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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영화감상문

제목 여행자 /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글쓴이 노문희

목적지가 없는 여행. 얼핏 낭만적으로 보이는 여행이기도 하다. 목적지가 없이 떠나고 발길 닿는 곳에 머물 수 있다는 건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만한 여유가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이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느긋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매우 급하게 쫓기던 일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어쩌면 안식년을 맞이하듯 긴 호흡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주인공 질버만이 떠난 여행도 그랬으면 부러웠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에게 이 여행은 원하지 않은 여정이었다. 여행이 아니라 도망이었고, 독일을 떠도는 난민이었다. 외워두었던 기차 시간을 잊지 못하는, 자유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여행자가 되었다.


잔인한 밤이었다. 1938, 수정의 밤 사건. 나치 돌격대와 지지자들은 유대인을 공격한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약탈한다. 이게 다 합법이라는 게 더 놀랍다.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 오토 질버만에게도 약탈의 밤은 찾아왔다. 나치 당원들은 질버만의 집에 쳐들어오고 부순다. 다행히 질버만은 그 위기를 피하고 도망쳤지만, 그날 이후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내는 오빠 집으로 피신했고, 그의 집은 다 부서진 상태로 방치됐다. 그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도 체포되고 자유를 잃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는 한순간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한곳에 계속 머물 수도 없었다. 기차를 타고 독일을 떠돌며 매 순간 긴장하며 지냈다. 아니, 이건 지냈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는 어느 곳이든 발을 내디뎠지만, 그 어느 곳이든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부유했던 그의 삶은 이제 독일을 떠도는 도망자로 전락했고, 기차에서 내리지 못한다. 어디로도 갈 수 없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기차를 타고 있으면 안전할 거로 믿고 끝없이 티켓을 끊고 기차를 배회한다.


독일인의 외모를 가진 그가 유대인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그나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계속 떠도는 거였다. 그의 인생에서 이런 시간을 상상이나 했을까? 부유한 사업가로 살던 그가 급히 재산을 처분해 도주해야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계속 도망가면서도 긍정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 사는 건 선택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곧 아내도 만나고, 파리에 있는 아들이 그의 망명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불행이 길지 않을 거로 여겼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유대인을 보면서 나치 당원의 시선을 가지기도 했다. 자기 여권에 빨간색 ‘J’가 크게 쓰여있음에도 말이다.


질버만의 여행이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위태로웠던 건, 그의 외모와 여권의 ‘J’ 때문이다. 일단 그에게는 여행을 계속할 돈이 있었다. 가진 재산 전부를 처분했지만, 그 돈은 그에게 행운이기도 하고 부담이기도 하다. 이 여행을 계속할 자금이 되었지만, 언젠가 그게 잡힌다면 그 돈은 모두 몰수당할 테니까. 그의 외모가 아무리 유대인 같지 않다고 해도 그의 여권에 표시된 글자는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그는 여행하면서도 여행자로 불리지 못했다. 도망자이거나 난민이거나. 그가 기차표를 끊고 계속 다른 기차를 옮겨 타고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역시 둘 중 하나였다. 나치의 열성 당원이거나 독일군 장교이거나 그처럼 불안에 떨며 도망을 다니는 유대인이거나. 나치 당원은 아니어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침묵하는 시민이거나,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수단가이거나. 그가 독일의 도시를 떠돌며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그의 안에 머물던 분노를 표출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지만, 그 어디로도 떠나거나 머물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독일에 갇힌 채로 여행하는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 도르트문트에서 아헨, 아헨에서 도르트문트,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계속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 난 지금 독일에 있는 게 아니야. 이건 아주 큰 차이라고. 그의 여행 음악과 같은 바퀴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안전해. 지금 움직이고 있잖아. (214페이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여행하는 질버만의 모습을 비추는 이 소설은 그의 여정 이상을 보여준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나치 당원들을 피해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의 모든 순간을 비굴하거나 희생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의 지금 위치는 탄압을 받는 유대인이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본가였다. 기차의 일등칸을 이용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가 도망치는 중에도 의아했던 것은 그가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혹시 그가 마주친 유대인들과 연대라도 하지 않을까 했던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 그는 다른 유대인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여기기까지 했다. 이 상황이 되기 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독일어판 발행인의 설명을 보면, 작가 보슈비츠의 배경에서 비롯된 시선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아버지 역시 부유한 사업가였고, 그 자신도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건 질버만과 같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이어서 낙인이 찍히기 전까지 유대인이라는 게 그의 가족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상기하면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에서 유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은 다양하게 담겨 있다. 나치 당원이 보는 유대인, 독일인 장교가 보는 유대인, 일반 시민이 보는 유대인, 유대인이 보는 유대인. 반대로 모든 독일인이 열성적인 나치 당원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바로 앞에 앉아서 대화하고 있지만, 그들이 자기를 신고할 거로 여기며 불안하지만, 실제 그들은 질버만을 신고할 생각도 없고 그의 여정을 안타깝게 여기기까지 하는 걸 보면 모두 같은 시선으로 살아가는 건 아니다.


끝이 없는,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 즐거울까? 아닐 것이다. 여행은 어딘가로 향하는 목적지가 있어야 하고, 돌아올 곳이 있어야 즐겁다. 돌아올 곳이 없다면 끝없이 부유하는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질버만의 여행이 고단하고 불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그 스스로 여행을 끝내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마음이 읽힌다. 끝도 없는 여행을 멈춰야만 그가 살 수 있었을 테지. 그의 터전인 독일 안에서 머물 곳이 없고 끝날 수 없는 여행은 그를 미치게 했다.


질버만은 저녁 식사를 하려고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슈타인을 초대했어야 하는데. 그는 메뉴판을 살피며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그의 유대식 코가 두려웠어. (63페이지)


소설은 끝났지만 지금도 끝나지 않은 수많은 여행자(질버만)가 남았다.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는 전쟁, 싸움, 여러 가지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오늘도 세계를 떠도는 난민. 오늘 봤던 뉴스에서는 미국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난민의 예외에 어린이는 받아준다는 규정을 이용하는 이들을 봤다. 이걸 이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부모의 간절함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만이라도 살리겠다고, 높은 국경의 담장 너머로 아이를 떨어뜨리는 그 손끝의 바람이 보인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낙인을 찍는 과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세상이다. 소설 속 세상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견디기 위해 생각하는 습관을 버리겠다는 질버만의 말은, 한편으로는 나와 타인을 구분하며 이 불행에 나를 포함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바라지 않았던가. 질버만의 체포되지 않기를, 누군가 그를 숨겨주기를, 그의 불행이 어서 끝나기를. 그러면서도 내밀지 못한 손이 부끄러워지는 건, 누군가의 절망에 용기 내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