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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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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많은 니가타현 배경... 여행과 만남
최근 주변에서 설국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 때문도, 겨울에 걸맞은 눈 때문도 아닌 ‘유민’이라는 일본계 여배우 때문이었다.(사실 최근에는 문학상 같은 것보다는 여배우의 가슴 노출이 더 큰 화젯거리다)
유민이 출연해 화제가 된 설국은 가와바타의 설국이 아니라 가와바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기획된 사쿠라 아키라(笹倉明)의 ‘신설국(新雪國, 1999)’이다. 회사가 부도 나서 자살을 결심한 남자에게 재생의 희망을 안겨주는 여인의 이야기다. 2001년 고토 고이치(後藤幸一) 감독이 영화화하여 유민이 현대적 고마코인 모에코(萌子) 역을 맡았다.
‘설국’은 한국에서도 1977년 고영남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다. 무용평론가 시마무라는 상민이란 이름의 민속학자로, 게이샤 고마코는 은자라는 이름의 가야금을 잘 타는 기생으로, 눈이 많은 에치고 유자와의 온천장은 강원도의 해안마을로 번안되었다. 시대 배경은 1930년대 일본에서 1970년대 한국으로 바뀌어 있으며, 배경 음악으로는 최헌의 ‘오동잎’이 나온다. 박근형과 김영애가 주연을 맡았었다.
작가 가와바타는 1934년 처음 온천장에 방문해 그곳에서 고다카 기쿠(小高キク)라는 게이샤를 만난 체험에 기반해 이 소설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소설 ‘설국’은 1935년에서 1948년까지 장장 13년에 걸쳐서 그렇게 조형되어 갔던 것이다.
삼각 관계의 미묘한 심리 표현
적지 않은 한국 독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설국’의 공간배경은 홋카이도(北海道)가 아니다. 일본 내에서 제일 눈이 많다는 니가타현(新潟縣)의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澤)’가 그 배경이다.
이 작품에 새겨져 있는 ‘눈’과 ‘죽음’ 그리고 ‘여행’, 이것은 비단 ‘설국’뿐만이 아니라 와타나베 준이치(渡邊淳一)의 ‘실락원(失樂園)’에서도 발견되는 소재다.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양을 쫓는 모험’에서 역시 죽음과 눈이 그려지고 있다. ‘러브레터’ ‘철도원’ ‘호타루’ 역시 그러하다. 마치 한국에서 히트하는 작품은 전부 눈과 죽음 그리고 여행을 그리고 있는 듯싶다. 눈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냉기가 우리에게 죽음을 연상하게끔 하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설국’은 일본 문예작품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코드로서 의미를 갖고 있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이렇다 하게 하는 일 없이 일본 전통무용에 대한 평론 등을 쓰며 생활을 하다가, 전통 무용계의 폐쇄성에 거부감을 느끼고 서양 무용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서양 무용을 직접 보지도 않은 채, 무용에 관한 외국 서적과 무용 사진들만을 가지고 자신의 공상에 기반을 두어 서양 무용을 소개하는 ‘무의미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존재다.
그런 그가 훌쩍 도쿄(東京)를 떠나 여행길에 올랐을 때, 그 여행을 통해 만나고 싶었던 것은 새로운 자신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시마무라를 유자와의 온천장으로 이끈 것이 한 권의 책이었다는 사실이다. 시마무라는 에도(江戶) 시대의 문장가 스즈키 보쿠시(鈴木牧之)의 수필집 ‘호쿠에쓰셋푸(北越雪譜)’를 통해 그 고장이 자신이 애용하는 지지미(縮) 옷의 유서 깊은 산지(좋은 지지미는 눈이 많은 고장에서 만들어진다)임을 알게 되고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서 설국으로의 여행은 공간 이동일 뿐만 아니라 과거로의 시간 이동이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여행이기도 하다.
그는 여행지 유자와에서 고마코라는 여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해 나간다. 하지만 시마무라에게 설국은 여행지지만, 이곳에서 게이샤 생활을 하는 고마코에게는 단지 떠나고 싶은 지리멸렬한 일상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요코 역시 사랑하는 유키오가 죽은 이 고장을 떠나 도쿄로 가고 싶어한다.
존재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여행
시마무라, 요코 그리고 고마코. 그들은 현실의 자기 시공간에서 존재할 이유를 찾지 못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이동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세 사람의 인물은 눈과 죽음과 여행을 배경으로 하여 작품 ‘설국’을 만들어가는 존재들이다.
시마무라뿐만 아니라 고마코 역시 끊임없이 무의미한 듯한 독후감과 일기를 써나가는 존재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만일 인간이 ‘걸리버 여행기’의 스트럴드 블럭들처럼 죽지 않는다면 과연 여행을 하려고 할 것인가? 죽음이 있기에 인간은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기억하려고 하고 또 더 체험해 보려고 하고, 기록해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시간을 인식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자기 존재에 대한 내레이션의 증거물(또는 기념물)이 일기 또는 자서전이라면, 공간 이동을 인식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증거물이 여행기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과 공간은 원래 별개의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또한 책과 여행 역시 별개의 것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한 받아들이기 위해서 책 한 권 싸 들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짤막한 여행기를 하나 써 둔다면 미래의 자신에게 멋진 편지가 될 테니 말이다.
<홍병기 / 웹진‘iharuki.com’ 편집장/대한항공 SK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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