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그 지역의 많은 일에 앞장서는 당숙의 힘은 어린 제야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경찰관들의 질문에 제야는 더 주눅이 들었다. '성폭행을 당했는데 왜 보이는 상처가 하나도 없느냐, 보통은 반항하는데 너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거기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셨다는데, 이렇게 다정하게 주고받은 문자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냐.' 제야가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고, 제야의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제야를 탓했다. 마치 이번 일은 제야가 모든 원인 제공을 한 것처럼 말했다. 가해자인 당숙에게는 남자가 한 번 실수할 수도 있다고, 술 마시고 그럴 수도 있다고, 남자로 살면서 그 정도는 괜찮다고. 뭐가 괜찮은 거지? 어디서 실수인 거지? 그럼 그가 저지른 실수의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닌 게 되는가? 왜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무마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것인지 모르겠다. 피해자의 마음이, 고통이, 상처가 가장 중요한 건데 아무도 그걸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야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말할 수 없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마음을 가까이서 듣는 듯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생긴 일이 언젠가 우리가 겪을 일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살아가니까. 하지만 어디까지일까. 우리는 어디까지 얼마나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성폭력에 관한 사건을 들을 때마다 걱정된다. 가해자가 저지른 일과 피해자가 당한 일을 중심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보고 해석하는 일들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법이 그 기준을 정하고 법대로 판단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 사람들의 오해와 비틀린 시선으로 가해지는 2차 피해는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이들의 피해는 고스란히 안으로 스며들어 온몸에 번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삶을 뒤흔들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제니야,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224페이지)


다행스럽게도 제야에게는 강릉 이모가 있었다. 작은 동네의 사람들 시선을 같이 맞받아쳐 줄 수 있는 이모가 있었다. 사건에 관해서 묻지 않는,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이성적으로 사건을 볼 수 있는, 오롯이 제야 자체로 받아들이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이모와 함께 지내면서 제야는 조금씩 상처를 회복한다.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도 세상에 적응하려고 한다. 집이 아닌 곳에서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성폭행 피해자를 보는 시선이 두려워서 벗어난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그리운 것들이 있다. 함께 성장하며 가족과 친구 이상이었던 동생 제니와 사촌 동생 승호. 그날의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함께 어른의 시간을 살면서 성장통을 겪고 있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던 미래의 시간을 조금씩 채워가면서 세상 속에 섞이면서도 인간다움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소설은 제야가 쓰는 일기로 조심스럽게 그 상처를 꺼낸다. 감히 잘 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함부로 위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마주하고 어떻게 변해 가는지, 어떻게 견디고 극복해 가는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마치 눈앞에서 제야의 모든 표정과 생각을 보는 것처럼 섬세하게 들려준다. 누군가가 던진 일상의 폭력 앞에서 피해자의 상처는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 대신 대답하는 것 같다. 동시에 우리에게 질문을 되돌리기도 한다. 혹시 우리는 제야의 주변에서 던진 시선들처럼 그렇게 했던 적은 없었는지를. 제야의 일기가 계속되고, 물음표 없는 질문들이 계속될 때마다 제야의 상처를 공유하게 된다. 이건 절대 제야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이다. 누군가가 행하고, 누군가가 방관하면서 혹시 그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건 아닌지 묻는다.


상처를 받는 건 순간이지만, 그 상처가 치유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아무리 상처가 치유된다고 해도 상처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크거나 작거나 흉터를 남긴다. 저자는 그 흉터가 제야의 것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제야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는지 고스란히 들려준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가 쏜 화살이 되돌아오는 것처럼. 어쩌면, 절대 끝나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 시켜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