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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대[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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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 속에 담아낸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
채호식(문학평론가)
■ 봉건 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삼대의 모습
염상섭의 <삼대>는 식민지시대를 대표하는 장편 소설의 하나다. 식민지시대 소설 가운데서 <삼대>만큼 1920년대 말의 식민지 조선사회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작품도 그리 많지 않다.
191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한국 사회는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 이 두 규정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굳이 나누어 말하자면 전자가 일본 제국주의라는 식민지 지배 권력의 폭력적 혹은 비폭력적 억압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자본주의적 모순이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규정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소설의 성격이, 또 소설의 평가가 달라진다.
<만세전>이 식민지 지배 현실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면, <삼대>의 가치는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로 이어지는 조씨 가족의 삶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삶의 모습을 그려낸 데 있을 것이다. 물론 이때 자본주의적 삶의 모습이란 그야말로 추악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삼대>는 제목이 말하는 대로 할아버지 조의관에서 손자 조덕기에 이르는 삼대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봉건 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세 세대의 모습이다. 구한말 돈을 벌어 양반을 산 조의관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는 사당 열쇠와 금고 열쇠로 상징된다. 근대로의 이행기에서 조의관은 자신의 시대에 걸맞는 권력 획득 방식을 체득하고 있는 인물이다. 조의관에게서 이 두 가지 가치가 아무런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근대가 진행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은 봉건적 질서가 남아 있는 시대의 특성을 드러낸다.
조의관의 아들 조상훈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이다. 그는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고, 그가 선택한 기독교 사상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이 지닌 사상적 외피다. 조상훈의 타락은 계몽주의가 지닌 한계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시대에 뒤쳐진 지식인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이제 그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조의관의 족보와 돈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조상훈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아버지에 의해 대표되었던 두 가지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결국 아버지와 등을 돌리지만, 계몽주의가 시대적 역할을 다했을 때, 그에게 남는 것은 욕정과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집착뿐이다.
조덕기는 이 두 세대의 부정이다. 그는 아버지가 추구한 가치도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추구한 가치도 믿지 않는다. 조덕기는 아버지가 추구한 것처럼 새로운 사회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현실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나서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유물 가운데 '사당'의 가치는 부정하면서도, '금고'는 부정하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조덕기는 이념적인 가치와 현실적인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혹은 동요하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만큼 현실적인 존재이다. 조덕기가 보이고 있는 이러한 특성을 '중산층 보수주의'라 이름할 수 있다. 중산층 보수주의는 염상섭이 지닌 한계이지만, 달리 보자면 이 때문에 이념적인 가치와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나가며 이 두 세계의 모습을 그에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려낼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삼대>는 식민지시대의 뛰어난 리얼리즘 작품이 될 수 있었다.
■ '돈'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적 가치
조씨 집안의 종적인 관계, 구한말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세대적 특성이 <삼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축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의 축은 병화와 필순, 그리고 홍경애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횡적인 축이다. 이 횡적인 축에서도 조덕기는 균형을 잡아 주는 인물로서 존재하는데, 그 한쪽에 병화가 있다면, 다른 한쪽은 덕기의 현실, 조씨 집안의 장자이자, 유산의 상속자로서의 현실이 있다. 아버지 세대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아버지와 의를 끊고 사는 병화의 존재는 조상훈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덕기의 입장에서 볼 때, 병화는 이미 실패로 돌아간 조상훈의 방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덕기가 병화가 추구하는 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좀더 현실적인 방식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덕기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듯이 그는 '동정자'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 그런 존재다.
<삼대>는 이처럼 덕기를 중심으로 종횡의 축을 따라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당대 현실 속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돈'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다. <삼대>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추악함을 곳곳에서 드러난다. 할아버지 조의관이 죽은 이후 조의관의 유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추악한 모습들이다. 아들을 얻기 위해 조의관이 얻어들인 수원집은 매파 매당집과 결탁하여 조의관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들의 본래 목적이 조의관의 유산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이야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조상훈이 보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추악한 모습이다. 그가 이념적인 가치를 추구하였던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조상훈은 조의관이 죽자 금고를 부수려고도 하고, 또 사기사건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들은 <삼대>가 조덕기의 눈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조덕기라는 인물의 형상에서 염상섭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대>가 더욱 뛰어난 점은 조덕기의 눈으로 그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조덕기가 지닌 가능성 자체도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점은 작가 염상섭의 비관주의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조덕기가 살아가고자 하는 현실적인 방식은 법대를 나와 법조인으로서 사회 변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사회 운동을 뒤에서 돕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식이란 결국은 현실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며, 따라서 부정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현실을 공고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 자기 부정에 기반하여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품
<삼대>는 병화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이 집안의 유산 문제가 일단락되는 데서 끝나고 있다. 그러나 덕기는 이러한 삶에 피로함을 느낀다. 자신의 존재와 힘이 갖고 있는 한계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념적인 측면에서 이건 혹은 현실의 측면에서이건 주체적인 입장을 갖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간신히 현실을 유지해 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덕기가 중간자적 존재로서 이념적인 가치와 현실적인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고, 바로 이 때문에 다른 삶의 방식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또 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리얼리스트로서의 염상섭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또한 덕기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염상섭은 자기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자기 부정에 기반하여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삼대>가 지닌 가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삼대>가 지닌 한계가 있기도 하다. 염상섭이 보여주는 전망이란 부정적인 전망이다. 이 부정적인 전망이란 적어도 이래서는 안된다는 현실 부정에서 나타난다. <삼대>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삼대>에서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인 인물로 나타나는 필순이 아마도 염상섭이 생각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겠지만, 필순이 가지고 있는 가치란 '건실함'에 불과하다. 건실한 삶이란 주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실 그 자체를 변화시키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것이다.
<삼대>에서 보이는 이러한 비관주의의 원인은 <삼대>가 자본주의가 낳은 온갖 폐해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 폐해의 원인에 대해서는 파고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들의 삶을 규율하는 힘, 돈과 애욕, 그리고 이념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가를 <삼대>는 그야말로 냉혹하게 보여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본래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애욕과 돈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선험적인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돈에 대한 욕망과 애욕이 선험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부정되어야 할 것, 부정하고 싶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삼대>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파고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자본주의의 효과만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를 염상섭이 지닌 한계, 그리고 <삼대>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대>가 갖는 문학사적 의미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삼대>가 갖는 한계는 염상섭만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삼대>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의 최대치라고 하여야 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삼대>는 후대의 문학이 넘지 않으면 안 될 한계라고 할 것이다.
<한승희 국어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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