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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1) 심미적 경험과 카타르시스 개념


고대에는 병리학이 정신적 질병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질병의 치료술이 종교의식과 결부되어 환자들은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전이나, 사원, 토템, 샤머니즘적 성소를 찾았다. 오늘날도 그런 유형의 질병치료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또는 그런 시간에 기도를 드리면 실제에서건 상상에서건 병에 차도가 있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낫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좀더 엄밀히 말해 인간이 계몽되면서 해부학적 지식과 과학적 증거의 도움으로 인해 정신의 힘에 대한 신뢰는 많이 떨어지고, 실증적이고 국부적인 힘에 대한 신뢰가 지배적으로 남게 되자 정신적 효능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부분으로 축소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을 대하고 있는 우리는 사실 어떤 패러독스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을 비의적이고 마법적인 정신영역에 적용시킨다는 이 논문의 의도가 완전한 패러독스일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패러독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손치더라도 그 패러독스를 인식하는 것 자체만도 하나의 정신적인 영역을 인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카타르시스의 개념부터 살펴보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문학에서 중심개념이 되어온 예술/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점차 축소되는 것 같다. 문학이 종교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퇴색하면 할수록, 현대 사회에서 종교나 그것의 후기 문화적 기능인 예술이 퇴색하면 할수록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문학이 가졌던 기능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원시제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술이 원시제의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험적으로 많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지만 고전적으로 받아들여왔던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살펴보는 것이 논의의 전개상 바람직하다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종교적 제의가 곧 비극이었다. 비극, 즉 trag-odia (영어 tragedy 독일어 Tragödie)는 숫염소 또는 산양(trag)과 노래(odia)가 합성된 말로 숫염소를 잡아놓고 노래를 한다, 즉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었다. 이는 고대 중국에서 아름다움(美)의 근원을 제물인 양(美=羊+大)의 크기에 둔 것과 유사한 제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빌어 논의하겠다. 다만 제의(비극)에서는 어떤 탄원이 있었고, 그 탄원이 곧 카타르시스의 실체였다는 사실에는 개연성이 있다. 이런 현상은 샤머니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무당은 조상신을 불러오고 그 조상이 願을 이루게 함으로써 (내 묘지를 잘 써달라던가, 누구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던가, 어떤 怨을 풀어달라던가) 굿을 청한 사람의 (마음의) 병을 낫게 하는 주술의 과정을 실천한다. 플라톤이 예술가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바 있고, 국가론을 쓴 동기를 찾은 것도 이런 주술적 상황을 어떻게 합리적인 상황으로 이행시킬 것인가 하는 데서 출발했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비극은 샤머니즘과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영지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정신현상을 되도록 이성적인 범위에 축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문학의 종교적 기능을 축소함으로써 문학의 영역을 가능하게 했다(poietike란 말이 시작법 또는 시학이라는 뜻에서도 볼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만든 장본인이다. 『시학』의 제6장에 보면 카타르시스에 대한 간결한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이다. 물론 천병희의 번역에는 단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만 번역자 또한 이를 의식해서 “학자들간에 ‘감정의 정화’를 의미하는 윤리적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하는 의학적 견해가 있다”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a)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은 이들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
b)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은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한다.
c)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묘사를 통해서 이러한 사건의 명징화를 성취한다.

이 세 가지 해석은 물론 그리스어를 번역한 데서 오는 문제이긴 하지만 카타르시스 개념과 문학/예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a)의 번역문에 나오는 ‘이들 감정’이란 불쌍하다, 끔찍하다는 뜻의 연민과 공포를 말하고, b)의 번역문에 나오는 ‘이러한 감정’은 연민이나 공포 자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순화되지 못한 억압된 감정영역 전반을 뜻한다. 그래서 a)의 해석은 정화이론(淨化理論) purgation으로 b)의 해석은 조정이론(調整理論) purification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들 해석 모두가 비슷하고 영역한 언어도 비슷해서 그 자체로는 변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들을 원용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정화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음악의 카타르시스를 다루고 있는 『정치학』의 대목을 원용한다. 정화이론은 카타르시스를 재귀적 과정으로 보고 있다. 즉,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킨 뒤에 관객 자신의 연민과 공포를 다시 몰아낸다는 뜻이다. 플라톤은 비극이 연민을 환기하여 관객들을 겁쟁이로 만든다고 『국가론』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나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플라톤의 생각을 반박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a)의 해석에는 몰아내고 정화하기 위해서 격정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 들어 있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과거에서도 무시무시한 모습(그로테스크)이나 일그러진 얼굴, 정신 분열적인 현실묘사가 예술에서 가능한 것은 역으로 이러한 예술의 정화기능을 이용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고트프리트 벤의 ⌈아름다운 청춘 Schöne Jugend⌋같은 시에 나오는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은 독자/환자에게 현재 나의 일그러진 모습이 저것보다는 낫구나 하는 안도감을 몰고 올 수 있다. 즉, 추하고 일그러진 모습이 독자의 추하고 일그러진 의식을 몰아냈다는 뜻이다. 이런 정화라는 개념은 이미 고대의학에서 쓴 동류요법(同類療法)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의사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열병은 열기로 다스리고, 한기는 한기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의 요법이다. 프로이트 또한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였다. 즉, 그는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최면 하에 회상함으로써 신경증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 요법을 “정화요법”이라 부른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류요법에 의거한 정화이론에 대한 b)의 반대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치게 플라톤에 종속시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 비판적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 감정과 격정이 위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감정이 이성 못지 않게 인간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감정은 그 자체로서 해로운 것이 아니며, 다만 적절히 제어되지 못하였을 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이나 격정은 적절히 통제되고 조정되어야 (즉, 배설돼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조정이론이다. 그래서 문제의 대목을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연민과 공포가 적절히 조정되지 않았을 때 해로울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론의 장점은 감정을 몰아내는 것보다는 적절한 연민과 적절한 공포가 유익하다고 본 점이라 할 수 있다. 정화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근거한다면, 이 조정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미덕 Tugend⌋ 제7장에서 열거한 다양한 미덕들의 중용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격분과 무감각 사이의 적절한 감정이 ‘건강한 감정’이라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카타르시스란 일종의 정신적 길들이기가 될 수 있다. b)의 이론을 정리하면, 비극을 관람하면서 관람객은 ‘연민과 공포’같은 감정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정화이론이나 조정이론이나 플라톤에 대한 대답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정화이론이 플라톤이 싫어한 (동시에 인정한) 플라톤적 감정관에 의존하고 있음에 반해서 조정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감정관에 의존하고 있다. 오늘날 치료에서 감정치료와 인지치료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화이론과 조정이론이라는 두 이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오늘날 의학이나 분석과학에서 사용하는 치료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라 할 수 있다.

c)의 이론은 치료의 관점에서는 중요하지 않지만 문학 이론적으로 우리의 논의에 필수적인 만큼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교훈적 문학일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이론과는 상반되는데 바로크 시대나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듯이 이 이론은 문학을 배설이나 카타르시스로 보지 않는다. 요컨데 이 이론은 문학을 통해 악인들의 참혹한 운명으로부터 그들이 보여주는 악을 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공자나 주자의 가르침과도 매우 흡사하며 이것은 예술과 문학의 종교적 기원보다는 합리적 기원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기실 우리 동양에서는 카타르시스 기능이 비극적인 면에서보다는 희극적인 면에서 더욱 강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유교와 불교가 공존했던 것을 보면 어떤 특정한 문학 형식만이 유일한 치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나는 문학의 종교적 기원을 강조하고, 인간정신에서 그런 종교적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병을 치유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식은 가시적이고 선형적이지만, 삶은 마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c)와 같은 제3의 해석이 오늘날 문학이론이나 예술이론에서 상론되고 있는 바, 그것을 우리는 명징이론(明澄理論) clarification이라 칭한다. 이 이론은 앞의 두 이론이 모두 관중심리학 내지는 독자심리학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시에 대해 거론했지, 심리학에 대한 사변을 펼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문제의 해석을 시/문학이론으로 파악하려 한다는 점은 오늘 우리가 대하는 문예학의 행위와 같다는 점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이 번역은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사건의 카타르시스를 주장하고 있어 도전적 해석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경험을 일종의 통찰 경험으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즉, 비극/문학/예술 경험은 실생활에서 경험했다면 고통스러웠을 터이나 연극/문학/예술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고, 이 즐거움은 깨달음, 즉 인식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그 인식은 사건진행과 구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발견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비극의 기능은 명징화를 뜻하고 이것이 카타르시스, 즉 명징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현대의 미학/문학이론을 그대로 고전에 소급해서 적용시켰다는 혐의가 짙다. 사실 이런 이론은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보다는 아이스테시스 aisthesis 기능을 강조하고, 또한 현대로 오면서 예술/문학이 점점 더 성찰의 성격을 띠면서 생긴 견해라 보면 옳을 것이다. 독서치료를 인식의 구조를 바꾸어 재인식시킴으로써 감정의 평정을 얻게 하는 방편으로 본다면 실제로 이 이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을 감정/성찰이라는 이분법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 이들 이론들은 독자/관람자/청자/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이것이 어떤 문학/예술 수단을 독자/환자에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임상학적 관심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다만 현대의 문학이론이나 문학은 그런 기능을 점차 포기하고 메타적 영역으로 넘어 갔기 때문에 조형적인 tektonisch 문학연구에는 실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문학치료의 과정을 통해 문학이 과연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