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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겨보는 진보의 의미

세계화 시대에 다시 새겨보는 진보의 의미

김동춘/참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동서독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진 지 7년의 세월 이 흘렀다. 짧은 기간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참으 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만큼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 엇보다도 역사의 종말이니 자본주의 문명의 전세계적 제패니 하는 시장 문명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회의 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물로 치부되는 현 실이다.
오늘날 임금 올려 달라고 외치는 노동운동은 기업의 발목을 잡고 국가의 경쟁력을 낮추는 구시대적 운동으로 비판받게 되었으며, 전 세계를 무대로 공장 세우고 물건 팔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재벌 총 수들은 국가의 미래를 짊어진 애국자나 국가 발전의 첨병으로 칭송 되고 있다. 모든 일간지는 인터넷을 모르면 시대에 뒤쳐지는 사람 이라고 아침마다 우리를 협박하고 있다. 또한 신문의 광고 지면은 이 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고서 살 아가려 하는가“라며 윽박지른다.

<아찔한 속도감과 헷갈리는 ‘진보’와 ‘보수’>

정말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진보를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해외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으로 제주도 가 본 것이 고작이던 가족이 사 이판, 발리, 호주,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수천만 원 들 여 대학 다니는 자녀들을 미국에 1년씩 어학 연수 보낼 수 있게 되 었다.

어디 그뿐인가? 뒷골목 자취방에서 한국사회의 변혁을 고민하던 우리들의 친구 중 어느 사람은 수백만 원 버는 영어 과외 교사가 되었고, 끝까지 한국을 떠날 것 같지 않았던 어느 사람은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학업에 정진하고 있다. 세계의 문은 넓어졌고, 넓어 진 문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 다. 그러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하면서 자꾸만 왜소 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달래고 있다.

이제 80년대의 ‘진보’는 ‘보수’가 되었다. 거꾸로 80년대의 ‘보수’는 ‘진보’가 되었다. 오늘날 보수적이라는 말은 시장의 작동을 억제하는 저 낡아빠지고 비효율적인 관료 기구, 국가 간섭 주의, 복지 등의 개념과 함께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는 과거의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합쳐져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저 ‘민족 해방’의 전진기지라고 칭송되던 닫힌 ‘공화국’ 북한을 방문하여 그 우두머리와 악수하면서 상호 협력을 약속한 사람은 남 한의 운동권 인사가 아니라 바로 보수의 상징, 재벌 기업의 총수였 다. 나진, 선봉 경제특구를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남한의 주사파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기업가들, 기술자들이다.

북미 자유무역지대(NAFTA) 협정 비준을 둘러싸고 극우 정치가 들과 노동조합이 힘을 합쳤다. 미국의 극우 정치가 부케넌이 미국 의 국가 이익과 공장 이전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자 노동자들이 열 렬하게 박수를 보냈다. 공장을 과감히 외국으로 이전하여 후진국의 값싼 노임을 활용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그것을 반대하는 노동자들이야말로 ‘보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기술을 도입하고 경영 합리화를 해야 돈을 더 벌고, 기업이 돈을 벌어야 세금을 많 이 내고, 일자리도 만  수 있는데, 그것을 반대하는 노조는 보수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 구조를 전면적으로 쇄 신하기 위해서는 민영화가 불가피한데, 민영화를 반대하는 노동자 들은 보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어제의 ‘진보’는 오늘날 영락없이 ‘보수’가 되었다. 사회과학 서적 읽고 팸플릿 작성하느라 영어 배울 생각도, 또 여유도 없었던 어제의 진보적인 젊은이들은 오늘 영어를 가장 못하는 보수적인 인사이다. 오로지 민족문제나 한국사회의 변혁에 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젊은 시절을 열정을 갖고서 몸부림치던 사람 은 세계 정세에 가장 눈이 어두운 우물 안의 개구리, 가장 보수적 인 인사가 되었다. 인터넷 사용할 줄 모르고, PC 통신 사용하는 데 도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확실히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 는 보수적인 인사이다.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토플공부와 영어 회화에 열심인 젊 은이들 앞에 젊은이의 사명, 대학의 의미, 사회 정의를 거론하면서 오늘의 세태를 한탄하는 80년대 말 학번의 늙은 복학생 선배는 확 실히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이들은 매일 세계 모든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접하면서 기업의 생존과 자신의 발전을 결부시키고 있는 일류 기업에 다니는 진보적 동료들 앞에서 낡고 뒤쳐진 자신을 발견한다.

<‘해방’을 몰아내고 ‘기술’이 차지한 진보라는 자리>

진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앞서가는 것이다. 앞서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각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 가는 것이다.

80년대의 진보가 왜 지금은 보수가 되었는가, 그리고 80년대는 보 수라고 생각했던 것이 왜 지금은 진보가 되었는가? 가다가 갑자기 뒷걸음질쳤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답은 오직 한 가지다. 진보의 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 다. 진보에는 왈러스타인(Wallerstein)이 말한 것처럼 두 가지 종류 가 있다. 하나는 ‘해방으로서의 진보’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로 서의 진보’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우리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인 도한다.

굶어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 몸이 아파서 사경을 헤 매는 사람에게 약과 의술로서 병을 낫게 해 주는 것, 그것은 진보이 다. 기술은 인간을 가난, 고통, 질병, 죽음, 불편함으로부터 점차 벗 어나게 해 주었다. 60년대 이전의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자. 얼마나 많은 아기들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사라졌으며, 미처 철들기도 전 에 몹쓸 병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 앞에서 죽어 갔는가? 그 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의 고통을 받았으며 또 지긋지긋 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범죄, 무작정 상경, 비관 자살을 감행하였 는가?

기술은 생산력을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각종 운송, 통신 수단을 발전시켜 거리의 장애를 극복하게 해 주었고, 인간을 짓누르던 온갖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기술로서의 진보는 반드시 인간 을 신분적 차별, 인격적 모독, 계급간의 간격, 사회적 소외와 배제로 부터 해방시켜 준 것은 아니었다.

자유와 평등은 기술로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운 자존심을 갖고서 살기 위한 투쟁으로서 얻어진 것이다. 인간은 빵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돼지의 행복, 노예의 행복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대접받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으며, 별 다른 이유 없이 차별 받거나 배척받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다운 행 복감을 누릴 수 있다. 물론 배고픔과 질병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 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배고픔과 질병으로 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자존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진보의 다른 차원 즉, 해방으로서의 진보가 존 재하는 것이다. 해방으로서 진보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인간이 줄기 차게 추구해 온 바이며, 우리의 경우 조선조 말기 농민들의 저항에 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기술로서의 진보와 해방으로서의 진보는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자 어느 쪽도 일정하게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진보의 성과를 누 릴 수 없고, 그리고 한쪽이 완전히 충족되었다고 해서 곧 진보가 달 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산력 발전과 물질적 풍요는 야만, 차별과 폭력을 수반할 수 있으며 인간다운 자존심의 회복은 물질적 궁핍 속에서 누리는 초라한 선물일 수도 있다. 인간다운 삶 의 도정에서 차별과 억압은 죄악이지만 배고픔 역시 죄악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의 이행은 바로 진보 개념의 완전한 역전을 의미한다. 즉, 해방으로서의 진보가 이제는 기술로서의 진보로 완전 히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해방의 편린들은 모두가 부정되고, 기술과 관련된 모든 것은 찬양된다. 오늘날의 혼란은 여기에 기인하고 있다.

<‘소수를 위한 진보’ 뒤에 남겨진 것들>

오늘의 진보는 바로 기술의 진보, 그것을 통해 모든 사람이 경제 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진 보하고 있다는 것과 모두가 기술 진보와 경쟁력 강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요즘 요란스럽게 들려 오는 정보화의 문제에 관련지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95년 현재 세계의 인구는 60억이며, 1억8천만대의 퍼스널 컴퓨터가 사용되고 있다. 그 중 3%만이 네트워크로의 출입 가능성 을 갖고 있다고 한다. 95년 1월 현재 인터넷에 접속된 950만대의 컴 퓨터 중 60%가 미국에 속한다. 세계적으로 2천 내지 4천만이 네트 워크를 사용하는데,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서 는 1000명당 10개에서 18개, 캐나다와 일부 서유럽 국가에서는 5~10 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는 1000명당 1개의 선로도 확보되어 있지 않다. 95년 현재 미국에서는 4,000만의 가정이 컴퓨터를 갖고 있다. 그런데 5만4천 가구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소 득이 1만불 미만인 가정에서는 4~8%만이 컴퓨터를 갖고 있다는 것 이다. 3만4천불의 수입을 가진 가정에서는 20~30%, 7만불을 넘어야 일상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그들 가운데 60~65%가 컴 퓨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인터넷 열풍은 미국에서도 다분히 과장된 것임을 대 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인터넷 정보의 사용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기업이라고 한다. 즉 정보는 제1세계의 중간층 이상의 고학 력자, 기업인들에게만 유통되고 있고,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에게 정 보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의 철도가 그러하였듯이 정보의 원활한 이용은 기업 활동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정보화는 그 기술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정보화는 정보에 접근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불리해지는 수많은 인구를 남겨 두게 될 터이고, 우리는 이러한 정보화의 그늘 을 치료하는 데 더욱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할지 모른다. 즉 문명의 쓰레기가 쌓여가면서 새로운 불평등과 소외가 생겨나고, ‘소수를 위한 진보’의 뒤편에는 고통받는 다수가 신음하게 되는 것이다.

<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

전세계적인 차원에서의 환경의 파괴는 바로 진보의 과정에서 버려 진 쓰레기의 축적이다. 소비자인 우리 모두는 환경 파괴에 약간의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와 사막화, 이상 기온, 삼림 황폐화 등은 19세기 이래 성장 전략을 채택해 온 1세계 사람들이 주 로 조장한 것이다. 그 중에도 주요 책임자들은 자본가들이다. 자동차 를 만들어 파는 사람에게 공해는 관심 밖의 일이다. 소비자들의 기 호에 더욱 접근하기 위해 병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음료수가 팩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아름드리 원시림이 베어져야 한다.

유럽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편리하게 되기까지에는 아프리카의 사 막화라는 엄청난 대가가 치러져야 한다. 식량과 물 부족으로 신음하 는 씰리카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유럽으로 탈출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르완다나 소말리아의 비극, 프랑스 지하철에서 의 폭탄 테러 사건 등은 유럽인의 제국주의 침략, 그로 인한 아프리 카 국가 내에서의 정치적 불안, 환경의 황폐화 등이 맞물려 전개된 결과들이다.
선진국은 자신이 저지른 업보를 테러, 이민 인구, 범죄 등으로 치 러야 한다.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은 근본주의적 종교운동, 마약과 범 죄,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의 이주 등을 통해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 을 극복하려 한다. 자국도 이들을 어루만져 줄 수 없고, 유엔이나 국 제인권단체는 너무나 힘이 미약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화된 자 본주의는 바로 과거의 조직된 노동자 대신, 전세계에서의 조직되지 않는 저항, 즉 게릴라식 항쟁인 범죄와 테러, 인구 이동 등에 직면하 여 신음하고 있다.
이른바 세계화 시대, 이제 진보라는 개념은 오로지 기술, 경쟁력으 로만 표상되는가? 이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역사의 종 착점에 와 있는가? 필자의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기술 및 국가 경쟁력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개념 을 체계화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세계화 과정에서 발생 하는 쓰레기를 치우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해주는 사회를 건설 하기 위한 새로운 진보의 개념을 이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한 나라만의 진보 만으로는 우리가 그 진보의 열매를 누릴 수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불평등과 소외, 환경, 인구이동, 범죄, 인권 등의 문제는 그 자체가 이미 세계적인 것이 되었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사안들 이다. 물론 이러한 진보의 개념에는 아직도 우리 학교 현장이나 사 회 전반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세계화 이전의 낡은 사회의 병리들을 삼제(芟除)하기 위한 기획이 포괄되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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