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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고
작성자 조단비 작성일 2020-01-17
작성일 2020-01-17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




< 올리버 트위스트 > 찰스 디킨스 지음 / 현대지성 출판

올리버 트위스트는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지만 범죄 소설의 플롯을 차용하고 있고 연약하고 변함없는 주인공 올리버와 선을 둘러싼 우연, 행실과 관련한 인과적 깊이에 관한 사료성을 지닌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10년부터 1940년에 한국에 도입되어 오늘날 방송 매체에서 자주 발견되는 신파극과 희곡의 감상적인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전해내려 오는 해학과 풍자의 요소를 담고 있다. 세계화에 이르러 서양의 고전 문학 거장 디킨스가 전개하는 감정선이 9.11테러를 기점으로 시작된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았던 것은 그 덕분이리라. 19세기(1838년도)에 발표된 올리버 트위스트가 쓰이기 이전의 18세기(1701~1800) 영국은 봉건 귀족 사회에서 근대 산업 사회로 탈바꿈하는 격동기를 보내고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는 바로크에서 로코코 양식으로 바뀌는 문화적 격변과 함께 신흥 부르주아의 등장, 세대를 넘어 꾸준히 이루어지던 해부학 연구의 비약과 도굴이 이루어지며 신문물의 도입과 발전, 주체적 의식의 고양이라는 정치와 사회 국면의 재탄생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18세기 영국에서는 다면적 사회에 접어들며 외양의 품격을 추구하는 일과 그에 걸맞지 않은 의식적 소양에 따른 범죄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18세기에 형성된 문제점은 19세기까지 이어져 올리버 트위스트는 자본주의의 번영에 부연되는 현실의 문제에 기반하여 풍자와 해학을 넘나드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로즈와 주인공의 만남을 기점으로 발생되는 1부와 2부 템포의 다름이나 희극적인 맹목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표현과 같이 찰스 디킨스가 남긴 사유의 고찰은 적나라한 은유가 사용되어 독자에게 독특한 중독성을 부여하고 있다.



(1) 도덕이 가진 입체적인 모습과 그 다면적 양상에 관하여

올리버가 태어난 곳은 신분제 사회에서 빈민을 구제하는 구빈법을 시행하고 있던 구빈원이다. 신구빈법의 도입으로 구빈원 외에서 이루어지는 구호 활동을 축소 또는 폐지하고 중앙집권체제에 따른 일관된 구호작업이 불러일으킨 폐해는 자본주의의 활성화와 더불어 공직자들과 중간 관리자들의 손을 거쳐 자금이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되는 현상을 불러왔다. 가난한 사람은 세금을 포탈하는 범죄자가 되고, 자신의 불행을 이유로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을, 또는 자신들이 보기에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가난한 이들을 '가난''도리'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부유함의 주춧돌로 삼아 학대하는 일이 사회의 전반에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사회의 신사들은 아주 현명하고 깊은 철학을 지닌 분들로, 구빈원에 관심을 두게 되자 단번에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점인데, 바로 가난한 사람들은 구빈원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구빈원은 공공 오락을 제공하고 공짜 술집이자 1년 내내 아침, 점심, 저녁, 차를 얻어먹는 곳이니, 놀고먹기만 하고 일하지는 않는 벽돌과 회반죽으로 지은 낙원과도 같았다. “오호라!” 이사회는 다 알겠다는 듯 말했다. “우리가 이걸 바로잡아야 해. 당장 막아야 한다고.” 그래서 이사회의 신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구빈원 안에서 서서히 굶어죽든가, 아니면 바깥에서 빠르게 굶어죽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규칙을 세웠다.

(당연히 이사회는 어느 누구도 강제할 의도 따윈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이사회는 무제한으로 물을 공급받도록 수도 업자와 계약을 했고, 곡물업자에게서 소량의 귀리를 정기적으로 공급받아, 하루 세끼 묽은 귀리죽과 일주일에 두 번 양파 하나, 일요일에 둥근 빵 반 덩어리를 지급했다. 그 밖에도 부녀자들과 관련하여 수많은 현명하고 인간적인 규정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다. 친절하게도 가난한 부부를 이혼시키는 일을 도맡아서 거대한 소송비를 면해주었고,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도록 강요하는 대신에 남편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아 다시금 독신자로 만들어주었다!

p33

서로를 위한, 대의를 위함이라 부르고 있지만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는 사유의 선함이 아니라 잘못을 숨기고자 하는, 자신의 이익을 향한 철학으로 '보편적 선함'을 이용하며 지나친 불의를 저지르고 불의를 의로 삼고자 결집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찰스 디킨스의 신랄한 풍자는 상류와 하류 어느 한 쪽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무엇이 인간이라 할 수 있는지를 등장인물의 모습을 통하여 질문함으로 사회 전반의 구조를 이루는 보편성이 가진 실체를 드러내고 어떤 게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일인지, 공존하는 일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찰스 디킨스가 묘사한 보이지 않는 경쟁과 치열함이 현대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후세에 이르러서도 지속되고 있는 욕망에 관한 전쟁을 모토로 사람들이 사유할 수 있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찰스 디킨스는 영국 포츠머스 교외에서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빚을 지고 감옥에 간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돈을 벌기 위하여 구두약 공장에 취직함으로 아동의 학대와 착취를 겪은 이후 형성된 관점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 "초록색 벨벳을 입은 마싸로니는 상당히 매혹적인 인물이지만, 거친 면직물 옷을 입은 사익스는 지지하기 곤란한 인물이다. 짧은 속치마와 가장무도회 드레스를 입은 마싸로니 부인은 모방하거나 가곡의 인쇄물 따위에서 재현될 수 있지만, 면 가운과 싸구려 숄을 걸친 낸시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미덕이 어떻게 더러운 스타킹을 외면하고, 악덕이 어떻게 작은 리본들과 화려한 복장과 결혼하여, 마치 혼인한 부인들이 그 이름들을 바꾸듯이 자기 이름을 '로맨스'로 바꾸는지 그저 놀라울 뿐 (p13)"이라는 그의 서문을 읽으며 우리는 그가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고자 하였다기 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미화된 현실이 아닌 가혹한 현실 속에 녹아있는 미덕과 서로에 관한 이해를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싸로니 : 제임스 로빈슨 플랜취가 1829년 발표한 희곡의 주인공. 귀족 같은 도둑.

이와 같이 올리버는 출생의 비밀을 드러내고 브라운로 씨와 로즈의 집에 머물기까지 구빈원과 '생계를 위한 직업'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거리를 도망치고 전전하며 정의롭지 못한 일 내지는 희생과 학대를 강요받으며 온갖 구설수에 시달린다. 절친한 친구 딕의 죽음은 물론이고 악의 상징에서 파생되는 선의 정교함이나 유대인 노인과 사익스, 교묘한 미꾸라지, 멍크스 일행이 파멸할 때까지의 전개는 예상과 예상을 뒤엎는 일이 교차하며 올리버를 둘러싼 외부의 사항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자신의 경험 혹은 사회의 일화를 모티브로 창작을 하는 건 누구나가 같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같다. 어떠한 의도를 담고 있는가에 따라 선하려 한다는 게 선하지 않으려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는 건 창작이나 이야기의 의도를 생각해볼 일이다. 찰스 디킨스는 누구보다 이러한 점을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고전 또는 이야기 속에는 결핍과 함께 권선징악과 혈통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부당함을 보편화하여 고발과 공론의 소재로 삼는 것을 통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정형화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맹인 모상(盲人摸象) 내지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속담이나,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내용처럼 서술이 아닌 당장의 대화나 경험적 이야기만으로는 누구나가 선량함과 피해를 표방하고 있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이기를 바라는 것'인지, '선한 것'인지, '선함에 기인된 것처럼 만들고자 하는지'를 독자는 알 수 없지만, 어떠한 의도를 거쳐서라도 나오는 형식에는 누군가의 이해와 고찰이 담겨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철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이들 모두에게 발견될 수 있는 '시선'에 해당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눈에 보이는 미를 추구하는 엄격한 도덕론자와 철학자를 향한 찰스 디킨스의 비판은 시대를 넘어 사고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가진 가능성을 파헤친다. 고난에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올리버를 보다 보면 척박한 건 무언가를 소유하였는가 하는 물리적인 소재가 아닌 소통을 향한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기인되어 있는가를 다른 사람이 제대로 알 수 없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알 수 없거나 알고 싶지 않다고 혹은 알고 모름으로 해서 자신의 선택이 실수이거나 실패하였을지에 관한 두려움으로,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기존의 틀을 강화하며 묻어버릴 수 있는 현실이 있을까? 찰스 디킨스는 올리버를 통하여 독자에게 낡고 냄새나며 해진 옷이나 향수를 뿌린 정장을 입었다고 하여금 사람의 본질이 달라질 수 있는지, 우리가 무엇에 공감하며 용기를 내야 하는지에 관한 담론을 남긴다.

(2) 만들어진, 만들게 된 비밀과 비밀이 공유하는 동료애의 몰락



자신과 같지 않은 이를 같은 이로 양산해내고자 하는 무리에게 있어 지식과 교육이 내포한 영향력은 자신의 길을 나아감으로 자신 보다 나은 삶을 타인에게 선물하려는 마음이 아닌, 마음의 병폐를 대물림할 수단으로 쓰인 게 아니었을까 싶다. 고통과 외로움이 일반적인 일이 되면, 그래서 '약자를 자처하는' 어느 한 쪽을 향한 '약자'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가 오면 '그것이 도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것이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도 건강한 사람처럼 보일 테니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스스로가 설자리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낸시는 매춘부로 악행을 일삼는 이들의 동료로써 시간과 비밀을 공유하는 동시에 도덕적 연민을 느끼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사익스는 그러한 낸시의 도덕적 연민을 여자들이 종종 잃어버리지 않는다며 교육할 것을 강조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누군가를 직간접적으로 죽이며 누군가의 것을 훔치거나 자신의 이익의 발판으로 삼는 일은 생의 원리에 입각해 있으므로 현실에 있어 보편타당한 일이고 이익을 무리와 공유함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일들을 들키지 않으려 하거나 드러내는 것은 영업 기밀이자 서로에 관한 의리이며(밝혀지면 줄줄이 감옥에 갈 수 있으므로) 수모를 겪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어야 할 뿐이다. 이들이 하는 교육의 방식은 고립에 관한 불안을 공유함으로 타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며 정의롭지 못한 일을 스스로 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런데 행복에 있어 가장 큰 유능함은 능력을 소유하는 일과는 달리 나를 사랑하는 듯이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찰스 디킨스의 글 내용은 누군가나 나 자신을 도덕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도덕적인 목표를 품는 일"에 최적화되어 있다. 사랑이 이익을 낳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사랑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실제로도 우리 자신의 실존에 있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본다는 것은 편견을 가지는 일이고 자신이 원하는 틀 내에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통제하려 함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는 '도덕적 명분'이 내포한 행위가 가질 수 있는 실질적인 의미에 관하여 사회를 신랄하게 드러낸 찰스 디킨스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타인에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때로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낸시처럼 타의에 의하여 본인이 원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그것이 원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일 또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으나 자칭 '가난한 사람'이라는 이들에 의하여 '가난'의 실체가 가려진 올리버처럼 누군가에게 음험한 일들을 겪으며 입장이 바뀌어 잘못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무엇을 할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우리는 평소 이따금씩 안 해도 될 행동을 하고 싶어서 또는 무의식적으로 하기도 하지만, 잘못되거나 구태여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일반적인 일로 만들기 위한 상상을 현재에 수놓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는 신호이다. 상대가 사람을 모으며 선의와 이익관계와 결부되어 벗어나기 힘든 가스라이팅을 저지르고 스톡홀름 증후군을 형성하여 이용하고 있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잃지 못한 선의를 상징하는 선량한 올리버만이 아니라 그러한 상대인즉, 가해자들에게 마저 선의의 끈을 놓지 않은 낸시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낸시의 행함이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라 증상의 일환이라면 올리버와 딕, 로즈를 필두로 한 모든 이들이 양심에 관한 병적인 추구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이 실제로도 좋은 일이고, 할 수 있는 만큼의 능력으로 행하는 일들이 서로의 유익함을 만드는 세상. 현실을 밝게 비추는 상상력으로 서로의 다름과 평등함을 인정하려는 시도. 이것이야말로 존재함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자신을 토대로 착취함을 통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어려운 상황에 분노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선함을 지켜내기 위하여 노력한 올리버와 달리, 나는 쌓이는 슬픔에 절망하는 시간이 길었던 올리버였다. 사람에게 슬픔이 길어지면 분노와 함께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괴감 속으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주저앉지 말기를 바란다. 체력이 고갈되어 잠시 쉬더라도 일어서고 흔들리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으며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기를. 우리가 진실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건 자신의 영혼이고, 희망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진리를 갈구하는 이가 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개인의 인식이 모이면 사회의 구조를 바꾼다. 강하고 약함에 있어 타인의 행동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무리의 행동은 구조에 있으리라는 편향된 생각은 잘못된 일들을 강화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다수의 문제는 개인과 구조가 결합되어 일어나는 일들이다. 동화와 미스터리, 소설에 등장하는 우화적 일들이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그것이 담고 있는 '현실'에 공감할 수 있는 개인의 연상 능력 덕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해롭게 하는 꿈은 현실에 가져다 놓을수록 그 자신도 화를 입기 마련이지만 진실과 함께 하는 좋은 꿈과 소망은 누군가를 이롭게 하는 현실이 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공감하며 서로에게 공감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찰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하여 자타에게 있을 수 있는 편견을 놓기 위한 노력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그 자신마저 통용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주의* 속담과 사자성어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라는 의미로 통용되므로 이해를 위해 차용하였습니다. 주의될 수 있는 부분에 관한 부언을 숙고하여 추가합니다.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여겨집니다.

* '적나라한 은유'라고 한 것은 직유도 은유도 완전한 반어도 아니며 노골적이지만 직접적이지 않은 문체와 전개로 인하여 언급하였습니다. 해학과 풍자가 동시에 쓰였지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우스꽝스럽다기 보다 기괴한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서문과 더불어 예상하건데 독자의 비판적 사고를 이끌어내려는 풍자가 주 요소는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독후감을 쓰면서 저는 고전이라 줄거리는 검색하면 볼 수 있지만 스포일러가 될까 봐 감상 위주로 작성하기로 하였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문장은 일견 경험론적 철학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경험에 의하여 쓰였고, 경험과 직관 없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작품 내의 전개를 통하여 변증과 디테일의 호환을 담은 게 아닐까 합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통하여 다른 이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모든 등장인물에게 나오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는, 그 자신마저도 그러함에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거였구나 싶은 책입니다. 끝으로 저는 가끔 여기까지 견뎌내고 와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하고는 하는데요. 누군가는 그걸 시적으로 표현하였더군요. 사람이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는데, 문장은 되지 못하는 걸 보면 저는 의미 이상이 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나마 누군가의 의미라도 되는 일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그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같이 오는 일이라고 합니다. 부서지고 부서지기 쉬운 한 사람, 상처를 짊어진 한 사람이 가진 아이와 어른이라는 징검다리 사이에 서 있는 어른과 어른이 만나는 일. 만남은 누군가의 징검다리가 될 수 없으므로 징검다리가 되어주기도 하듯이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공감을 한다면, 제게 용기 있는 공감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