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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춥고 더운 우리 집 / 공선옥
작성자 노문희 작성일 2021-06-19
작성일 2021-06-19


이상하다.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반년이 넘어가는데, 나는 아직도 엄마가 사는 시골의 낡은 집을 우리 집이라고 부른다. 목적지를 말할 때도 아파트로 갈게, 아파트에 들어왔어.’ 이렇게 표현하지 집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입에 붙은 습관처럼 말이 그렇게 나온다. 나는 아직 이 집에 정이 붙지 않은 걸까? 아니면 언제가 될지 모를 또 다른 이사계획에 마음이 붕 뜬 걸까, 그것도 아니면 폭력적인 소음으로 공격하는 윗집 사람들 때문일까. 머릿속에 막연하게 채워진 생각들이 만들어갈 그곳이 궁금하다. 이제까지 살아온 집의 기억에 보태 앞으로 살아갈 집은 어디의 어떤 집이 될는지.


집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자신에게 수없이 물었을지도 모른다. 집의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먹고 자고 쉬고, 일상의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할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것까지 아우르는 존재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곳. 작가가 머물다 온 그 집들을 생각하면, 집은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장소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낡고 불편했지만, 간절하면서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은 집들이 작가에게는 정신적인 공간이었을 테다. 작가가 걸어온 시간을 가득 채운, 가난의 모습이 곳곳에 묻어있는 그곳. 집에 대해 잘 몰랐지만 편한 집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한 그 시절의 이야기에 우리는 또 꿈을 꾼다. 편한 집, 내 공간, 마음이 안정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작가가 찾던 집도 그런 곳이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한 공간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결국에는 오랜 세월의 끝을 정착하려고 선택한 집에 머물며 오늘을 살게 하는 곳을 찾았다.


자주 집 꿈을 꾸었다. ‘보이라에 에아가 차서 방이 냉골이라고 추위에 떠는 엄마 꿈, ‘입식 부엌에 지름 보이라를 못 놔서 서러운 아버지 끼무. 꿈속에서도 나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있다. , 언젠가 돌아와 아궁이에 물도 차지 않고 보일러에 에어도 차지 않은 번듯한 입식 부엌에 기름보일러를 놓아드리리라. 엄마,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리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선 나는 아궁이 물을 푸며 읽었던 책 몇 권 안고 집을 떠났다. (44페이지, 아궁이에 물을 푸며 책을 읽다)


작가가 어릴 적, 거대한 큰집 옆에 자리한 세 칸 초가집이 작가의 집이었다. 엄마가 힘들었음은 물론이고 그 후로 아버지가 다시 지은 부로꾸집(블록집) 역시 불편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집은 아버지의 거듭된 실패와 모습을 같이 한다. 더 좋아질 것 같았지만, 더 좋아지지 않았던 생활 공간으로 남았다. 어디를 봐도 완벽한 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그곳을 거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처음 자취를 시작한 광주의 어느 식당 방.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의 봉제 공장에 취직하면서 경험한 기숙사, 역시 낡고 오래된 임대아파트까지. 그리고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게 구매했던 담양 수북의 땅. 땅만 사면 집은 저절로 짓는 거로 여긴 건 아닐까? 나도 그랬다. 땅만 구하면 집 짓는 것은 업체에 맡기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땅(자리)을 구하기도 어렵고, 집을 잘 짓는 업체를 만나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이제는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집 짓는 꿈을 꾼다. 작가의 시행착오를 들으면서 웃음이 나고 공감되는 건 그 때문이다. 나보다 앞서 경험한,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작가에게 존경을 담아본다.


어렸을 적의 시간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성장을 거쳐 나이 든 후 수북으로 돌아가 집을 짓고 사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세입자로 살던 게 굳이 나쁘지는 않았을 테지만, 작가가 내버려 둔 땅에 집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일은 마냥 힘들었던 집주인 때문이었다. ‘더는 안 되겠다, 집주인의 갑질을 겪지 않을 내 집을 지어야지.’ 그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되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림 그리듯 해놓은 설계도를 가지고 시공자를 찾는 일부터, 부족한 예산으로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하는 계산까지 해야 했다. 저자는 말하는 장면들이 눈에 선했다. 듣기만 해도 아찔했다.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정말 정직하고 성실한 시공자를 만나지 않은 다음에야,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룰 수 없는 꿈이었으리라. 내가 마련한 장소에 내가 원하는 집을 짓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큰일 없이, 무사히(?) 집은 완성되었다. 작가는 그 오랜 세월 쌓아둔 집을 끌고 새로 지은 집으로 들어간다.


조만간 집이 완성되면 좋든 싫든 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로서는 엄청난 결단과 돈을 들여 땅 위에 처음 짓는 내 집이다. 남이 지어놓은 아파트에 돈만 지불하고 들어가는 것과는 뭔가 차원이 다른 일임이 분명하다. 땅 위에다 스스로의 결정으로 집을 짓는 것이 엄청난 일이라는 걸 집을 짓는 중간에서야 갑자기 깨달았다. 아이구야, 내가 뭣도 모르고 큰일을 저질러버렸구나! (99페이지, 그녀, 집주인 여자 때문에)


어찌 되었든, 머물기로 다짐한 곳에서 또 정을 붙이기 마련인가 보다. 잔디를 잘못 심어서 후회하고, 데크에 잘못 올린 지붕 때문에 여름 더위에 시달리고. 그러면서도 내 집이라는 안정이 주는 시간을 살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수북의 집에서 작가는 시골 마을 주민이 되어 살아간다. 시골이라 반드시 차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폐차한 차 대신에 이용하는 대중교통으로 다른 풍경을 본다. 장날에 읍내에 나가는 경험, 버스에 올라탄 이들의 이야기에 살아간다는 것을 배운다. 뭐든지 도시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버스에 올라탄 할머니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주는, 교통카드가 아니라 손에 쥔 잔돈으로 버스비를 내는, 그러다가 동전이 손에서 우르르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 짐보따리를 버스에 싣고, 지팡이도 올리고 몸도 실어야 하는 이들의 느린 행동에도 기다려주는 버스 기사. 나 역시 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이런 기사님 보기 어려운 이곳에서는 마치 다른 공간의 이야기 같아서 낯설다. 그 느림과 이해가 부럽기도 하다. 사고 없이 천천히, 누군가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버스의 모습을 그리면서, 작가가 머무는 시골 마을의 풍경을 읽는다.


작가처럼, 나도 집을 생각하면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 시절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좁은 집에서 부모님과 육 남매 북적거리면서(사실은 낑겨지내면서) 살았던 시간, 수시로 싸우고 울고불고하면서, 가난에 원망만 가득하던 마음. 생각하면 아프기만 한 공간에 기억이 더해져, 그 시절의 행복과 불행이 따라온다. 솔직히 말하면, 행복보다는 불행하다고 여기던 시간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뭐든 힘들고 부족하기만 했던 기억, 마음의 여유는 생각도 못 하던 날들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의 우리는 어렸고, 그래서 더 이해하지 못했고, 그 집에서 고생하던 엄마의 애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오래되고 낡은 집만큼이나 엄마도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그렇게 부족하고 낡은 곳이어도 지키고 있기가 어려웠을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집주인의 갑질 없이, 매달 나가는 월세 걱정 없이, 언젠가 내쫓길 걱정 없이 지내는 일이 정말 어려운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그 동네 그 집이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우리가 걸어온 시간과 모습 그대로를 담아낸 그곳이 가진 의미를 묻는다. 집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말하는 듯하다. 가지고 있다가 값이 오르면 팔고 나올 부동산이 아닌, 눈비 막아주면서 머물기 좋은 곳. 내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고, 언제 떠나도 돌아올 수 있는 곳, 그렇게 안심이 되는 곳. 엄마가 자주 이사를 생각하면서도 쉽게 그 낡은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게 아닐까. 예산이 맞지 않아 이사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집을 떠나지 않고 새로 집을 짓는 일을 꿈꾸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안다. 엄마의 기억 속에 가난과 고생이 전부가 아니었던, 그래도 행복하고 따뜻했던 시간의 그 집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가지 못할 시절의 아름다움이 엄마의 기억 속에 있을 것만 같다.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그 시절의 이야기가 머물러 있는 곳이 되어.


왠지 마음이 고적한 날이면, 어떤 그리움에 목이 메는 날이면 전라선을 탈 일이다. 그래서 하나도 특별할 것도 없고 하나도 별날 것 없는 곡성역이나 구례구역이나 괴목역에 내릴 일이다. 아무 목적도 없이 누구를 만날 일도 없이. 아무 일 없이 기차역으로 가서, 아무 일 없이 강물 가까이 흐르는 기차역에 내리자. 그래서 강물이 헤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 일 없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리라. 그가 그 기차역, 그 강물 언저리쯤에서 사랑을 만나 새로운 둥지를 틀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있을쏘냐. (188페이지, 아무 일 없이 기차역으로 가자)


집이란 곳은 떠나야 한다고 여겼던 저자가,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거쳐 고향 근처로 내려온 이야기가 애틋하다. 집에 대한 기억이 단순히 집으로만 머물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일까. 그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낸 삶,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한다. 춥고 덥지만, 가끔은 시원하고 따뜻했을 그곳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