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삶과 가치 지향성
|
고범서
인간의 삶이 가지고 있는 신비하고도 고귀한 현상의 하나는, 인간은 강력한 삶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되 그저 목숨을 유지하고 연장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가치건 정신적 가치건 무언가 가치를 추구하는 가치 지향성(價値指向性)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한 것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인간은 그것에 못지 않게 가치 선택적(價値選擇的) 존재이다. 심미적 또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지향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다운 고귀한 존재로 만든다. 심미적 또는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지향성을 제외하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가치 지향성은, 우리가 실제로 알고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중요한 관계를 삶에 대해서 가지고 있다. 인간이 성숙되어 감에 따라서 자아 의식(自我意識)이 높아지면 가치 지향성이 삶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 역시 더욱 강해지고 중요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남성이나 여성은 자기가 사랑하는 특정한 상대가 아닌 다른 상대와는 아예 결혼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으며, 또 어떤 경우에는 목숨까지 걸고 결혼을 관철하려고 한다.
결혼 문제를 두고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은 바로 가치관(價値觀)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남성이나 여성이 특정한 상대에게서만 발견하고 느끼는 독자적 생각이나 감정, 곧 정신적 또는 심미적 가치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자아 의식이 발달되고 높아질수록 더욱 심화되고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왜냐 하면, 인간이 성숙해짐에 따라서 가치 선택의 의식 역시 성숙해지고 중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치에는 물질적·본능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물질적 가치 및 쾌락적 가치, 정신적·심미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정신적 가치 및 심미적 가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종교적 가치 등이 있다.
인간의 가치 선택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면 그것은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한 문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가치의 질적 차이, 가치의 위계 질서(位階秩序), 가치들이 주는 충족감의 차이, 그리고 가치 실현을 위한 투신(投身) 정도의 차이 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가치의 질적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서구의 윤리 사상사를 살펴보면, 욕구 또는 욕망은 대체로 물질적 욕구나 본능적 욕구로 생각되었다. 특히, 영국의 공리주의 윤리는 욕구를 물질적·본능적 욕구와 동일시했으며 그것의 충족이 주는 쾌락을 양적(量的)으로만 측정했다. 단지 밀만이 쾌락을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으로 구별했으나, 그는 쾌락의 질적 차이에 대한 이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지 않았다. 정신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이상주의는 물질적·본능적 욕구를 정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배격하고 부정해 버리는 입장을 취했다. 예를 들어, 칸트는 물질적·본능적 욕구를 경향성(傾向性)이라고 하여 부정해 버리는 입장을 취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독일의 철학자 셸러와 하르트만이 현상학(現象學) 및 철학적 심리학의 접근 방법에 의해서 가치 감정(鑑定)과 가치의 질적 구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 심리학이 발달되면서 마스로우나 프롬과 같은 심리학자들이 욕구의 질적 구별을 시도했다.
이러한 이론들이 시사(示唆)해 주는 중요한 진리는, 인간의 욕구에는 물질적 또는 본능적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르고 높은 심리적, 정신적, 종교적 욕구가 있으며, 그러한 욕구들의 충족이 주는 만족감과 그것들의 충족에 의해서 실현되는 가치들 역시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밝혀 준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가치의 위계 질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셸러와 하르트만은 가치가 질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가치들 사이에는 높고 낮은 위계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시 말해서, 물질적 욕구와 본능의 차원에 속하는 쾌락 가치(快樂價値)는 정신적 차원에 속하는 정신 가치(情神價値)보다 낮으며, 종교적 차원에 속하는 종교 가치(宗敎價値)는 정신 가치보다 높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경우 가치의 위계 질서에서 낮은 단계에 속하는 가치라고 해서 부정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높은 가치들이 그것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본능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이미 정신 가치와 종교 가치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가치의 위계 질서에서는, 쾌락 가치는 낮은 차원에 속하며 또한 마땅히 낮은 차원에 머물러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쾌락 가치는 정신 가치와 종교 가치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의 위계 질서에 혼란과 전도(轉倒)의 현상이 생겨서 삶의 질서의 혼란과 전도를 초래하게 된다.
셋째로, 가치의 높고 낮음이 주는 만족감의 심도, 지속성, 포괄성(包括性)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물질적 욕구와 본능적 욕구의 충족감, 다시 말해서 쾌락 가치의 실현이 주는 만족감은 얕고 일시적이고 가변적(可變的)이어서 얼마 되지 않아 권태감을 가져온다. 그것은 또한 배타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사람들의 분열과 대립, 심지어는 적대와 투쟁까지 가져온다.
이와는 달리 정신 가치의 실현은 깊고 지속적인 만족감을 주며, 포괄적이고 일체감을 가져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종교 가치의 실현은 포괄성과 일체감에서 더욱 넓으며, 그것이 주는 만족감은 슬픔과 고통과 죽음까지도 흡수하여 극복할 수 있는 성스럽고 축복된 기쁨을 준다.
끝으로, 가치의 실현을 위한 우리의 헌신 또한 투신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은 물질적 욕구나 본능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물질 가치나 쾌락 가치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물질 가치가 정신 가치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노사(勞使) 문제에서 생존권(生存權)이 문제될 때는 그 권리를 모든 문제에 앞서 존중하고 보장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추구하는 목적이 오직 물질 가치 즉 빵이요 임금이라면, 우리는 삶과 직업에 의욕이 넘쳐서 즐거운 마음으로 투신하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지겨운 고역(苦役)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사실은, 우리가 삶과 직업에서 심미적 혹은 기술적 숙달과 완성을 추구하거나 또는 정신적 가치나 의미를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는, 삶과 직업 속에서 의욕에 넘쳐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고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삶과 직업에서 종교적 가치나 이념을 발견하고 그것들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할 때는, 투신의 강도(强度)가 슬픔이나 고통, 심지어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까지 극복할 수 있다.
사람은 빵이 없이는 살 수가 없지만, 빵이 전부인 삶과 직업 생활은 비참하고 불행하다. 이것은 인간이 물질적 가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지만, 동시에 심미적, 정신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가치 지향적 존재이며, 인간 자신의 행복과 불행, 그리고 넓게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 나라의 흥망이 그의 가치 선택의 질서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정치적 존재(政治的存在) 못지 않게 가치 지향적 존재이며, 가치 지향성은 삶을 위해서 결정적(決定的)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
|
|
|
|
HOM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