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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3) 치료적 관점에서의 문학해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문학치료를 문예학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는 이유는 치료상태로 유도하는 도입과정에 있어서 문학은 매우 흥미로운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마법’이란 말로서 설명되는 치료의 과정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것과 구체적인 텍스트에서 동질성과 이질성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어떻게 치료에 응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래의 여러 문학적 텍스트를 중심으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1. 변화: 브레히트의 시
브레히트는 보통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로 분류되는데 그의 이원효과나 낯선 접근은 상당히 유발적이다. 그가 문학을 통하여 사회주의 이념이나 아방가르드 정신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사회를 교육하고 치유하려는 목적이었던 만큼 치료적 효과를 기대해볼 만하다.

<재회>
코이너 씨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어떤 남자가 그를 만나자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코이너씨는 “오!”하고 말하고는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Das Wiedersehen
Ein Mann, der Herrn K. lange nicht gesehen hatte, begrüßte ihn mit den Worten: ,Sie haben sich gar nicht verändert. ,Oh!’ sagte Herr K. und erbleichte.

이 텍스트를 두고 힐만 Hillmann은 의견이 구구하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다르냐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Anprangerung der Fremdheit der Menschen untereinander”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간 “코이너 씨가 높은 자리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고, 코이너 씨가 “긍정적으로 변하고자 했으나 그의 노력이 허사가 된 것을 알고는 실망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코이너 씨가 성격이 좋지 않은 것은 출신이 하층이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어느 정도 좋아졌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니”하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코이너 씨가 아마도 좋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어서 이것을 감추려 했는데 드러나자 창백해졌다”고 말했으며, 극단적인 경우는 “코이너 씨가 새로운 범죄를 저지르고 성형수술을 하고 있었는데 형사가 그를 찾았을 때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필자의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은 오히려 “당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구려” 하는 말이 듣기 좋은 소리인데 왜 코이너씨가 창백해져야만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이들이 주류였다. 이것은 아마 “세한연후지 송백후조야(歲寒然後知 松栢後凋也)”라는 동양사상의 영향인 듯 하다.


이것만 봐도 같은 문학 텍스트를 두고 얼마나 다른 소원과 갈등을 투사하는지, 그리고 텍스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각 개인마다 독서행위 Leseakt가 다른 것은 문학작품이 말한 것 das Gesagte만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것 das Ungesagte, 탈락된 것 das Weggelassene을 말하고 그것을 넘어 바로 부정된 것을 통해 독자가 자기의 무의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브레히트의 텍스트는 노이로제 환자의 진단에 매우 좋은 본보기이다. 어떤 분리불안의 노이로제 환자를 생각해보자. 아니면 우울증 환자나 강한 나르시시즘을 생각해보자. 과연 그는 과거의 어느 날에 비해 지금 바뀌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텍스트를 다시 한번 위에서 언급한 이저의 독서과정에 대입해볼 수 있다. 그러면 환자의 동일시욕구가 단순히 텍스트가 그의 심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환자가 바뀐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다른 해석 때문에 그는 한 번 더 자신의 모습, 무의식을 드러낼 수 있다. 어떤 과학자는 “종교가 번창하려면 신학이 부재해야 한다. 너무 지나친 신학 속에서 종교는 죽어간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위의 독서과정과 독서치료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독자/환자가 저항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를 더욱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리디 Jack J. Leedy 의 말에 의하면 작품이 지나치게 어려우면 (이 경우 자기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상적인 독자나 치료를 의뢰한 환자를 오히려 좌절시킬 수 있다. 일정한 리듬을 가진 적당한 시가 치료의 효과가 훨씬 크다고 주장한다. 리디는 그의 모국어권에서 밀턴이나 셰익스피어보다는 롱펠로우 Longfellow나 홈즈 Holmes의 작품이 훨씬 효과가 좋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런 작품이 현실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 치료에 이런 동류의 서정시들이나 영화, 작품이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점은 인정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위에 제시한 브레히트의 텍스트와 같은 심미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은 정도가 심한 노이로제 환자의 경우에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산문(시) 또한 이질성에서 비로소 자신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메커니즘을 통해 그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상담자나 치료자가 그것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더없이 좋은 치료약이 될 수 있다.

2. 상처: 엔첸스베르거의 시
브레히트의 시에서 보듯 한 큰 파문(波紋)이 없이, 나지막한 소리로 우리의 정서를 울릴 수 있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문학작품이 아래에 있는 엔첸스베르거의 시일 것이다.

<잠들게>

오늘밤 나를 기타 속에 잠들게 해 주세요
경이로운 밤의 기타 속에서
나를 쉬게 해 주세요
부서진 나무 속에서
내 두 손을 잠들게 해주세요
그녀의 기타줄 위에서
나의 경이로운 손들을
잠들게 해 주세요
그 달콤한 나무를
나의 기타 줄을
그 밤을
잊혀진 코드 위에 쉬게 해 주시고
나의 부서진 두 손을
잠들게 해 주세요
경이로운 나무 속
달콤한 기타 줄 위에서

Schläferung
Laß mich heute Nacht in der Gitarre schlafen
in der verwunderten Gitarre der Nacht
laß mich ruhn
im zerbrochenen Holz
laß meine Hände schlafen
auf ihren Saiten
meine verwunderten Hände
laß schlafen
das süße Holz
laß meine Saiten
laß die Nacht
auf den vergessenen Griffen ruhn
meine zerbrochenen Hände
laß schlafen
auf den süßen Saiten
im verwunderten Holz Zit. nach Hilarion Petzold, Ilse Orth (Hrsg.), Poesie und Therapie, S. 206-206.
(H.M. Enzensberger)

이 시는 일견 혼란스럽다. 개개의 이미지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의 독서과정 만큼이나 이 시는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장가를 떠올리게 하는 부드럽고 유동적인 리듬이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시의 의미와 해석은 부수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기억 속의 그림자나 평온한 분위기만 살아난다. 이런 분위기는 두어첩용으로 계속되는 “laß mich 나를 내버려 두세요, 나를 ...하게 그냥 두세요”라는 말에서 비롯된다. 리듬은 반복에서 시작되고 반복은 일상을 의미하나 경우에 따라서는 노이로제 환자의 강박적 반복충동과도 연결되므로, 독자가/환자가 이 텍스트에서 동질성을 찾기는 매우 쉽다. 이 표현은 곧장 종결 시구 “경이로운 verwunderten”으로 메아리를 남기면서 끝나고, 특히 마지막에 ”Holz(나무)“가 남성운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다소 산뜻한 결말을 짓고 있다.


이 시가 어떤 상처받은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텍스트가 반대급부의 현실영역들을 잘 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양한 시적 기교, 즉 “밤의 기타”와 같은 소유격 메타포와 형용사의 반복(“부서진 나무”/“부서진 손”, “경이로운 손”/“경이로운 나무”/“경이로운 기타”, “달콤한 나무”/“달콤한 기타줄”, “그녀의 기타줄”/“나의 기타줄”), 교차적 배어법(„Nacht in der Gitarre”/„in der verwunderten Gitarre der Nacht”, „laß meine Hände schlafen”/„meine verwunderten Hände“/„laß schlafen”) 두어첩용, 대구법과 공유구문, 개개 단어들 내지는 문장의 문법적 이중관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사용된 어휘는 매우 제한적이다. 15개의 명사들 중에서 6개의 명사와 8개의 형용사가 단지 4개의 다양한 단어들의 반복으로 그려져 있다. 6개의 술어들은 “잠자다”와 “쉬다”라는 두 가지의 동작으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이런 반복적 조작은 바로 인간의 무의식 깊숙이 박혀있는 원초적 상흔을 모사하고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특히 신경증 환자는) 모태로부터 분리되면서 깊은 상처를 받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강박적 반복충동을 갖는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엄마의 부재를 견디려는 아이가 실꾸리를 던졌다 당겼다 하는 “fort - da” 놀이를 하면서 본능의 포기를 대신할만한 놀이를 고안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반복장치는 문예학에서도 곧 심리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반복된다면 그것은 지겨운 게임이 되거나 어린 아이 수준의 게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엔첸스베르거의 이 텍스트는 강박적 반복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이 시에서 또한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성이 무의식을 확보해줄 수 있다는 이저의 논리를 예증할 수 있다. 시적 자아는 인간, 예술(“기타”)과 자연(“나무”, “밤”)의 조화, 즉 내면의 세계와 외부세계 사이의 조화를 동경하고 있음을 그려내고 있다. 시적 자아는 이러한 화해와 안식을 소원하고 있으나 그것이 이미 현실에서는 실패했다고 말하고 있다. “부러진 나무”와 “부러진 손”으로 인해 현실은 파괴되어 있다. 그저 “파괴된 현재”속에서 “행복한 과거”만이 인식될 뿐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시인 기형도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기형도 전집,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99), 89쪽.
라고 노래하듯이 편안한 마음을 부여한다. 동시에 독자와는 이질적인 경험이 독자에게 고백할 힘을 부여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이런 글은 문학 밖의 현실에서는 실제로(또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가상의 것을 실제로 있게 하고, 이러한 긴장감을 자신과 비교하여서 성찰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시가 숨기고 있는 주제일 수도 있다. 詩 속에서 자신의 깨어짐(단절)을 표현하는 동안 메타영역, 즉 미학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억압된 것이 해방될 수 있다. 그런 단절은 현존하고 있으나 독서의 (심미감의) 지평에서는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 가능하다. 시적 언어의 ‘마적인’ 특성들이란 깨어짐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그런 깨어짐(해체)을 통해 위안을 얻게 해 준다. 이런 관점에서 「잠들게」라는 시는 의미해석과 시적 텍스트의 형식과 표현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내용뿐만 아니라 저자의 심리적 구조까지도 서로 관련지어서 관찰해 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가 될 수 있다.

3. 자화상: 카프카의 일기
다음으로 우리는 문학적 자화상에 대한 예를 들고자 한다. 일기 같은 이런 형식은 우선 화자의 개입이 없는 직접적 서술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치료 텍스트로서 더욱 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서술에 대한 실례로서 1911년 11월 8일 자 카프카의 일기내용을 들어보겠다.

내가 박사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나는 비서 소녀를 보았는데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을 분명하게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흩어져 일정하게 머리 앞으로 흩어져 내린 헤어스타일 안으로 보이는 지나칠 정도로 삐죽이 나온 코의 모습이란 정말 종잡을 수가 없게 했다. 극작품을 읽느라고 정신이 나간 듯한 소녀를 보면서, 마치 내가 새끼손가락으로 그녀의 치마를 만진 것보다 더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당황했다.

이 일기 텍스트에서 우리는 한눈에 특이한 상황묘사, 더 정확히 말해 특이한 인물관찰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묘사에는 화자가 비서 소녀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데 대한 은근한 슬픔이 녹아 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자 스스로 만들어내는 방해 구조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화자가 소녀를 바라보는 태도나 소녀를 그려내는 방법이 일체의 내적인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억압되었기 때문에 초상화 속의 얼굴은 오히려 입체적인 모습을 띨 수 있게 되었고, 결말 부분의 명백한 느낌조차도 딜레마를 자초할 뿐이다. 냉혹한 시선에 대한 대체물로서 미소나 대화, 대꾸하는 눈빛이 아니라, 손을 갖다 대는 행위를 생각한 것은 아이러니이다. 더구나 그런 접촉을 하였을 경우에 예기되는 회답은 소녀로부터 나와야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는 하나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한 단초만 제공하고 있을 뿐이며, 결국 이 초상화는 소녀에 대한 초상이 아니라 자기의 초상이다.


독서심리는 ― 이저의 독서행위에서처럼 ― 마치 카프카가 그 여인의 모습에 자신을 비쳐보듯 자기의 모습을 그 이야기에 비쳐 성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손가락과 치마는 성적인 상징으로 보이는 만큼 화자의 정신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의식은 실수나 꿈에서 타협한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꿈의 작업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신의 억눌린 무의식이 그 소녀의 (자기 나르시시즘의 연상) 모습으로 응축, 치환되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독자 또한 이 글에서 어떻게 자신이 투영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난 독자도 위에서 제시한 브레히트의 독자만큼이나 그 반응이 다양할 수 있다. 자신의 억압이 이 글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이런 상황의 동질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화자의 그 ‘낯선’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 이저의 ― 동시에 필자의 ― 독서심리학적 견해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치료사들은 단지 이 상황에서 독자/환자가 어떤 마법으로 치유됨을 주장하지 인식론적으로 규명하려들지 않는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런 상황은 어떤 사람이라도 겪을 수 있는 상황인데 노이로제가 심한 사람일수록 이 ‘낯선’ 상황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상황을 문학 속에서 ‘나 이외에도 이런 (심한) 사람이 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통합적인 자화상을 가질 수 있다.

4. 자연/본성: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자연이라는 주제만큼 자주 시의 대상이 된 것도 없다. 이것은 비단 순수문학에서뿐만 아니라 통속문학이나 심지어 출판되지 않은 개인적인 글에서도 그렇다. 외적인 자연은 결국 소망, 동경, 내적 갈등의 거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 구체적 대상성 때문에 심리를 파악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자연묘사가 문학 치료적으로 흥미 있는 것은 외적인 자연이 곧 사회 내에서 개인이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이고 도취적인 자연관에 대하여 브레히트는 “자연에 대한 이런 도취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황폐하여 살 수 없게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자아와 심리적 자아의 이런 상관관계에 대해서 괴테의 『베르테르』는 1771년 5월 10일 그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름다운 계곡이 내 주위에서 증기를 내뿜고 귀한 햇살이 내가 있는 숲의 끝없는 어둠의 표면에서 쉬고 있고, 세세한 햇살들만이 내면의 성지를 훔치고 있을 즈음이면, 나는 흐르는 시냇가의 잔디에 누워있고, 땅위의 수 천 가지 다채로운 풀들이 내게 기이하게만 느껴질 때면. 내가 풀줄기 사이의 작은 세계의 활발한 움직임을, 알 수 없는 벌레와 모기들의 수많은 형상들을 가슴 속 깊이 느낄 때면, 우리에게 그 자체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 속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사랑스런 움직임, 만물의 현존을 감지한다네. 친구여! 바로 이럴 즈음이면 내 눈이 흐려지고 세상이 내게로 다가오고 하늘이 내 영혼을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처럼 휘감을 때면 나는 종종 동경에 빠져 생각에 잠긴다네. 아, 너의 마음 속에 그렇게도 충만하게, 그렇게도 따뜻하게 살아있는 그것을 네가 다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종이 위에 쏟아부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네 영혼이 무한한 신의 거울인 것처럼 네 영혼의 거울이 될 것이다! ― 친구여 ― 하지만 나는 그것으로 인해 파멸하고 있다네. 이러한 현상들이 내뿜는 황홀한 마력 때문에 나는 죽어가고 있을 뿐이라네.

이 심정토로에는 자연관찰과 자연과의 합일된 감정이 뒤섞여 그려지고 있다. 시선은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서로 연결짓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회상은 신이 만든 자연에 대한 경험과 연결되면서 극도의 흥분에 달한다. 이런 감정은 ‘감상주의’의 대가다운 만연체의 리듬으로 표현되면서(“...하면 ...하면 ....하면, 그러면 ...한다”) 행복한 기분과 불행한 기분이 교차하고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독일문학에서 자연관찰을 이처럼 철저하게 묘사하는 곳도 많지 않다. 감정이입, 피부로 느껴지는 자연의 모습, 자연의 무한함,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일시와 신적인 것으로의 승화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더 나아가 좀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행복감은 잡을 수 없고 경험하는 자의 한계 속에서 깨져버린다는 점이다. “...하면”이라는 문장의 긴 호흡이 재빨리 “나는 그것으로 인해 파멸하고 있다네. 이러한 현상들이 내뿜는 황홀한 마력 때문에 나는 죽어가고 있을 뿐이라네”로 끝난다. 이러한 파멸은 전적인 자아 상실,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의 해체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도는 베르테르가 결국 상심하고 자살하는 데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하지만 무한함, 즉 신적인 힘과 만물의 관련성과 조화 자체는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다. 베르테르는 흥미롭게도 그러한 경험을 ‘참아내는’ 근본적인 가능성은 보여주고 있다. 경험한 것을 현재에 재현할 수 있는 예술가처럼 베르테르가 행동할 수 있었다면 무한성의 경험이 자아해체라는 그런 끔찍한 결말은 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적 투영에서 하나의 자기표현이 나온다면 예술작품은 “네 영혼이 무한한 신의 거울인 것처럼 네 영혼의 거울이 될 것이다”. 그런 예술성은 개개인이 어떤 경험 속에서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자신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글을 쓴 괴테는 죽음을 맞지 않는데 비해 베르테르는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고 만다. 베르테르를 죽이고 괴테는 산 것이다. 즉, 문학치료는 어쩌면 책을 읽고 있는 순간에는,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는 경험을 재현하고 있으면서 낯선 자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죽음을 죽게 함으로써 죽음과는 낯설게 된다는 논리가 너무 비약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