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마당 > 글쓰기마당 > 동화/소설

동화/소설

제목 유미의 새 친구
글쓴이 고은영

딩동

어느 일요일 조용한 오후, 유미네 집 초인종이 울렸다. 식구들은 모두 외출하고 집에는 유미 혼자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나 된 유미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외출은 세상 달갑지 않았다.

누구세요?”

유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휴일이라 오후까지도 잠옷 바람이었던 유미는 귀찮은 마음 가득 안고 현관으로 나갔다.

…….”

누구시냐고요!”

…….”

시원찮은 대답이 들려왔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문을 확 열어 버리자 문 앞에 웬 젊은 아기 엄마가 등에 아기를 업고 한 손엔 시루떡을 든 접시를 들고 있었다. 유미는 호기심 가득 한 눈빛으로 젊은 아기 엄마가 어떤 말이든 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기 엄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쭈물 할 뿐이었다. 수줍은 성격의 유미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서둘러 감사 인사를 해 버렸다.

잘 먹겠습니다.”

급하게 집안으로 들어온 유미는 식탁위에 시루떡 접시를 놓아두고는 이내 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미야, 엄마 왔다. 어머, 웬 떡이 있네?”

유미가 방에서 꼼짝도 않자, 엄마는 유미의 방문을 열었다.

유미야, 식탁 위에 저거 웬 거니?”

누가 이사 왔나 봐요. 어떤 젊은 아줌마가 주고 갔어요.”

그랬구나. 몇 호라고는 안 하고?”

. 그냥 주기만 하고 가시던걸요?”

몇 호냐고 물어 보지, 고맙다고 인사는 해야 할 텐데.”

유미의 엄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유미는 등교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는 것은 늘 지루하고 힘이 드는 유미였다.

유미는 홍반성 루프스라는 병을 앓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잦은 입원과 퇴원으로 학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증세가 심할 땐 온 몸이 퉁퉁 부어올랐는데 친구들은 그런 유미를 보고 호빵맨이라고 놀려댔다. 유미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친구들도 없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러려고 애를 쓸 뿐이란 것을 유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유미에게 학교는 외로움을 오롯이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 고단한 장소일 뿐이었다.

유미는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다닌다. 유미네 집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엔 작은 편의점이 하나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동네에서 안파는 물건이 없다고 소문난 가게이다. 유미는 월요일이면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자신을 보듬어 달래기라도 하듯, 등굣길에 어김없이 이 편의점에 들러 달콤한 무언가를 산다.

오늘은 뭘 사서 먹을까나?’

보물찾기를 하듯 편의점 스낵코너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유미에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점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래서 뭐가 필요하신 건데요?”

유미는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 곳엔 어제 유미네 집에 떡을 들고 온 아기 엄마가 어제처럼 아기를 등에 업고 서 있었다. 아기 엄마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베이비, 피버.”

아기 엄마는 자기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어 가며 혼신을 다해 설명하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영어였다.

한국 사람이 아니었구나!’

유미는 아기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피버라는 말이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기가 열이 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급하게 설명하던 아기 엄마의 눈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기 엄마의 절망감이 온몸으로 유미에게 전해졌다. 유미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용기 내어 말했다.

왓츠 유어 프로블럼?”

무슨 일인 지부터 물어 보았다. 다행이 유미는 과목 중에 영어를 제일 좋아하고 잘 한다. 몇 년 전 좁은 병실에 누워 있을 때 영어 단어를 외우고 영어 책을 읽는 것이 유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영어를 공부해두면 언젠가 자신이 건강해졌을 때 전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미가 영어로 말을 걸자, 아기 엄마는 눈물 그렁한 두 눈에 희망을 잔뜩 머금고 찬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베이비, 피버. 리틀 스틱..”

아기가 열이 날 때 쓰는 작은 막대기라는 설명을 알아들은 유미는 곧바로 아기 엄마가 찾는 것을 알아차렸다. 체온계였던 것이다. 유미는 가만히 아기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역시나 뜨거웠다. 유미는 자기가 다니는 소아과가 생각났다. 이 아기를 얼른 친절한 임효희 선생님께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미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아기 엄마에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요. 아이 헬프 유.”

유미는 아기 엄마의 손을 천천히 잡아끌며 편의점을 나섰다.

쌩큐. 쌩큐 베리 머치.”

아기 엄마에게 영어가 그다지 편한 것 같진 않았지만, 다행이 유미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임효희 소아과는 편의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반대편으로 5분 남짓 걸으면 나오는 건물 3층에 있다. 선생님은 아기였을 때부터 유미의 주치의이고 유미가 루푸스일 지 모른다고 큰 병원에 가보도록 권유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차리링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풍경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 언니도 유미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간호사 선생님, 여기 아기 엄마가 외국인인데요, 아기가 열이 나는 것 같아요. 편의점에서

체온계를 찾으셔서 걱정 돼서 모시고 왔어요.”

우리 유미 정말 착하네. 그런데 의료보험증은 있으실까?”

유미는 의료보험증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디스 카드, 호스피탈 카드?”

병원 카드라고 하면 알아들을까 싶어 손으로 네모난 카드 모양을 만들어 물어 보았다.

쏘리, .”

아기 엄마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병원에 올 생각을 못 하고 체온계를 사려고 했ㅊ을까?’

간호사 선생님, 임효희 선생님께 제가 부탁드려 볼게요. 우선 아기부터 봐 주시면 안 될까

?”

간호사 언니는 허락해 주셨다. 임효희 선생님께서 유미를 특별히 귀엽게 여겨 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다. 마침 아침 시간이라 환자들도 거의 없었다. 유미는 순서가 되자 아기 엄마와 아기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선생님께선 유미를 보고 반가워 하셨다.

선생님, 아기가 열이 난데요. 아기 엄마가 우리말을 모르세요. 영어는 조금씩 알아들으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께선 언제나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어디 아기 먼저 볼까? 여기 앉아 볼래요? 플리스 싯 히어.”

아기 엄마가 아기와 앉자, 찬찬히 상태를 살피시던 선생님은 편안한 미소를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돌발진이란다. 돌 전후 이만한 아기들에게 잘 오는 질환인데, 크게 걱정할 것 없이 따뜻한 보리차 마시게 하고 지켜봐 주면 될 거야.”

진료 테이블에서 메모지와 펜을 찾으신 선생님께선 영어로 무언가를 적고 계셨다. 그리고는 아기 엄마에게 건네 주셨다.

아기는 괜찮아요. 오케이.”

아기가 괜찮다는 말에 아기 엄마는 종이를 받아 들며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쌩큐, 쌩큐.”

자기와 선생님을 번갈아 보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아기 엄마를 보니 유미는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얼마나 막막했을까 싶어 유미의 눈가도 뜨거워졌다.

한 숨 돌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시계는 벌써 1030, 지각이었다. 유미는 일단 엄마께 전화를 드려 사정을 설명 드리고 아기 엄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웨어 알 유 프롬?”

병원 의자에 앉아 아기 엄마가 아기 띠를 매만지고 있었다. 아기 엄마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어디서 왔냐는 유미의 질문에 대답했다.

비엣남.”

캔유 스피크 잉글리쉬?”

베트남어를 전혀 모르는 유미에겐 영어가 아기 엄마와 소통할 유일한 언어였다. 아기 엄마는 수줍게 답했다.

어 리틀.”

유미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말을 꺼냈다.

프렌즈, 투게더?”

친구가 되자고 말이다. 아기 엄마는 애써 꾹꾹 들여보낸 눈물을 또 다시 내어 보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쌩큐, 쌩큐 베리 머치!”

유미 마음속에 행복의 꽃씨 하나가 날아들었다. 아기 엄마의 등 뒤에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아기가 잠들어 있었다. 유미는 아기 엄마에게 해 주고 싶은 일들이 떠올랐다. 우선은 우리말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 친구가 두 번 다시 혼자서 오늘 같은 불편을 겪지 않길 바라서였다.

둘은 나란히 소아과 계단을 내려와 같은 동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라 유미는 가방 속에서 빈 메모지 한 장과 연필을 꺼내 또박또박 두 사람의 희망을 눌러 적기 시작했다.

친구가 되고 싶어요. 언제든지 전화해요. 010 XXXX XXXX.”

그리고 유미는 힘차게 학교로 향했다.


(4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