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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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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변화 따라잡기 위한 세태 여행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유용한 직업을 선택하기 위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의 ‘편력’의 의미다. ‘탑의 결사’는 일종의 개혁 단체. 빌헬름은 이 단체의 행동원리에 따라 막연한 이상의 추구가 아니라 사회에 유용한 인간이 되기 위한 실제 행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괴테의 노년기 작품으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6)’의 속편 격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9)’는 개인의 창조적 개성은 오로지 유용한 생산과 사회로의 성공적인 통합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빌헬름의 여행은 이를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변하는 세상을 배우고 유익한 기술을 익히기 위한 일종의 ‘유학’ 길에 오른 셈이라고 할까.
‘예술’에서 ‘실용’의 시대로
괴테는 ‘편력시대’에서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그 욕망을 사회적인 요구에 적응시킴으로써 자신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소설의 부제를 ‘체념하는 사람들’이라고 붙임으로써 그 원리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요컨대 거대 산업과 자본이 분업의 원리에 따라 인간들을 개별화·전문화시키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에 전인(全人) 교육의 이상은 접어두고 각자는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관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모든 인물들은 구체적인 직업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다양한 단계의 체념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다시 전체에 참여하는 길임을 보여준다.
시간상으로 볼 때 빌헬름의 편력은 유럽이 본격적인 산업사회로 진입하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기계산업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공사, 신대륙으로의 대규모 이주 등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사회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당대인들의 끈질긴 모색 과정이 빌헬름이라는 인물의 편력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시대는 말한다. 이제 예술의 시대는 끝났다. 운문의 시대에서 산문의 시대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환상에서 실용으로, 격정에서 체념으로, 예술에서 경제로. 시대는 그렇게 요구한다.
‘수업시대’에서 빌헬름이 만난 유랑극단의 소녀 미뇽의 죽음은 ‘시(詩)’의 종말을 의미한다. 비록 무대를 통해 전인적 교양에 도달하려던 연극 지망생이었고 “그대는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를?”이라는 노래 가사에 들어있는 미뇽을 향한 그리움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지만 빌헬름은 이제 긴 여정을 통해 ‘실용’적인 인간으로 변화하려 하는 것이다.
방황 끝에 찾은 자신의 길
빌헬름의 편력은 알프스의 산중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백부의 성, 마카리에의 집, 교육주, 마지오레 호수, 그리고 미국이주단 집회지로 이어진다. 구조적으로 보아 전통적인 장편 소설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이 작품에서는 줄거리 전개의 일관성이 극히 미약하고 그 대신에 새로이 부각되는 사회의 각 부분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빌헬름이 머문 장소라든지 여정 자체는 대부분의 경우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편력의 지리상의 족적을 알 수 있는 실제 지명으로는 마지오레 호수의 경우가 유일하다. 그것은 빌헬름의 편력이 지리상의 이동이라기보다는 급격한 사회 변화 과정에 대한 추적을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오레 호수만 유독 실제 지명으로 나오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인가. 다름 아니라 그곳은 빌헬름이 뒤로 두고 떠나야 했던 마음의 고향, 즉 예술혼의 상징인 미뇽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빌헬름이 그 호수를 찾아간 것은 편력을 떠난 이후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었던 상태에서 벗어나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인생의 분기점에서의 결단의 장소로서 마지오레 호수를 택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 ‘라고 마지오레’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 사이에 걸쳐 있는 기다랗고 좁은 호수로서, 3면이 무성한 숲을 이룬 산기슭이고 그 위로는 알프스 산맥 남부의 봉우리들이 가파르게 솟아 있다. 이 봉우리들이 자연적으로 북풍을 막아주고 있으므로 그 지역은 그 남쪽 경계에 있는 롬바르디아 평원과 함께 온화한 기후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 호수 안에 보로메오 백작의 소유였던 3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벨라 섬이 가장 유명하며, 빌헬름은 이 섬의 정원과 별장에 머무른다. 괴테는 이탈리아에 상당히 오랜 기간 머물렀지만 실제로는 이 섬에 와 보지도 못했고, 그 섬을 그린 그림들과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그 섬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 레몬 향기 그윽한 마지오레 호수의 벨라 섬에서 빌헬름은 미뇽의 세계를 가슴 깊이 묻는다. 미뇽을 낳았던 곳에다가 미뇽을 되돌려 준 것이다. 그리고 오랜 편력의 과정에서 모색해 왔던 자신에게 적합한 미래의 직업을 택한다. 여기서 비로소 외과의사라는 구체적인 직업을 갖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노력하는 인간은 방황한다’
‘수업시대’에서는 고집스럽게 완전한 교양에 집착하고, 친구의 비판대로 ‘어느 구석에 세워놓더라도 싹이 돋아나는 지팡이지만 어느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상한 본성의 소유자’이던 빌헬름은 이제 편력의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영향으로 점차 체념의 지혜를 깨달아 가고 아울러 외과의사로서의 수련에 전념하게 된다.
여기서 체념이라는 말은 포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도래하는 산업사회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한 분야에 정진함으로써 결국 전체에 봉사하겠다는 각성한 인간의 실천적인 삶의 원리이다.
체념이라는 말 속에 이미 전체 상황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려는 방황과 편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한 말과 동일한 맥락으로 보인다. 여기서 방랑이란 물론 단순한 감상의 한 형태가 아니라 내면에 자유를 향한 끈질긴 그리움을 가진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장희창 / 번역가/대한항공 sky 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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