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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스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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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京 植(서울대·영문학 교수)
1. 본문에 대하여
해이스(Thomas Hayes)는 1600년 첫 4절판을 출판했다. 인쇄인은 로버츠(James Roberts)였다. 1619년 이것의 재판인 제2의 4절판이 나왔다. 로버츠의 인쇄소를 인수한 재거드(William Jaggard)가 파비어(Thomas Pavier)를 위해 인쇄한 것이다. 그러나 표지의 간행 기록은 1600년 로버츠가 인쇄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그레그가 밝혀내기 전까지는 이것이 제1의 4절판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해적판이나 다름없는 제2의 4절판을 제1의 4절판으로 잘못 알아 이를 근거로 《베니스의 상인》 텍스트를 낸 1863∼1866년의 케임브리지 셰익스피어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제1의 2절판을 위한 인쇄 원고는 약간의 수정들 가한 제1의 4절판이었다.
2. 소재의 출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은 그 줄거리를 이탈리아인 지오바니 피오렌티노가 수집한 이탈리아 소설집 《일 페코로네(Il Peco-rone)》(1588)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주로 취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한 젊은 베니스의 상인이 벨몬트의 부유한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두 번이나 갔으나 구혼자들이 겪어야 하는 시련을 극복하지 못해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항해에서는 성공을 거둔다. 그런데 세 번째의 항해는 그의 친구가 돈을 마련해 준 덕택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그의 친구는 그 돈을 유대인에게서 차용한 것이고 그 차용조건은 돈을 제때에 못 갚으면 그의 살 1파운드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돈을 제때에 갚을 수 없게 되어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비로소 이를 알고 젊은 베니스인은 부인으로부터 열 배의 돈을 받아 가지고 귀향한다. 유대인은 살 1파운드만을 집요하게 요구하자 그 부인이 피 흘리지 말고 살 1파운드를 베어내라는 지혜를 내어 남편의 친구를 구해 준다. 이 이야기는 반지에 관한 에피소드로 끝난다.
스티픈 고손은 《욕설의 학파》(1579)에서 《유대인》이란 제목의 극을 설명하고 있다. 불(Bull)극장에서 공연된 바 있는 이 극은 <세속적인 선택자들의 욕심과 고리대금업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마음>을 극화시켰다고 했다. 여기서 <세속적인 선택자들의 욕심>은 상자 고르기의 플롯을, <고리대금업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마음>은 1파운드의 살의 플롯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것이 과연 《베니스 상인》의 출처인지 이 극이 현존하지 않아서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이 외에도 1594년 공연된 《베니스의 희극》과 날짜는 불분명하나 토마스 데커가 쓴 《베니스의 유대인》이 《베니스의 상인》의 출처였는지도 모르나 이들도 현존하지 않아 제목 이상의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재판정에서 행해지는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대화에 있어서 셰익스피어는 피오트(Piot) 번역의 《웅변가》(1596)에서 참고한 듯하다. 흡사한 대사가 두 개나 있다. 또 1파운드의 살의 이야기는 안토니 만데이의 《젤라우토(Zelauto)》(1580)에도 들어 있다. 제시카의 이야기는 말로우의 《말타 섬의 유대인》에서 참고한 듯하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와 같은 소재들을 세부 면에 들어가서까지 그대로 이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소재의 줄거리를 땄을 뿐 그 세부적인 내용은 변화도 시키고 가감도 했다. 셰익스피어는 유대인 샤일록에게 보다 강한 복수의 동기를 부여했다. 샤일록은 출처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단순한 악한만은 아니다. 또 네리사를 법관의 조수로 변장시켜 가락지 사건을 중첩시켰다. 또 제시카가 로렌조와 사랑의 도피를 위해 남장하는 것도 셰익스피어의 창작이다.
3. 극의 줄거리
고상하나 가난한 베니스의 젊은이 바사니오는 벨몬트에 사는 큰 재산을 물려받은 아름답고 유덕한 여인 포샤를 성공적으로 청혼하기 위해서 친구 안토니오에게 3천 더커트를 빌려달라고 청한다. 부자이지만 당장 현금이 없는 안토니오는 오직 친구를 위해서 그가 멸시해 온 고리대금업자인 유대인 샤일록에게 차용증서를 써 주고 돈을 빌렸다. 증서의 내용은 기간 내에 못 갚으면 샤일록은 1파운드의 살을 안토니오의 몸의 어느 부분에서나 베어 낸다는 것이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을 기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증서만 받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준다.
바사니오는 친구 그라시아노를 대동하고 벨몬트로 갔다. 포샤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청혼자들로 하여금 세 개의 상자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간직한 상자를 선택하는 자에게 시집가게 되어 있었다. 모로코의 왕과 아라곤의 왕은 각각 금상자와 은상자를 선택하여 실패한다. 바사니오는 '아름다운 포샤의 초상화'가 든 납상자를 선택하여 행복한 남자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베니스로부터 가장 우울한 소식을 듣는다. 안토니오의 배들이 모두 난파당하게 됨으로써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베어 내게 되었다는 것이며 안토니오는 죽기 전에 친구 바사니오를 한 번 보고 싶다는 것이다. 서둘러 결혼식을 올린 바사니오는 베니스로 돌아갔고 포샤와 네리사는 집을 로렌조와 제시카에게 맡기고 각각 젊은 법학 박사와 서기로 변장하고 안토니오를 구하려고 베니스로 간다.
포샤는 결국 판사가 되어 자비를 베풀 것을 샤일록에게 호소하는 한편 원금의 3배를 받으라고 제의한다. 증서대로 이행하겠다는 샤일록의 굳은 결의를 간취하자 포샤는 기독교인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면서 살 1파운드를 안토니오의 몸에서 베어 내라고 한다. 샤일록은 원금의 3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나 판사는 증서대로만 받게 하겠다고 역습으로 나온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겠다는 샤일록에게 판사는 그가 베니스의 선량한 시민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 죄로 그의 재산의 반은 안토니오에게, 나머지 반은 국가에 바치도록 판결했다. 안토니오는 그에게 오기로 된 재산을 조건부로 샤일록에게 내놓았다. 조건부란 샤일록이 기독교인이 될 것과 사망 시 그 재산을 그의 딸과 사위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샤일록은 이를 받아들였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는 판사에게 변호료를 주려고 했으나 판사는 이를 사양하고 다만 바사니오의 결혼반지만을 받겠노라고 했다. 네리사도 그라시아노의 반지를 요구했다. 안토니오의 요청으로 이들은 반지를 내놓았다.
그들은 모두 벨몬트에 모이게 되었다. 포샤와 네리사는 사랑하는 남편들을 곯려 주려고 반지를 어떤 여자에게 주어 버렸는가 따짐으로써 부부싸움을 잠시 벌인 후 두 여인은 반지를 남편들에게 되돌려 주며 법학 박사와 그의 서기는 실은 포샤와 네리사였음을 알린다. 금상첨화격으로 안토니오의 배들도 고스란히 손실없이 돌아와 샤일록 이외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된다.
4. 극의 의미와 문제점
샤일록은 안토니오를 세 가지 점에서 미워한다. ①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②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안토니오의 행위는 그의 고리대금업에 큰 방해가 되기 때문에 ③ 지나치게 자기를 박해하기 때문에.
이 극에는 종교적인 면이 아주 강조되어 있어서 작품 전체가 유대교 대 기독교의 싸움장 같이 돼 있다.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받으며 사는 샤일록은 복수의 기회를 벼르다가 드디어 그 기회를 얻게 되자 칼을 날카롭게 갈게 된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샤일록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가 숙원의 복수를 실현하지 못하고 힘없이 발길을 돌릴 때 우리는 깊은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샤일록은 비극적인 면을 지닌다.
작품의 제목이 되어 있는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인 듯한데 정작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은 안토니오가 아니다.
샤일록, 포샤, 바사니오가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샤일록을 이 극의 주인공으로 본다면, 이 극은 샤일록의 잔인성, 몰인정성, 돈에 대한 지나친 집념 등을 풍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에 대해 자행하고 있는 독선적인 처사, 종교적인 편협심, 인신 공격 등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들 자신이 이를 적어도 샤일록에게는 실현하지 않는다.
제시카는 아버지 샤일록이 나쁜 사람이라고 가출하지만 한편 생각하면 노부를 버리고 그의 돈까지 훔쳐 가지고 젊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은 효도와 양심과 법에 떳떳하지 못하며 오히려 규탄되어져야 할 일들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베니스의 상인》은 악덕에 대한 미덕의 승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자 고르기>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번지르르한 외관이나 낭만적인 편견에 속지 말 것이며 항상 외관과 실제를 혼동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극은 독선적이고 편협한 기독교 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풀이도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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