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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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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아직 어렸을 때, 겨우 중학교에 막 입학한 해에 나는 6.25를 겪었다. 내 선배들은 전방에서 죽거나 영웅이 되었다. 내 후배들은 엄마 품에서 전장의 공포를 겨우 배고픔으로 겪었다. 그러나 나는 전장의 주역이기에는 너무 어렸고, 엄마 품에서 살육(사람을 마구 죽임)공포를 외면하기에는 너무 컸다. 내가 겪은 것은 다만 두려움과 허기, 증오와 죽음, 절망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운명’ 등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이 꿈이었기를 바라며 때로는 심하게 고개를 가로젓곤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현실은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님을 더 뚜렷하게 내게 드러내곤 했다. 마침내 '어쩔 수 없음' 또는 ‘이것이 내 운명임’ 이라는 자학(스스로 자기를 학대함)이 불가항력적으로(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이)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나를 향해 발언하는 것을 듣기 시작했을 때, 내가 만난 것이 게오르규의 『25시』였다.
나는 이 책을 김 송 선생님이 번역한, 지금도 왜 그랬는지 잘 알 수 없지만 프랑스 삼색기로 장정한(책을 매어 꾸밈)두 권으로 된 것으로 읽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나보다 나이들이 훨씬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그들의 삶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당치 않은 것일 터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전쟁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영웅도 없고 장군도 없었다. 포성이 요란하지도 않았고 승패가 묘사되는 긴장도 없었다. 다만 그 이야기에는 누구도 진정한 까닭을 알 수 없는 전쟁에서, 한치 앞의 운명도 짐작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만이 펼쳐지고 있었다. 비록 소설이 담고 있는 대화와 상황 묘사와 다른 문화의 역사나 전통이 내 경험과 사뭇 다르기는 했어도, 그것이 그리 큰 장애는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비극의 온갖 것을 다 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요한 모리츠는 과장한다면 바로 나였다. 내가 왜 이 살육의 현장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듯이, 그도 전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설명할 수 없었다. 왜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져야 하는지 그는 스스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왜 내가 아버지를 빼앗기고 사회 사업 기관을 전전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공포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사태로 거짓말처럼 사라지는가 하면, 잠시의 고요는 또 그렇게 잠시 후 경련을 일으킬 듯한 공포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지니게 되는 마음속 깊은 색깔은 나와 모리츠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두지 않았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다 그랬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의 틀이 지낸 이 엄청나게 무자비하고 무감한 힘과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우면서도 처음으로 그 힘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전장의 한구석에서 타다 남은 나무토막 같은 내게 새로운 싹이 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시하는 길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있다. 나는 그래도 ‘사람다움’과 ‘사랑’이 끝내 지워질 수 없음도 조용히 내 마음 바닥에 지니기 시작하였다. 소설은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는 소식과 더불어 또다시 새로운 수용소로 들어가는 모리츠에게 사진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웃으라는 장면으로 끝난다. 모리츠는 웃지 못한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가? 하지만 웃음 없음이 절망은 아니다. 비록 드러나게 웃을 수는 없지만 남모르게 지닐 수 있는 사랑마저 구겨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신비와 존엄은 그렇게 망가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13년 만에 만난 아내 수잔나가 모리츠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바로 그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은 저리게 아픈 감상을 내 가슴속에 일게 했지만 마냥 행복한 한줄기 빛이었다. 아내 로라에게 자기가 쓰던 안경을 전해 달라고 말하고는 뚜벅뚜벅 철조망으로 다가가 삶을 끝내는 트라이안 코루카의 죽음은 내게 비극적인,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삶을 위로해 주는 슬픔이었다. 그 죽음은 비록 비참한 자살이었지만 안간의 자존(스스로 자기를 높임)을 더할 수 없이 드러낸 감동이었다. 전쟁은 분명히 절망의 시간 25시를 가리킨다, 인간의 문명이 빚은 반인간적 역사의 시각은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삶의 신비는 아직 그렇지 않다. 스스로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인간의 긍지가 지속하는 한 그렇다.
전쟁이 낯선 세대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전쟁을 ‘음미’해야 한다. 게오르규의 『25시』는 내게 ‘전쟁’ 속의 ‘나를 읽게 해준’ 최초의 책이었다. 그리고 그 여운은 아직 내게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정진홍/ 종교학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월간 독서평설 / 지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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