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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 눈과 굳어버린 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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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성
음악은 반드시 콘서트 홀에 가야만 들을 수 있고, 그림은 반드시 미술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듣고 보는 것이 그만큼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미술관이나 콘서트홀은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최상만 선택하여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 통하면 동시에 모든 것이 다 된다는 고전적인 일면의 논리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런 논리에 관념적으로 치우치다 보면 주변에 있는 여러 가지 소리나 형체를 그만큼 놓쳐 버리기가 쉬운것이다. 사물 자체를 관념으로 미화시키다가 사물을 실제 그대로 보는 눈을 잃어버린 현대인- 이것은 비단 미술 음악과 같은 예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시카고 대학에서 기압계를 자지고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어 보라는 물리학개론 시험 문제에 대해서 한 학생이 시험지 뒷면에 다음과 같은 답을 썼다.
첫째, 고층 건물 아래에 스톱위치를 든 친구를 세워 두고 자기는 건물 맨꼭대기에 올라가서 흰 손수건을 흔듦과 동시에 기압계를 지상으로 떨어뜨린다. 일정한 무게를 가진 기압계가 공기의 저항을 받으면서 지상에 떨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스톱워치로 재어서 건물의 높이를 잰다.
둘째, 기압계의 길이를 먼저 재고 고층 건물의 제일 아래층부터 꼭대기까지 기압계 길이의 몇갑절인가를 손뼘을 재듯 차곡차곡 세어 나간다.
셋째, 해가 남중할 때 기압계 그림자 길이를 재고, 이때의 고층 건물의 그림자 길이를 동시에 재어 닮은 삼각형의 기하 문제로 건물의 높이를 알아낸다.
넷째, 기압계를 가지고 고층 건물의 관리실에 찾아가서 관리실의 아가씨를 붙들고 몇 달러 값어치에 해당하는 자기의 기압계를 그저 줄 테니 고층 건물의 높이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작성된 네가지의 답안 모두가 기압계의 이름을 갖고 있는 본래의 기능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는데 이러한 발상은 예술의 창조성과 다를 바 없다. 이 학생은 '기압계' 를 무게를 가진 '돌' 과 같은 것으로 혹은 일정한 길이를 가진 '자' 나 '막대기' 같은 것으로, 혹은 일정한 가격을 가진 '돈' 과 같은 것으로 보고 그것을 수단으로 고층 건물의 눞이를 재려 했던 것이다.
하나의 기압계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의 사물로 볼 수 있는 눈-이러한 눈이야말로 애초에는 불확실한 것이라 불안하기까지 하지만 예술 세계에서 바라는 열린 눈이 아닐까.
빨 주 노 초...... 로 시작되는 무지개 색깔을 우리들은 일곱 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정작 일곱 가지인 것은 색깔 '이름' 이지 무지개가 가지고 있는 실제의 색깔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는 무지개 색깔 이름을 알게 되는 그 때부터 무지개가 갖고 있는 보다 많은 색깔을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이다.
무지개에서 볼 수 있는 빨강 부분만 하더라도 이름과 아랑곳없이 여러 단계의 빨강색이 있음을, 우리는 단지 빨강이라는 하나의 이름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아서 이름을 만들기보다 이름을 통해서 보는 것을 한정시켜 버리는 요즘음의 현실을 일찍부터 간파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보는 것' 이야말로 '배우는 것' 이라는 말을 부연하여 이렇게 말했다.
"천장에 얼룩진 무늬는 단순한 얼룩으로 보는 자는 얼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얼룩이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다. 얼룩진 무늬에서 무수한 형상을 찾아내는 자야말로 보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이나 야산의 바위에서 자신의 조각 작품에 필요한 형상을 찾아냈던 영국 조각가 헨리 무어는, 그래선지 달걀을 달걀로 보지 않고 깨뜨려 세운 콜럼버스의 예지에 찬사를 보내지 않았던가. 명화집에서 익힌 풍경만을 주위에서 찾아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그리는 화가가 있을 수 있듯이, 미술관에서 익힌 그림 같은 풍경만을 그린 작품을 벽면에만 걸려는 관람자 또는 있을 수 있는 일 -- 그러나 이들은 이미 명화집에 드러난 하나의 이름이 길들여진 눈만을 지녔기에 그 이상의 설레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깨어 있는 삶은 이렇듯 관념에 굳어 버린 눈에서 벗어나 앞서 든 화가들처럼 보는 것을 보다 자유롭게 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술가가 취할 임무는 모방할 수 있는 모델을 우리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살 수 있는 자유의 예를 보여 줌으로써 우리의 창작성에 호소하는데 있다." 예술가의 임무를 이와 같이 말한 뒤프레의 의견에 우리들이 따를 수 있다면, '보는 것'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사는 것'을 피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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