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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영원한 유산 / 심윤경
작성자 노문희 작성일 2021-02-02
작성일 2021-02-02


, 어떡하지?’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영화 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하던 것이, 영화 관람은 오랜 세월 나의 취미이자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영화 보기를 잠시나마 고민했던 적이 있다. 언제였던가, 기다리던 영화의 개봉 날짜를 기다리며 보러 가려고 계획했던 순간. 주연 배우의 스캔들이 터졌다. 그 배우의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한 개인의 사생활이려니 하면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던 게 여러 번이었으니 뭐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못 들은 척하기가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 영화를 볼까, 말까? 영화를 보면서 자꾸 그 스캔들이 배우의 얼굴에 겹쳐 보일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결국은 보고야 말았다. 영화가 다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에이, 더럽게 연기 잘하네.’ 어쩔 수 없는 미움 앞에서도 배우의 연기를 훌륭했고, 캐릭터와 한 몸인 것처럼 보였으며, 영화도 재밌었다. 무엇 하나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 배우를 떠올리면 지나간 시간의 모든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또 한 번 과거의 스캔들을 소환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그를 미워하면서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 미워할 때 미워하고, 영화는 영화로 본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궁금하다. 이 마음이 뭐란 말인가.

 

작가가 소설에 담아낸 벽수산장이 그랬다.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적산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잊을 수 없게 하는 존재.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면서 아픔도 동시에 소환하는 그곳을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언제나 고민하게 될 터였다. 한때 한양 아방궁이라 불렸던 벽수산장은 친일파 윤덕영이 3년여에 걸쳐 지었다. 친일파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하니, 그가 나라를 팔아서 번 돈으로 지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면적이 옥인동 일대의 거의 절반이라고 한다. 위치 또한 기가 막히고, 인왕산 중턱에 자리하며 경성을 내려다보는 프랑스식으로 호화로움까지 갖췄단다. 소설 속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상상해보는 순간에도 그려지는,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세상의 주인이고 중심인 것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해동이 윤원섭을 만나는 순간부터 솟아나던 그 갈증과 답답함을 문장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1966, 해방 후 20여 년이 지난 현재, 이십 대 청년 이해동은 언커크(유엔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회)에서 호주 대표 애커넌의 통역 비서로 일한다. 현재 벽수산장은 언커크의 사무실로 쓰인다. 어느 날 해동 앞에 나타난 윤원섭은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로, 이제 막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했다. 그런 그녀가 애커넌을 만나러 벽수산장으로 돌아왔고, 그녀만 알던 벽수산장 비밀의 방을 보여주며 그곳의 신비로움을 피력한다. 마치 오래된 고성의 비밀의 방을 여는 것처럼, 누구도 몰랐지만 누구나 들어가 보고 싶은 공간으로 포장한다. 옛 주인은 자기만이 그 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벽수산장이 그냥 평범한 건물이 아니고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품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만약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나는 이미 윤원섭의 모든 것을 알아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 벽수산장은 더는 언커크 사무실로 쓰이지 않을 것이며, 그녀가 돌아온 이유가 한 번에 보일 만큼 적나라했다. 그건 언커크 사무실로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무언의 연대 같은 느낌일 것이다. 해동은 윤원섭의 말을 통역하면서도 구역질이 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쩜 저렇게 뻔뻔하고 염치가 없을까. 밥벌이를 이어가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이것도 못 참고 뛰쳐나가자니 일상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다. 해동의 갈등은 윤원섭과 함께하면서 계속된다.

 

윤 자작의 일족이 일본 지배 시절의 행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때의 조선은 다른 세상이 아닌가? 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97페이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결정이나 판단이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 이해동의 갈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친일파의 후손 윤원섭과 국제사회의 시선을 담은 애커넌의 말에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동은 상사에게 윤원섭이 어떤 인물이고 그 가문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죄를 말하지만, 애커넌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지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윤원섭은 마치 그 시선을 이용하는 것처럼 당당하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과거 따위 무시하고 현재 벽수산장의 아름다움을 호소하며 문화적 가치를 앞세운다. 정말 그럴까? 지나간 시간의 일은 과거와 같이 묻어두고 현재의 것만 다루면 그만인 것일까? 해동의 혼란이 커질수록 독자의 마음도 같이 흔들린다. 무엇을 따라야 옳은 것인지 계속 고민해봐도 답을 알 수가 없다. 특히 해동의 마음은 더 복잡했으리라.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발각되어 목숨을 잃은 아버지였다. 해동에게 고아라는 이름을 물려주게 했던 그 시절의 아픔은 친일파의 후손인 윤원섭에게도 책임이 있다. 단지 가해자의 후손이니까? 아니다. 피해자의 피와 눈물로 착취한 재산으로 배를 불리고 대대손손 그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게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 해동이 윤원섭에게 느끼는 감정도 비슷할 거다. ‘당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이 나를 고아로 만들었고, 성장하는 동안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는데, 당신은 왜 지금 이곳으로 돌아와 주인 행세를 하며 차지하려 드는가?’

 

해동의 혼란은 사무실로만 쓰던 벽수산장이 아니라, 알지 못했던 그곳의 곳곳을 들여다보면서 커진다. 섬세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의 면면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적산이라 부르며 혐오하던 그곳에 마음을 빼앗긴다. 동시에 적산이니까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마음도 커진다. 상처와 고통을 주면서도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부끄럽고 죄스러웠으며, 저택이 그곳에 뿌리내리듯 존재하는 이상 그가 느낀 아름다움 역시 사라지지 않을 거로 여겼다. 누군가에게는 적산이고 누군가에게는 유산이 되는 그곳의 존재는 곧 사라진다. 벽수산장에 불길이 치솟고, 몇 년 후 철거된다.

 

작가는, 윤덕영의 옛 별장 벽수산장이 한때 언커크에서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화재로 소실되어 몇 년 후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소설의 내용 대부분은 허구라고 말했다. 많은 부분을 자료 조사가 바탕이 된 상상이라고. 그런데도 상상으로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마도 우리 마음속에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과거이지만 지워지지 않고, 지워서도 안 되는 그 시간의 흔적이라고 말이다. 거기에 적산과 유산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일도 끝나지 않았다. 친일파의 적산가옥으로 생활 좀 편해지고 싶어 하는 소시민의 마음과 친일파의 흔적이니 사라져야 한다는 마음의 갈등은 계속된다.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일찍 죽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아 인생을 이해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장한 행동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는 일. 해동이 윤원섭을 보고 느끼며 변화하는 과정이 그가 원망하듯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불타는 벽수산장을 뒤로 하고 그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적산이 사라지는 것을 기뻐할 수도 없고,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도 없는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그 길에서 이제 그는 무엇을 향해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해동의 마음은 이 소설을 읽는, 우리의 과거 속에서 마주하는 비슷한 상황들에서 공감하는 마음이고 질문이겠지.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 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중략)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248~249페이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로 기억될 갈등은 이분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분하고 화가 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감정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모든 상황과 인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겪어온 상황과 혼란, 여러 가지 마음을 안다고 말하고 싶다. 씻은 듯이 모든 감정을 없앨 수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런 순간과 공간이 또 얼마나 많을까 싶다. 작가의 말처럼,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이야기지만, 자기의 가치관과 삶을 지키려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을 함께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사라짐과 지킴의 묘한 겨루기를 주관하는 힘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