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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2) 심미적 이해와 치료적 전략


그렇다면 과연 이런 심미적-문학적 이해와 치료적 전략은 원리적으로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을까. 우선 우리는 위와 같은 과정을 ‘사건’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사건은 경험에 개인적 의미가 부여되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문학적,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은 거기다가 (집단)개인적 의미를 부여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문학이 읽히지 않든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흥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노이로제 환자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스쳐지나갈 수 있는 곳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망상이나 의심, 질투, 강박, 편집, 히스테리는 곧 그 환자가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환영 Illusion을 보고 있기 때문에, 즉 그 사건 자체보다는 거기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엘리어트도 노이로제 환자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조합은 치료적 조합과 같은 형식을 갖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오인 méconnaissance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프로이트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같은 철학자들부터 내려오는 인지의 한계를 두고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어떤 특정한 성장기에 상처를 받으면 무의식은 고착되어 어떤 증상을 형성하고 항상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인지하게 하는 이른바 고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분열증이나 노이로제 환자들은 바로 이런 새로운 결합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나이브한 독자도 새로운 의미를 잘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문학적 기법과 치료적 전략이 같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독서의 심리적 과정과 치료는 근본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꿈이나 무의식, 그리고 문학텍스트가 소원이나 사고, 불안을 상징형식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임신한 어떤 (미국)처녀가 사리(인도여성의 전통적인 옷)를 걸치고 갠지스 강을 따라 걸어가다가 생각에 잠겨 물결을 바라보는 꿈이 있다. 꿈의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한 정신분석적 대화에서 그녀는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였던 『어머니 인도 Mother India』라는 책을 생각해 냈다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믿는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모세 이야기를 전했다. 이 물에 흘려 보낸 모세는 나중에 파라오의 딸, 공주에게 입양되었다. 그 처녀의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급기야 성경의 모세 이야기와 갠지스의 강의 조합으로 결부되어, 지금 아이를 낳아야 할지 아니면 아이를 버려야 할지가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심리적인 무의식은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문학의 진단적 기능과 독자의 문학선택/기대지평이 공유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문예학과 문학치료는 어떤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 그것은 결국 문학적 기교와 심리적 전략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가설로 연결된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이저의 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이저는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레서 Lesser가 주장하는 바, “동질적인 경험으로 독자가 일상의 짐에서 벗어난다는 소박한 원리”를 비판하고 있다.

레서가 주장하듯이 만약에 문학적 텍스트가 독자에게 일상적 경험의 짐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옳다면 그런 과정이 어떻게 성립이 되는지 분석해 볼 가치가 있다. 독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의미가 그 자체조건에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조건들에 귀속될 때에만 그 독자에게는 지금까지의 의식에서는 배제되어 왔던 자기인격의 무의식층이 드러나게 된다.
Gerade wenn es richtig ist, wie Lesser behauptet, daß der literarische Text seinem Leser eine Entlastung vom Druck seiner normalen Erfahrungssituation bringt, wodurch die Wiederkehr des Verdrängten allererst möglich wird, gilt es, das Zustandekommen eines solchen Geschehens analysierbar zu machen. Erst wenn der Leser im Verlauf der Lektüre den Sinn des Textes nicht ausschließlich zu eigenen Bedingungen (analogizing), sondern vielmehr zu fremden hervorbringen muß, wird in ihm etwas formuliert, das eine Schicht seiner Person ins Licht bringt, die bisher seiner Bewußtheit entzogen war.


레서는 문학치료나 정신분석학에서 보통 동류요법 ISO-Prinzip이라고 부르는 원리와 같은 것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저는 출발점에서는 동일시나 동류요법이 치료적 원리로서 부동의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독자/환자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무의식을 표출하게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우선 동류요법에 대해서 ― 필자의 앞선 글 이에 대해서는 졸고, 문학치료와 문학적 경험, 독일어문학 제 10집 1999, 267-300을 참고하라. 에서도 서술을 했지만 ― 리디의 글을 논거로 살펴보자. 동류요법은 원래 음악이나 시와 같이 리듬이 있는 감성적 예술 장르에서 출발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일 경우,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나 ⌈목마와 숙녀⌋, 패티 김의 노래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페르귄트⌋, 영화 ⌈글루미 선데이⌋, 정호승 시인의 ⌈그리운 부석사⌋등과 같은 슬프고 우울한 시나 노래들이 적당하다. 리디의 주장은 결국은 이런 시나 음악들이 끝에 가서는 절망이나 우울감 대신에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준다고 주장한다. 읽고 쓰면서 그리고 해석하고 암송하고 말하면서 이런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나만 우울한 것이 아니구나,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울했거나 현재도 우울한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감정을 유도함으로써 외로움과 우울함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치료적으로 상당히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치료자가 이런 우울증을 키워가면서 환자가 자살경향성을 재촉하거나 인생의 회의를 느낄 수도 있다고 부작용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문학자체는 수단일 뿐이며 상담자가 그것을 조율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우마다 달라지는 상담자의 역할을 문학(책)이 대신할 수 없으므로 독서에 관한 이론은 있을 수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한다. 말하자면 독서/글쓰기를 통한 치료의 방법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보편적인 학문의 원리로 ― 응용과학이 아니라 순수과학으로서 ― 세울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에 치료학자들은 곧잘 집단치료와 집단 상담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동류의 감정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인즉슨 노이로제가 외부와 고립되면서 발생되는 심리기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담자가 존재하지 않는 독서를 통해서는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저의 이론은 이에 대한 심도 높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낯선 조건’을 통해서 무의식층이 드러난다는 이저의 주장은 곧 집단치료에서 타자의 역할을 문학 속에서 이질적 화자가 대신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물론 이것은 미학적 현대 이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산문에는 화자가 있어서 그 화자가 독자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타자의 심급이 가능하지만, 정서를 주로 다루는 음악이나 시에서는 다른 차원의 조절자가 있어야 한다.

노이로제 환자는 프로이트-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소유자 내지는 상상 단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린 시절 어떤 상처에 의해서 그런 우울증을 키워온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치료는 곧 그가 자신의 ‘감옥’에서 나와 다른 사람의 행위와 같은 사회성을 띤 어떤 것을 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럴 때 정서적 장애를 경감시키고 치료를 촉진하며, 인생의 불행을 딛고 일어서 삶의 의미(철학)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자기 감정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적극적인 매체라 볼 수 있다. 리디는 환자/독자가 문학을 통하여 어떻게 자기 감정을 자유롭게 해방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작가와 연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환자들이 분석가나 상담자를 찾아와서 대화의 상대자(du, Sie, you)가 아닌 엉뚱한 인물 er나 he, 또는 sie, she로 보는 경우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즉, 환자는 의사와 상담할 때 그를 어릴 때의 중요한 아버지나 어머니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이된 상태에서는 자신을 감출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즉 의식적으로 판단해서 자기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인 자기를 보여줄 수 있다. 라캉은 이를 “꽉 찬 말 la parole plaine”과 “텅 빈 말 la parole vide”로 구분한다. 전자는 무의식이 자신한테 하는 말이며, 후자는 건성으로, 또는 혼자 떠드는 말이다. 독서과정에서 이 “텅 빈 말”은 먼저 동질성(자기의 문제와 같다)을 부여할 수 있는 범주다. 이 점에 대하여 이저도 또한 홀랜드와 레서가 주장하는 동류요법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질성이 아닌 이질성(자기가 아니다)이 있어야 환자는 자기 얘기를 편안히 할 수 있는 동기를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홀랜드가 주장하는 독서심리학은 그에게 단순한 심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적 작품에 체현된 심리적 과정은 어느 정도 독자의 심리적 과정이 된다. 문학작품이라는 ‘바깥’에 있는 것이 마치 ‘여기’ 너의 마음 속에 또는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The mental process embodied in the literary work somehow becomes a process inside its audience. What is ‘out there’ in the literary work feels as though it is ‘in here’, in your mind or mine.

그러나 이런 분석은 같은 것에서 같은 것(Gleiches in Gleichem)을 인식한다는 플라톤의 사상의 전통이지 정신분석학의 발견은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 속의 이미지나 상징들이 단순한 심리의 반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설령 문학적 텍스트가 자기 문제와 같다는 식의 동질성과 충동환상을 의식으로 떠올릴 힘을 부여한다하더라도 그것은 독자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허용하는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통찰은 이저에 따르면 일치 Korrespondenz가 아니라 차별 Differenz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차별이 바로 독자의 반동을 형성하고, 이런 반동을 통해 억압된 것이 상기되고, 자기 의식에 대한 형상으로 바뀐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이저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에서 가져온다. 『햄릿』 제2막에서는 선왕의 서거 후 늘 우울해 있던 햄릿이 망령과 대화한 후 더욱 우울해짐을 묘사하고 있다. 햄릿은 자신의 결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미친 척하기 시작하고, 놀란 왕은 신하들에게 햄릿을 감시하도록 한다. 한편 고민에 빠진 햄릿은 망령(선왕)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현재 왕의 살인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연극을 기획한다. 무엇이든 아무리 똑같이 연기한다지만 약간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햄릿이 복수를 미룬 것에 대한 죄의식은 극중 극에 등장하는 헤쿠바의 고통(죄의식)과 달랐기 때문에 생겼으며, 클로디어스 또한 자기가 한 살인행위와 이 극중 극의 살인장면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느끼게 된 것이다. 즉, ⌈곤자고의 살인⌋에 나오는 군주는 그의 동생이 아니라 그의 조카에 의해 살인되기 때문이다. 이런 두 인물의 두 가지 경우에서 보이는 차이가 이들을 생각으로 몰아간 것이다. 클로디어스가 당황한 것은 자기의 문제가 극의 문제와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기 행위와 극중 극의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더욱 당황하게 된다. 햄릿이 이렇게 다르게 각색한 것은 바로 클로디어스 왕이 이 순간 자기가 범죄한 순간을 정확히 회상해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클로디어스에게서의 독서심리는 동일시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 동일한 상황에서 감수해야할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서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런 심미적 차이는 치료적 관점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치료적 관점에서는 심미적 이해조건보다는 환자의 심리적 장벽을 깨는 감정적 요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독서의 과정은 심미적 이해와 충동환상이라는 모순된 양가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이해의 선결조건인 상징적 이해는 정신분석학적으로나 치료에서 진부한 것 Klischee으로 전이되어 버린다. 프로이트는 이 점에 대해 그의 정신분석학 강의에서 상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꿈에서는 쾌와 불쾌에 대한 소원, 불안 등이 단순한 상징으로 체현되기 때문에 그것이 사고의 산물인 문학/백일몽에서는 단순하고 시시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치료에서는 금제(禁制)가 클수록 소원은 더욱 큰 것이라는 보상의 메커니즘에 의해서 사태를 파악하지 심미적 관점에서 그 상징의 가치에 대해 논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을 위해서 문예학자가 필요 없고 정신분석학자만 존재해도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