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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케어 / 아서 클라인먼
작성자 노문희 작성일 2020-08-31
작성일 2020-08-31


병 뒤에 놓여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에 무관심한 의료 시스템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전문가들이 어떤 진료와 돌봄을 해야 하는가. 의료인들이 현실을 읽는 능력이 부족하고 감수성과 상상력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11페이지)

 

어느 방송에서 본 기억이 난다. 출연자 중의 한 사람은 소통전문가였다. 그 프로그램은 가족 간의 소통 부재로 생기는 문제를 주제로 얘기하고 있었는데, 막상 방송에서 마주한 소통전문가의 한 마디는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통의 중요성과 방법을 가르치고 다녔는데, 정작 자기 가족의 문제에서는 그렇게 강의하고 다니던 내용이 소용이 없었다고. 나름 그 분야의 전문가인데, 왜 현실로 닥친 그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답을 경험 부족에서 많이 찾았다.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들이 막상 현실에서 부딪히면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고. 그러니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다고 말이다. 이 책의 저자에게 그때 방송을 보면서 느꼈던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저자는 오랜 시간 정신의학 분야에서 활동해온 의료진이자 학자였다. 많은 사람에게 정신적인 문제와 해결 방안을 강의하면서, 자기 분야의 명성을 쌓아갔다. 막상 자기 가족에게 생긴 의료적인 문제 앞에서는 전문적으로만 판단할 수 없었던 거다.

 

사랑하는 가족과 자기 분야의 명성을 가지고 살아가던 노년의 어느 날, 저자는 아내의 조발성 알츠하이머 앞에서 당황한다. 낯설지 않은 병이고 그가 자주 언급한 정신적인 문제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병의 당사자가 아내였다. 아내는 그의 의학 연구의 파트너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는데, 그런 아내에게 갑자기 찾아온 이 병 앞에서 그는 초보였다. 그러면서도 아내를 끝까지 집에서 돌볼 거라고 했다. 그 시간은 10년이나 계속됐다.

 

저자의 아내 돌봄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되는가? 글쎄,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겠다고, 그가 여러 환자와 마주했던 이 병을 잘 알고 있으니 잘 돌볼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의사였으니까, 자주 보던 병이니까, 그만큼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하루에 잠깐 진료하면서 만났던 환자와 집에서 종일 돌봐야 하는 아내는 달랐다. 그는 이제 의사이자 가족의 간병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

 

돌봄을 지속하게 하는 감정을 모든 사람이 느끼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회에서 환자의 가족은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다. 때로는 그 기대가 죄책감과 분노와 억울함을 일으키며 그 지독한 죄책감이 생의 마지막 시간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환자 가족은 숨겨진 감정을 눌러오다가 모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죽음을 앞둔 환자의 삶의 질을 낮출 수 있는 의료적 개입을 고집하기도 한다. (79~80페이지)

 

혹시 경험해본 사람은 알까 싶다. 저자의 경험을 계속 들을 때마다 순간순간 생각나는 건 우리 이론으로 만나거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병원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부터였다. 이제 저자도 알게 됐다. 의사가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 간병인의 자리에서 경험한 같은 공간이 다르다는 것을. 병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은 기다림의 시작이다. 검사를 접수하고 기다리고, 검사를 받고 기다리고, 다시 의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그 후에 마주하는 건 아주 짧은 시간의 병명 듣기다. 불과 몇 초, 몇 분의 몇 마디를 듣기 위해 기다림의 시간은 잔인했다. 온갖 검사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은 제대로 치료도 받기 전부터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특히 저자의 아내처럼 알츠하이머 환자와 함께 그 시간은 견딘다는 건 더 힘들다. 간혹 통제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의지할 건 병원밖에 없다. 병명을 알아야 했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니 그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디고 기다린다. 그렇게 긴 기다림 끝에 받는 건 처방전이나 다음 진료 예약 같은 거다. 필요하다면서 추가된 검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병원에 간다. 희망이 없는 반복을 애써 희망을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자가 병원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병원에서 환자와 가족들을 마주하면서 수도 없이 건넨 말들과 시간이 이제는 오롯이 자기의 몫이 되었다. 의사의 입장에서 먼저 보였던 것들이 그 반대의 시선에서 보이는 것들과 겹쳐진다. 환자 가족이 되어보니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너무 많다고 고백하는 저자의 말이 생생하게 들리는 이유는, 너무도 같은 경험을 한 한 사람으로 의료진이 환자와 보호자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서다. 그동안 의료진이 쓴 책은 많았겠지만, 의료진이 자기 전문 분야에서 치료받아야 할 환자 가족으로 변신하여 경험한 이야기는 처음 만났다. 내가 그동안 병원에 드나들면서 느꼈던 분노와 짜증, 그들의 배려 없음에 화가 났던 순간들이 기억났다. 의료진이 무시하듯 환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때, 의료적인 행위 이상으로 필요한 것들을 누구도 지원해주지 않을 때, 인간적인 생활을 무시한 채로 그저 진단과 병명이나 처방전 하나로 끝내곤 했던 순간들. 그때마다 속으로 묻곤 했다.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의 일이라면 그렇게 했을까?’ 그래서 저자의 말을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내가 변하는 과정을 보는 마음이 어땠을까 싶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마주한 그가 당황하면서도 아내를 돌보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그가 학문으로 대했던 알츠하이머를 경험하는 시간이 의사인 그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까 싶기도 했다. 그 변화를 기록하고 더 깊게 살펴보면서 그는 가족 돌봄의 보호자의 경험과 의료 전문가의 통찰을 담아 이 책을 완성했다. 어느 한쪽의 시간을 살면서 기록한 게 아니어서 더 가치 있는 기록이 아닐까 한다. 특히 장기 간병의 잔인한 현실과 그 잔인한 시간을 구원해줄 방법에 대하여 토론할 기회가 만들어진 것도 같다.

 

돌봄이 의사와 환자 사이의 긴밀한 상호 작용에 기대고 있다면 이 관계 양쪽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사회적 요소,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이 요소를 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가? (194페이지)

 

전문가들이 보는 알츠하이머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알츠하이머를 초기, 중기, 말기로 구분하면서, 그 단계에 따르듯 설명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경험한 실상은 달랐다. 질병 서사는 절대 깔끔한 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병은 내리막길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진행됐다. 언제나 오늘이 한계인 것 같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시간을 10년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이었다고 말하며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동시에 돌봄을 하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둘 다 자기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돌봄이 상호성에 기반하여 지속하는 것이고, 그의 아내는 마지막 몇 년을 제외하고 돌봄의 적극적인 참여자였다. 그렇지만 병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에는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감정을 잘 참지 못했다. 장소에 상관없이 화를 내기도 했고, 가끔은 폭력적인 성향도 보였다. 그는 아내가 바닥에 본 배변을 처리하며 울부짖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고 가족이기에, 그가 아무리 자기가 직접 돌보겠다고 마음먹고 최선을 다해도 한 사람의 역할로 부족한 순간은 온다. 나도 너무 잘 아는 얘기에 그가 울어버린 순간을 계속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 돌봄의 시간을 경험했던 나였지만, 환자 이상으로 돌봄을 행하는 사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경험한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 육체적 정신적 감정의 문제를 선뜻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환자는 환자대로, 가족은 가족대로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떼어놓고 생각하자는 게 아니라, 돌봄이 오롯이 가족의 일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필요하다는 거다. 더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내를 요양원에 맡기고 온 날, 저자는 자책하며 오열했다고 한다. 의학적으로 필요한 결정이었지만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고. 이러한 결정에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이미 경험한 한 사람으로, 그 시간을 힘들게 겪어온 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돌봄을 위해 요양 시설을 선택한다는 게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라는 거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돌봄을 위해 모두가 지옥에 빠질 수는 없었다. 가정 간병을 버틸 수 없을 때 선택하는 게, 조금 더 전문적인 돌봄이 필요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속되는 고통의 시간에 서로의 육체와 마음에 상처 입히지 않고 치료받고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믿어보자. 가정 돌봄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돌봄을 상호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돌보는 사람의 영혼의 돌봄을 이루면서 힘을 내게 하고, 반대로 돌봄을 행하는 사람도 피로와 분노를 알아서 이겨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돌봄의 환경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의료시스템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거다. 알 것 같다. 지금 우리의 현실 역시 간병의 몫을 오롯이 개인의 일로 여기지 않는가. 개인의 부담이 되어버린 간병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기에, 저자의 이 주장이 굉장히 현실적인 경험에서 바탕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의료계가 더 고민해야 할 문제를 언급했다. 의학은 돌봄을 진료행위의 핵심으로 정의해왔지만, 실제로 의사가 돌봄에 관여하는 일은 사라져갔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돌봄에 더 참여하는 이들(가족이나 간호사 등)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아졌고, 의료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돌봄은 약화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병원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환자와 얼굴 마주하는 것보다 귀만 열어놓은 듯한 응대에 시선을 모니터를 향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궁금한 게 있어서 질문이라고 하려고 하면 시간은 없고 바쁘고 귀찮다는 듯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기도 어렵다. 마치 무슨 기계를 찍어내듯, 환자는 처방전 하나 받기 위해 긴 기다림을 견디고 의사 앞에 앉는다. 어려운 질병을 치료해내고, 온갖 수술 방법이 발전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방법은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인간다운 진료의 모습이나 병의 진행에 맞춰 개선해나가야 할 현실적인 문제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의사이면서 가족의 돌봄을 경험하고 나니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의학계의 많은 면을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 게 아닐까 싶다. 겪어보니, 그가 걸어온 의료진으로의 시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아내의 알츠하이머는 슬픈 일이겠지만, 아내를 떠나보내며 그가 느낀 많은 것은, 그 후 그의 의사 생활에 많은 변화를 만들었으리라. 그동안은 병의 경과에 관심 두면서 살폈다면, 이제는 환자가 병을 경험하는 일에도 관심 두어야 하며, 병과 돌봄을 하나로 살펴야 하는 일이 더는 개인의 몫으로만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돌봄이란 문제가 국가가 함께 해결해나가야 하는 일임은 틀림없다.

 

나는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경험하면서 돌봄의 의미를 탐험하길 바랐고 그들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유용한 삶의 지혜를 찾기를 바랐다. 환자와 나의 관계는 점점 더 상호적으로 평등해졌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함께 위기를 공유하고 이 모든 과정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함께 기억의 파편을 꺼내보고 인생의 비탄을 받아들였다. 그것이야말로 치유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가치는 이후에, 내가 우리 가정에서 돌보는 사람이 되었을 때 다시 필요한 자리에 들어와 나를 일으켰다. (215페이지)

 

돌봄의 핵심은 옆에 있음, 현존(presence)이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모두 생생하고 온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서로의 곁에 존재하는 일이다. 돌보는 행위는 우리 안의 현존을 끌어낸다. 돌봄은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추억을 살피는 일로 이어진다. 나는 돌봄이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들을 목격하게 하고 자기 의심과 무력감을 수없이 마주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나누게 하고 서로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삶의 목적의식과 감사를 키운다는 사실을 배웠다. (15페이지)

 

의사와 보호자, 두 입장을 경험한 저자의 기록이 우리가 부딪히는 병 앞에서 잘 버티고 나아갈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아프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늙어가고 있고 언제 돌봄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그때마다 개인의 고통으로 반복되지 않기를, 개인의 돌봄에 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제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날 사라져가는 돌봄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우는 이야기로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