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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이 나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작성자 조단비 작성일 2020-01-27
작성일 2020-01-27

죽음이 나의 이름을 부르기까지


과거의 경험이 이따금 올라와 나를 함몰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현실에 있지만 지금 여기에 서 있는 현실과는 다르다는 것도. 내 곁에 그들은 영원히 없을 것이고 나는 그것에 만족한다. 그게 미련스러운 집착인지 아닌지는 하던 일을 관두었을 때 알 수 있다. 후련하면 원이고, 그렇지 않다면 한이다. 내게 한을 뒤집어씌우려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말이 오고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진 결벽에 관한 강박은 주변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이 아닌 양심에 있는 일이었다. 나는 정리하기를 좋아하여 청소하고 나서야 기분이 전환되는 편에 속하지만, 정리에는 자기만의 규칙이 있으면서도 없다. 이것은 계획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음과 같으리라. 잠들어 있다가도 불현듯이 솟구치는 일. 그것이 무엇인지 의아함을 느끼고 질문하고 핵심을 찾고자 하는 본질에의 집착. 가난했지만 진정으로 가난한 일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았다. 물욕으로 말미암은 일신의 편안함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른 것을 더 소망하기를 택하는 이유는 종교인들의 말마따나 나의 기준에서 중요한 게 있었던 덕분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으로,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내가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을 선택할 것이다. 희생도 그렇다. 흔들리면서도 택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지만,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은 희생이 아니다. 누군가가 바라보기에 희생일 수 있는 일들이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그 사람은 '원래 그러므로, 혹은 원래 그렇지 않았으므로' 라는 이유로 알든 모르든 다른 사람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거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이 왜 자신이 아닌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어느 한 쪽의 존중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대와 태도를 바꾸어 나의 행동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수용할 수 없는 일은 다른 사람도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역지사지는 상대를 나로 여기고 나를 상대로 여겨 있었던 일을 바꾸는 게 아니니까. 달라도 괜찮은 일과 괜찮지 않은 일에 관한 기준은 서로가 다르겠지만, 굳이 같아야 한다면 나는 진실이 같아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마음은 각자의 것이므로, 정서에 따라 각색된 일이 아닌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일에서. 그래서 무엇을 하였는지를 원하는 대로 만들기 위해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현실의 누구 어딘가에는 있었던 일이니까, 라면서. 권력에의 유지를 위한 행위를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라 여기며 참과 거짓이 뒤섞임으로 현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면 모르는 일이 되게끔.

사람들은 너무 쉽게 관계를 맺는다. 현대인들에게는 한 사람과 시작과 끝을 같이 할 수 없으니 성병이 생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는데 우리가 공산품처럼 찍어나오는 동물 중 인간이라는 종류의 개체일지라도 신발의 디자인과 치수 만큼이나 명확한 형태를 지닌 사람은 없으므로 맞기를 바랐지만 틀린 짝을 찾게 되는 건 그렇다 치고, 발을 집어넣을 완벽한 구조의 신발을 찾아 몸을 파는 사람들마저 절망으로 생각하는 일들을 스스로 행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굳이 장려할 것은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그들이 외치는 대로 처녀막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려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아서 그런 걸까. 육체와 정신은 이어져 있으니까,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은 보이지 않는데 몸은 보이는 것이니 소유의 대상이 되나 보다. 잡히지 않는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가 어째서 아랫도리에만 장착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매사가 그렇듯이 '원할 때 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주어진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믿음이 쌓일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원만한 합의에 설득이 필요한 걸까. 동성애는 에이즈에 걸려서 안 된다면서 첫 경험을 성병 걸린 남자와 하였다고 진절머리내는 사람에게 왜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 말하는지 모르겠다. 성병에 걸린 여자는 창녀라면서. 이런 일에 관하여 생각하는 내가 강박증에 걸린 거라고, 이 세상에는 완벽한 일이 없다는, '닳고 닳아 다정한 사람들'은 인생이 롤러코스터와 같으니 너는 추락할 거라고 속삭였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자신들은 이미 밑바닥에 있으니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거였다. 굶주림에 허덕여 한 끼를 먹거나 살아있는 자체에 감사하였던 나는 가진 사람이고 하고 싶을 뿐 한 적도 없는 자수성가를 하여 자기만의 방식밖에 모르는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했다. 본인들과 유사한 사람이야말로 정서를 이해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도 나에 관한 혼자만의 분노를 서로에게 공유하며 내 주변에 붙박이장처럼 오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들은 내가 그러하였다고 했다. 요컨대, 내가 '이러한 사람이라 그랬다' 하는 그들이 한 말에 수긍하며 '너는 그래서 그런 사람이구나, 그럴 수 있다' 라고 하면 내가 자신들을 '그런 사람'으로 취급해온 게 되고, 실수가 아니라 누가 겪어도 허용하기 힘들만 한 잘못을 쫓아다니면서 저지르기에 '그만하고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여 사사건건 지적을 하는 사람'이 되고, 타인에게 사실과 사실을 뒤섞어 말하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면 '평판을 중요시하며 수치를 못 참는 사람'인 데에다, 다른 사람이 선물로 준 것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으면 '집착하는 사람'이고, 다수의 사람을 끌어모으며 사람들 앞에서 나의 것을 훔쳐 전시하고 내게 끊임없이 그러는 자신들의 행동을 내가 거부하며 의사를 밝히면 '남 앞에서 망신을 주는 사람', 내가 자신들에게만 말한 내용과 키워드 및 내외적인 모티브를 이용하여 온갖 곳에 수시로 언급하고 있는 걸 두고 왜 그러는지를 물으면 '이름을 언급한 게 아니니 내가 아니며 익명이니 자신들인지 어떻게 아느냐 무고한 사람을 잡는다'고 하였고, 싫어하는 데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면서 '이유는 내게 있는데 내가 남 탓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웃거나 울고 찡그리는 것, 밥을 먹는 것, 숨을 쉬는 것마저 자신들에게 행하였다며 의미를 부여하는 통에 관심을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실을 예술로써 승화하여 드러낸다 하는 그들이 가진 논리는 처세에 따라 가변적이면서도 계획이 있어 성실하며 참으로 정교하였는데, 헤어졌다는 결과가 같으면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상대와 내가 한 일로 분류하지 않고 마음대로 뒤섞어 스스로 유리하게 하여도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사실이 된다는 것이다. 상상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이라나.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면면을 내게 가져다 붙이거나 나의 행동을 자신들이 한 것으로 하는 일은 괜찮은 일이라 하던 그들과 내가 생각하는 창조의 영역은 다른듯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소설로 써서 출판하는 작가도 있는 마당에 지구 위에 있는 빈번한 일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모르는 채 타인이 모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으며 또한 내가 모르는 관계가 있고 경험이 있으니 편을 형성하는 게 무엇이 나쁜가, 이것은 편이 아니라 연대이다 하는 그런 비겁하고 구차한 일에 나의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서도 곤란할 때가 있다. 나를 역적으로 몰아 집단을 형성하고 이곳저곳에서 과시하며 '친구는 비밀을 밝히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데 내가 겪은 일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는가'라고 하고 있는 그들은 자신이 때때로 공황장애를 겪고 있고 경계선 인격장애에 걸려 자살을 시도하였을 정도로 아프므로 내가 침묵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나의 손과 발 그리고 혓바닥을 자르려고 행할 수도 있는 일인데 어떻게 거부를 하느냐며 자신들이 말하는 건 경험에 따른 철학이고 나눔과 대의를 위함일 뿐인 것을 알아주지 않고 막고자 하여 그대로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고 지금은 변화해서 이런다는 그들이 원하는 건 간단했다. 그들 자신은 '사회에 있어 무엇인 중요한 사람'이니 내가 자신들의 마음에 들기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이 사랑받기 위해 내가 사라져주었으면 좋겠다면서, 나와 바꿔치기를 해대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건 의문이지만 나를 영양제 삼는 것이 생의 원리라는 데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다른 이들의 것에 착안해도 결국 나를 발판으로 누르는 걸 통해 권위로 삼고자 하며 열등감을 없앨 수 있으리라고 하는 저의에는 타인이 잘 되기를 보기가 힘들어 본인이 보기에 괜찮은 내가 침잠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인데, 지나친 행동을 예의와 관용, 헛된 명분을 품격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나도 지나칠 때가 있어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데 도무지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방도가 없다 보니 긍정적으로 보기 위하여 부단히도 노력한 끝에 '머리가 꽃밭'이고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상사'라는 타이틀을 그들로부터 얻었지만, 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상사라는 고위 직책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데에다 배우는 일도 오로지 스스로 부족하고 느리다고 생각하여 간신히 하고 있는 나에게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머리가 꽃밭일 때에는 본인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오지랖 많은 멍청이라고 무어라 하더니 아니게 되어 단호하게 거절을 하면 이성 혹은 감정에 치중한 냉정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들이 스스로 편해지기 위하여 낙인을 찍은 게 나라는 게 흥미로울 때가 있다. 내게는 '뭐든지 해도 괜찮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거나, 흰 눈에 발자국을 남기듯이 흠집을 남기고 싶다, 죽기를 바란다, 사실 너는 그런 거였고 나는 이랬던 거다'하는 선명한 악의를 포함하여 이를 보편화한 도덕으로 치부하려는 내심에는 그들이 말하는 외로움과 자책감이 없었던 덕분이다. 배우의 연기가 언제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연기하면서도 쉴 곳 즈음이 되었는가 보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그들이 원하는 관계를 강요받을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누구도 서로에게 그러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회사도 아닌데 일상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피드백하며 나의 우울의 근원이 되는 일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 일해야 한다니 이건 봉사활동을 넘어서는 일이 아닌가.

타인에게 금전에 연연한다며 약값 대신 자신들에게 돈을 써야 '사랑하는 일, 믿음을 보이는 일, 도리'라며 소중한 사람 한 명을 잃게 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던 그들도 그들이지만, 그걸 또 '우리가 없으면 너는 혼자이리라 수시로 암시하던' 그들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아 두려움과 외로움에 현실을 몇 번을 등져버린 나야말로 질책의 대상이 될 만도 하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들의 명령 아닌 명령에 그리 행동하였던 것은 아니겠는가. 상처를 약점 삼아 도와주려는 듯 굴면서 무엇을 가질 수 있는지 승냥이처럼 구는 사람들 앞에 나는 얼마나 나약하고 마음껏 유도하며 짓밟을 수 있던 대상이었던가 말이다. 나를 무엇으로 보기는 쉽고 이건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알게 된 것은 누군가나 누군가가 하는 어떤 일이, 한 사건이 모든 걸 좌우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책감의 굴레에 빠져 일을 반복하고 함부로 마침표를 찍거나 이미 버린 몸이라고 아무에게나 허락할 수는 없듯이 자신을 소중히 대하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일을 겪을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 나도 나인데, 내가 끝내 고립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마음이 어디에 기인하여 있는지 궁금하지는 않다. 가끔은 내가 그들이 알지 못하기를 바라는 무언가를 눈치채고 만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하는데 나는 무엇도 아닌 나이고, 내가 알아야 할 것만 알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마 이것도 평생을 노력해야 할 것이 뻔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봉사활동을 하기에도 쉽지 않지만, 봉사활동은 그것이 필요한 이에게 해야 할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몫을 하고 있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여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며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만 자주 날이 서고 예민하며 혼자인 게 편한 것은 사색과 더불어 그런 이들의 집적거림이 내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느껴질 때이다. 궁극적인 나의 일은 회사와 분리되어 사회 내에서의 역할과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내게 일어난 일들을 곱씹을 때마다 혀가 마비된 듯 오묘했다. 내 안에 들려오는 소리, 나는 그 소리를 쫓고 있다. 그게 사회 내에서 어떤 형태로 구축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타인이 정의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게 그러하였다 한들 나는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하듯이 타인을 알지 못하고 정의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나를 쏘아붙이는 걸 보면 그들은 무엇이 나이고 미덕인지를 아는가 보다. 계속하여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생각하고 이게 아닌가 하고 답을 내리려다 보면 저게 보이기도 하는 무지한 나로서는 그들의 지혜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전장을 선포하고 행위를 계속하여도 싸울 수 없는 건 내 능력이 그에 못 미치는 덕분이다. 내가 지나간 역사를 되짚는다는 게, 언어로 담을 수 없는 한계에 목메 스러지고 파묻히며 재구성되는 현재에 이르러 사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일인가. 누가 그러고자 하는지에 앞서 나는 나만의 것과 사실을 분류하며 찾아가려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바라볼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회수해 가자면, 나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일을 두고 신호를 보낸들 당시에 깨달을 수 있는 상태였다면 진즉 벗어났을 테니 잘못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타인이 아니라 나의 행동은 내가 좌우할 수 있는 일에 속하여 있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의 일을 모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좋거나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죽음이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생이 끝나리라는 생각에 소중한 걸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일이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이것만큼은 후회되는 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은 일이다. 할 수 있는 한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들이 원하는 한 성심껏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생을 견디는 일에 치중하여 이것조차 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도 못하게 되면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나를 이 땅에 태어나도록 하였던 건 사실이지만, 이곳에 불러서가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성격상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면 조금도 하기를 버거워할 게 분명했다. 잠시 지나갈 때와 묻히는 상황이 오더라도 변하지 않는 일을 염두에 두고 순간을 바라보는 일, 그만큼의 일을 내가 판단할 수 있기를. 때와 시기에 맞추어 비가 내리는 일은 드물다. 어쩌면 드문 게 아니라 그게 필요해서 오는 것이거나 올 때가 되어 오는 것임에도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나를 단비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야 나는 이름과 같은 단비이지만, 언제고 그러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그렇듯이 누군가를 맞이한다는 건 맞이할 수 있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일이다. 나는 때때로 고도의 더움과 추위에 시달리며 살아있는 동안 죽음이 나를 수도 없이 부른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입에 담을 수 없는 나를 바구니에 담아 흘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는 내 존재의 이름을 적확히 부를 수 있는 것은 죽음이리라 여겼다. 고통은 생의 찬가이고 환기의 증명이다. 우리는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므로 오는 두려움에 무언가를 생성하고 남기고자 하지만 코앞의 미래도 알지 못한다. 미지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내게 오늘이 올 줄 알았더라면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내일도, 모레도, 언제라도 그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