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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생각해보는 나의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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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선(서울사대부여중 교사)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독서이력서’를 써오라고 한 적이 있다. 자기가 지금까지 인연을 맺어온 책들에 대해서 목록을 작성하는 과정을 통해 ‘책에 대한 끈 하나를 잡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이들은 아우성이었고, 그 와중에서 해온 것들을 보니 딱 두 부류였다. 어느 정도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는 부모들은 좋은 책에 관한 정보를 나누며 책을 사주는 것 같았고, 그 외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에 있는 책을 통틀어 보아도 5권도 채우지 못하는 빈약한 모습이었다. 책을 안읽는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상상외로 아이들은 집에 책이 없었다.
우리 집은 어릴 적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책을 많이 갖추지 못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왜 샀는지는 모르지만 ‘세계교양문화전집’ 열두 권과 이단 세로쓰기가 사람을 질리게 했던 ‘세계명작전집’ 스물 네 권. 아쉽게도 출판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두 전집을 아마도 중학교 때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때는 친구 집에 있는 계몽사(?) 세계명작을 빌리러 부지런하게 드나든 것이 생각난다. 『북유럽 동화집』, 『소공자』, 『소공녀』같은 책들이 아마 그 당시에 빠져든 책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집은 작은 소매점을 했는데, 쌀쌀맞은 그 집 둘째딸(바로 나!)은 늘 손님이 와도 쳐다도 안보고 책만 보고 있다며 흉아닌 흉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손수 나무로 만들어 주신 앉은뱅이 책상에서 꼬박 얼굴을 묻고 책을 읽었다. 그 어린 시절, 가장 부러웠던 것은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과 '어깨동무'를 정기구독하는 친구들이었다.
‘세계교양문화전집’의 열두 권은 내가 교과서를 제외하고 만난 세상사 거의 대부분을 제공해 주었다. 『파브르 곤충기』,『시이튼 동물기』,『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시바이쳐』,『지하의 도시를 찾아서-고고학자 실리이만』, 『플루타르크 영웅전』, 『그리스 로마 신화』, 『비이글호를 찾아서』등 열두 권을 읽고 또 읽고 반복했었다. 순전히 읽을 거리가 없다는 이유에서 여러 번 읽은 이 책, 여기서 나는 세상과 만났다.
시저가 ‘부르투스, 너마저…’하며 죽을 때, 시이튼 동물기에 나오는 회색 곰에, 시바이쳐가 어린 시절 동네 아이와 싸워서 이겼는데 그때 진 흑인 아이가 나도 너처럼 고기를 매일 먹는다면 이길 수 있다는 대목에서, 고대 도시를 발견한 실리이만의 어린 시절에, 올림푸스산에 사는 현란한 신들의 세상에 나는 푹 빠졌었다.
그 책들은 이제 우리 집에 없다. 너무 많이 읽어서 두꺼운 하드 카바가 떨어져 나간 책들이 서너 권, 몇 권은 어디선가 없어졌고, 남은 몇 권을 다락에 두었는데, 친정집이 이사하면서 다 버렸다고 한다.
‘세계명작전집’ 스물네 권짜리는 내게 ‘난해함’으로 다가왔다. 초등학교에서 계몽사에서 나온 명작전집에 빠져 즐거운 책읽기를 했던 나에게 중고등학교 시절의 세계명작은 너무나 어려웠다. 지금 가끔 그 때를 다시 생각한다. 내가 독서력이 약한 아이가 아니었는지. 그 시절에 친구들은 곧잘 세계명작을 읽어치우곤 했었는데, 왜 나는 그 이단 세로쓰기의 책들만 보면 갈피를 못잡았을까. 『북경에서 온 편지』, 『적과 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같은 책은 그 때 놓쳐 버리고 영영 잡지 못한 책들이다. 주변에 책을 권하는 사람들에게서 그 당시에 제목으로만 알았던 책들이 말해질 때 나는 그 사람을 각별하게 쳐다본다. 내가 못한 일을 해낸 사람을 쳐다보는 경이로운 눈으로. 아, 그 당시에 좋아서 몇 번을 읽은 책도 읽긴 했다. 스물 네 권 중 하나, 『헤르만 헤세 단편집』이 그 책이었다. 햇살이 눈부신 언덕 풍경을 어쩜 그렇게도 인상파의 눈길로 묘사를 해놓았는지, 어느 단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부분이 좋아서 여러 번 되풀이 읽은 것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는 왕십리에 있는 무학여고를 나왔는데, 내가 다니던 1980년대 초반기는 학교도서관이 내리막길로 치닫던 시기였다. 일학년 때만 해도 교실 두 개 크기도 넘는 별관 일층이 도서관이었다. 아침 자습이 있던 시절이라 대부분 오전의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먹었고, (선생님들은 밥 먹는 것까지는 봐주셨고, 그 대신 문을 안열어 놓는다는 소리는 들었다)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은 매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나는 일학년때 단짝과 함께 도서관에 드나들었다. 점심 시간이 시작되자 마자 달려가서 서가를 서성이며 책을 뽑아오고, 5교시 예종이 치면 아쉬운 마음으로 교실로 가곤 하던 시절, 읽어야할 고전 명작의 틈바구니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와 같은 책을 읽었다. 그 멋진 도서관이 이삼학년때 쯤인가 아침자습실로 바뀌었다. 전교 등수 상위 삼사십 명을 별도로 관리하는 공간으로. 많이 아쉬웠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우리 집에 있는 그 두 전집 외에 책을 통해서 또 하나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하이틴 로맨스 류의 『핑크 드레스』와 같은 책을 돌려보는 것이 또래의 즐거움이었다. 책상 밑에 그 책을 펴놓고 가슴 뛰며 읽었던 것이 생각난다. 고등학교때는 사춘기를 겪고 있던 우리 오빠 책상에서 ‘사랑의 체험 수기’ 시리즈를 몰래 가져다가 읽었는데, 같은 맥락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주었다. 애무라는 낱말이 전해주는 묘한 느낌을 통해서 난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책들이 나를 성장시켜 준 것같기도 하고, 또 그 책들 때문에 좀더 진지한 책을 못읽은 것같아 아쉽기도 하다. 지금 아이들이 컴퓨터에서 다운 받은 소설을 읽는다고 속상해 하고 있지만, 내 어린 시절과 뭐가 다른가.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다가도 내 청소년기를 이야기해 주며 절제할 것을 설득하는 중이다.
그때 내 주변에서 만난 선생님께서 고전을 그냥 권위적으로 던져주지만 말고 책 읽고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면 조금 친근하게 다가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줄거리를 아는 것 말고, 하다 못해 이 책은 누가 읽어도 어려우니 기죽지 말라는 말부터 이 책을 읽는 방법,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동네 도서관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남산도서관과 정독도서관을 오가기는 했지만 열람실의 기능으로만 생각했지 정작 책을 찾아보러 그 도서관을 찾은 것은 대학 이후였다.
어떤 책을 읽었느냐를 놓고 그 사람 전체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읽은 범위 내에서 생각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읽은 책들을 통해서 나는 성장했다. 지금 이렇게 뒤돌아보니 많이 아쉬운 시절이다.
『작은 아씨들』의 ‘조’를 성장기에 만나서 가슴에 품은 친구가 있다. 삶을 긍정하며 씩씩하게 살고 있는 친구가 가끔 ‘조’ 이야기를 할 때, 어린 시절 읽은 책 한 권이 정말 중요함을 느낀다. 여러분은 누구를 닮고 싶은가?
[서울사대부여중 독서신문 '책과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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