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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모월모일 - 박연준
작성자 서지영 작성일 2020-08-10
작성일 2020-08-10



















겨울밤은 야박하지 않다. 길고 길다. 먼 데서 오는 손님처럼 아침은 아직 소식이 없을 것 같으니, 느릿느릿 딴 생각을 불러오기에 알맞다. 곶감이 녹으려면 더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누가, 감을 말릴 생각을 했을까? 말린 감은 웅크린 감처럼 보인다. 누구에게나 웅크릴 시간이 필요하다. 병든 자의 병도 잠든 자의 잠도 자라는 자의 성장도 비밀이 많은 자의 비밀도 겨울밤을 빌어 웅크리다가, 더 깊어질 것이다. (p.14)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얼굴의 전혀 다른 표정을 보게 되는 날. 잘못한 것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잘못한 것만 같은 날. 공기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 내가 아는 얼굴들, 그리고 나를 아는 얼굴들을 떠올려보게 되는 날. 대관절 아는 얼굴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때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나름의 방식으로 상처를 받는다. 내가 쌓아올리고 내가 무너뜨린 환상 때문에 얻은 상처. 상처라고 할 수도 없는 상처다. (p.85)



정말 소중한 건 물질적 가치로 쉬이 교환이 안 된다. 그런 건 마음과 시간을 들여 찬찬히 가꾸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어디에서도 팔지 않는다. 진짜 가난한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만 가진 자인지도 모르겠다. (p.153)





“나는 나를 좋아한다. 이걸 깨닫는 데 사십 년이나 걸리다니! 당신이 나보다는 좀더 빨리, 자신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자신을 좋아하면서 아닌 척 딴청을 피우는 시간,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간을 멀리 내다 버렸으면 좋겠다.” 잊어버려서 잃어버린 것들로 가득한 날들, 박연준 시인이 발견한 <모월모일>의 특별한 평범함. 이 산문집은 평범한 날을 기리며 썼다. 빛나고 싶은 적 많았으나 빛나지 못한 순간들, 그 시간에 깃든 범상한 일들과 마음의 무늬를 관찰했다. 삶이 일 퍼센트의 찬란과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저자는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을 사랑하기로 했다. 작은 신비가 숨어 있는 아무 날이 내 것이란 것을, 모과가 알려주었다. 내 평생은 모월모일의 모과란 것을.

변화무쌍. 인생은 정처 없는 나그넷길. 시작에서 끝까지 하나의 의미 있고 종합된 삶의 연속선을 이루며 오르락내리락, 파란만장한 시련의 연속. 그래서 더 재미있다. 아무도 그 끝을 알 수 없으니까. 겨울밤, 김밥, 밤과 고양이, 하루치 봄, 작은 그릇, 여름비, 살 수 없는 것들의 목록, 몽당연필, ···. 작은 모과 한 알에서부터 시작된 평범한 모월모일, 그 시간 속에 깃든 애틋한 이야기. 잔잔하게 작가가 건네오는 위로의 손길을 두 눈에 가득히 담아본다. 그러곤 귀를 쫑긋 세우고 입으로 다시 한번 더 읊어본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이렇게 하나둘 가슴속에 간직하고픈 말들이 늘어간다. 손안으로 들어온 웅크린 모과 한 알. 그 속에 담긴 평범한 하루하루. 작가는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은 작고 가볍고 공평하다. 끔찍한 날도 좋은 날도 모월모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