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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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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의 <모래톱이야기> 평론
낙동강변 농민의 삶
얼마 전까지도 최고 원로로서 문단을 지켜 온 요산(樂山) 김정한 선생이 1996년 11월 28일 낙동강 파수꾼으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1936년 「사하촌(寺下村)」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1940년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으로 한글 사용이 금지되자 절필을 했다.
「모래톱 이야기」(1966)는 작가가 25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지주의 횡포와 그에 대한 농민들의 항쟁을 그린 「사하촌」 시대(1930년대)의 작가 정신은 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도 연속되고 있다. 절필 기간에도 작가 정신만은 늘 깨어 현실을 주시했던 것이다.
작가는 평생 부산에 살면서 낙동강변 농민들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려내었는데, 「모래톱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서두에는 작가로 하여금 다시 붓을 들게 한 이유가 적혀 있다.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 - 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세상에서 지나치거나 버려지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그것은 낙동강변의 조마이섬이라는 공간과 거기에 살고 있는 농민 계층을 통해 구체화된다.
「모래톱 이야기」는 건우의 가족, 즉 갈밭새 영감 일가의 삶을 축으로 조마이섬에 사는 농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모래톱(조마이섬)의 공간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자기가 사는 고장 - 복숭아꽃도, 살구꽃도, 아기 진달래도 피지 않는 조마이섬은,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 갖은 풍상과 홍수를 겪어 오는 동안에 모래가 밀려서 된 나라 땅인데, 일제 때는 억울하게도 일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다가 해방 후부터는 어떤 국회 의원의 명의로 둔갑이 되었는가 하면, 그 뒤는 또 그 조마이섬 앞 강의 매립 허가를 얻은 어떤 다른 유력자의 앞으로 넘어가 있다든가 하는 - 말하자면 선조 때부터 거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오던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소유자가 도깨비처럼 뒤바뀌고 있다는, 섬의 내력을 적은 글이었다. 그저 그런 정도의 얘기를 솔직히 적었을 따름인데, 어딘지 모르게 무엇인가를 저주하는 듯한, 소년의 날카롭고 냉랭한 심사가 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이 붙여 먹는 땅의 주인이 되어 보지 못한 사람들, 땅을 파먹고 사는 농민들이기에 ‘땅’은 그들에게 더욱 문제시된다. 김정한의 소설들은 주로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농민들과 그 주인인 지주와의 문제들을 파헤친다. 이러한 그의 농민 소설들은 소작인과 지주의 대립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 1930년대의 작품들과는 달리 소작인의 삶과 아픔 자체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 건우와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 그리고 윤춘삼 씨에게는 그들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가슴속에 땅에 대한 원한이 깊이 서려 있다. 한편에는 이러한 분노를, 또 다른 한편에는 “없는 놈이 할 수 있나. 그저 이래 죽고 저래 죽는기지 머!”와 같은, 삶에 대한 절망과 한탄을 동시에 머금고 있는 이들이 그들이다.
작품 후반부의 홍수 사건을 통해 작가는 현실의 모순을 고발한다. 사흘 동안 계속된 비로 낙동강은 범람하고 조마이섬도 물에 휩쓸릴 위기에 처한다. 유력자들이 매립(埋立)을 명목으로 쌓아 놓은 둑 때문에 위험은 더욱 심각해진다. 둑이 터져 물이 넘치면 조마이섬은 삽시간에 쓸려 갈 수밖에 없다. 갈밭새 영감을 비롯해 둑을 허물기 시작한 섬사람들과 이를 저지하러 온 유력자의 하수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 갈밭새 영감은 그들 중 한 명을 물 속에 집어 던지고 만다. 갈밭새 영감은 살인죄로 구속된다. 그는 선량한 다수의 목숨을 살리고 법과 유력자의 배짱에 희생된 것이다. 조마이섬의 진정한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려 했던 갈밭새 영감과 섬사람들, 둑을 허물려는 그들의 행위는 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저지당해야 하는가? 왜 살인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행위까지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가?
갈밭새 영감의 구속 이후 더욱 황폐해진 모래톱은 농민의 패배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가꾸어 가는 이들의 자세에 있어서 승패의 문제는 무의미하다. 갈밭새 영감은 삶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건강하고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
이들의 건강한 삶과 함께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 낙동강변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홍수로 낙동강이 넘치려 하자 주변 사람들은 물구경을 나선다. 이들에 대해 작가는 냉소적 시선을 보낸다. 그런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들은 장대 끝에 접낫(자그마한 낫)을 연결해서 물에 떠 내려오는 생활품들을 건져 내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작가는 “누구에게도 보장을 받아 오지 못한 절박한 생활을 읽었다.”고 적고 있다. 주위의 시선을 가리기에는 그들의 삶은 너무나 절박했다. 여기서 냉소적이었던 작가의 시선은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누그러진다.
분신과도 같은 땅에서도 소외당하고 유력자와의 싸움에서도 어이없이 당하는 농민들이지만, 그들의 끈질긴 생활력에 대한 작가의 믿음과 기대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농민들의 삶이 교조적(원리·원칙에만 얽매이어 융통성이 없는 사고)으로 흐르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도 굳건한 믿음이 작가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래톱 이야기」에는 그의 문학관 일부도 드러나 있다. 다음은 갈밭새 영감과 작중 화자인 나의 대화 내용이다.
“우리 거무란 놈 말을 들으니 선생님은 글을 잘 씬다 카데요? 우리 섬에 대한 글 한 분 써 보이소. 멋지기! 재밌실 낌데이. 지발 그 썩어 빠진 글을랑 말고…….”
“썩어 빠진 글이라뇨?”
가끔 잡문 나부랑이를 써 오던 나는 지레 찌릿해졌다.
“와 그 신문 같은 데도 그런 기 수타(많이) 난다 카데요. 남은 보릿고개를 못 냉기서 솔가지에 모가지들을 매다는 판인데, 낙동강 물이 파아랗니 푸르니 어쩌니…… 하는 것들 말임더.”
썩어 빠진 글과 살아 있는 글에 대한 갈밭새 영감의 생각은 문학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기도 하다. 이는 평소 문학보다 생활을 우선시하는 작가의 생활 태도와도 부합한다. 그의 작품의 사실주의적인 색채는 바로 이러한 문학관의 소산이다. 문학사적으로 60년대 후반 김정한 소설의 이러한 특징은 70년대의 리얼리즘(사실주의)이라는 건물이 굳세게 올라갈 수 있게끔 한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독서평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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