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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 아버지의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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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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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는 과연 세기말답다. 현상적으로 볼 때 우리사회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현란하게 변하고 있다. 어느새 80년대는 기억하기조차 구차스러운 과거가 되어버렸다. 과거의 회상은 시대부적격자들의 자기 도취와 자기 연민에 불과한 것으로 재단되었다. 97년 가을까지만 해도 우리는 경제적인 북부에 속한다는 자부심에 턱없이 가슴 뿌듯해했다. OECD에 가입한 나라로서의 품위 유지에 부산스러웠다. 우울한 역사와 심각한 정치경제학으로부터 벗어나 참신한 문화정치학을 지향하는 신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들 했다. 말하자면 변화된 세계를 노래할 새로운 서사와 새로운 인류가 요청된다고들 했다. 정치적 중압으로부터 벗어난 가볍고 발랄한 삶이야말로 그런 품위 유지에 합당한 삶의 형식이었다.
노동과 여가는 분리되었다. 자가용을 타고 고향을 방문하는 일이 꿈만은 아닌 세상을 맛보았다. 도시의 아버지들은 주말이면 가족을 태우고 너나 없이 문화와 여가를 즐기기 위해 길 위에 나섰다. 길 위에서 체증으로 허비하는 시간마저 중산층의 평균적인 삶의 대가라는 생각에 위로받았다. 화염병으로 상징되는 80년대의 대학문화를 패러디하듯, 90년대의 대학생들은 여유 있게 어학 연수를 떠났다. 성가시기 이를 데 없는 공동체의 삶 운운하던 시대가 지나간 것에 모두들 환호했다.
마음껏 욕망을 충족시켜도 거칠 것 없는 도덕적 불감증 시대가 욕망의 민주화 시대로 등치되었다. 범람하는 욕망 앞에서 눈치보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 그래서 세상은 모처럼 살아볼 만하다고들 했다. 그런 욕망이 주는 천국과 지옥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양면성의 시대가 90년대 초,중반이라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러나 세상은 또다시 변했다. 헛된 세계화를 내세우지 않아도 우리가 이미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얼마나 구속되어 있는지, 그것을 절박하게 깨닫도록 만든 것이 소위 말하는 IMF 체제 아닌가.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속한 한국은 자본주의의 무제한적인 공간 팽창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금융자본의 무차별적인 이동에 따른 거대한 욕망의 기류가 수상한 전선을 형성함과 동시에 한국 경제는 일시에 거품경제로 판명되었다.
6, 70년대의 근대화 구호에 발맞춰 불철주야 일했던 고단한 아버지들은 자신이 일궈온 과거가 한순간에 환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저 허탈할 따름이다. 희끗해진 나이에 구조조정으로 명퇴한 아버지들의 처진 어깨를 받쳐줄 사회보장제도도 없다. 미래의 아버지가 될 대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실직자 대열에 서게 될 것이다.
경제적인 공포가 확산되자 초라해진 현실의 아버지를 절대적인‘신(神)’의 아버지로 분장하느라 분주하다. 유신 시절 근대화란 당근과 독재의 채찍을 병행했던 독재자를 영웅적인 아버지로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인화)이라고 한다.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가족사진에는 언제나 빠져 있던 아버지의 자리. 그렇게 일한 결과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아버지의 비애를 자극하는 멜로물이 극화되고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가족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아버지를 책임져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아버지 혹은 남편의 기가 살고 죽는 것은 여자의 손에 달렸다는 억지가 여자의 도리로 포장되어 나선다. 또다시 신성가족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는 논지가 부풀어오른 수소풍선처럼 떠돈다. 요즘 들어 아버지의 거세가 전적으로 여성 해방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한 어머니들 탓이기나 한 것처럼. 이런 논리가 누구에게 봉사하고 있는지는 IMF라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어려운 시기마다 허세 좋았던‘크고 작은’아버지들은 어디로 가고 과부하된 책임과 의무만이 어머니들에게 되돌아오는가. 우리의 아버지들이야말로 ‘큰’ 아버지들에 의해 이미 거세되었던 아버지들 아니었던지부터 먼저 의심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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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아버지들의 과거를 극화시킨 이야기다. 이야기를 통해서 본 아버지의 역사는 아버지의 패러디였다. 상처 많은 우리의 오랜 역사에서 가문을 중시하는 봉건적인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와 역사의 담당자로서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긴장과 갈등의 우화가 곧 아버지의 역사였다. 사실 국가/민족공동체의 법 질서와 혈연 가족의 가족 윤리가 일치하면 오죽 좋겠는가.
하지만 양자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마다 가족의 이해관계는‘법의 이름’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었다. 국가가 법의 이름을 강제하려면 그것이 개별가족에 선행하는 공동의 선임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는 공동의 선을 보장하기는커녕 국가라는 아버지가 그 역할조차 포기한 사례로 가득 차 있다. 그럴 경우 국가라는 ‘큰’ 아버지에게 소환되어 가족장이 된 우리 아버지들의 위상은 어떻게 되는가. 가족장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자신을 아버지로 만들어준 기원을 배반하든지(친일을 한다든지 해서 역설적으로 아버지이기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영웅적인 아버지가 되기 위해 가족의 아버지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양자의 딜레마에서 우리 문학은 아버지의 일그러진 초상을 그려내게 된다. 일제 식민지 시절 사실 모든 애비는 종이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치욕스러웠다. 그들은 어머니의 땅이 유린되는 걸 목격해야 했고, 아들은 학도병으로 딸은 근로정신대가 되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 치욕스런 아버지와 절연하고 싶었던 것이 신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고아의식이다. 고아의식은 아버지의 부정이다. 그런 다음 우리 아버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에 의한 광복이 뒤따랐다.
광복과 더불어 애비가 종이었던 시절은 외관상 끝났다. 하지만 6·25라는 내전이 초래되었다. 내전 동안 부자/형제 사이에도 애증의 죽순을 키워 죽창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죽는 걸 숨어서 보아야만 했다. 그들은 이혜경의 「가을빛」에서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의식으로 인해 죽을 수조차 없었다. 상심하지만 죽지 못하는 그들은 결코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또 다른 자들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의 자리에서 아버지이기를 포기했다. 그들 아버지는 거대이념을 위해 남로당이 되거나 아니면 우익이 되었다. 아버지는 바람처럼 떠돌았다. 그래서 집안에 아버지는 언제나 부재중이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집안에 남은 아버지는 ‘부족한 제가 어떻게……’를 되풀이하면서 침묵하는 다수가 되었다.
아버지의 침묵은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었다. 가치판단을 중지한 그들의 보신책은 아버지를 아버지답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뇌아처럼 체제에 복종하는 그들에게서 아버지의 권위는 증발되었다. 이래저래 부재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현실을 살아야 할 책임은 온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아이들을 돌봐줄 사회적인 안전장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럴 경우 아이들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책임아래 있었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아버지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 여성 없는 모성이었다. 모성은 사회, 역사적으로 어머니들에게 요청된 자리였다.
분단의 고착화는 군사독재로 이어졌고 군사독재는 개발독재로 접맥되었다. 개발독재 아래 모든 것은 경제논리로 환원되었다. 전쟁 뒤끝이라 지긋지긋한 굶주림과 헐벗음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탄압이든 견뎌낼 것만 같은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개흘레꾼’처럼 살았다. 근대화가 목표였던 유신체제는 근대화를 말하면서 중세로 퇴행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70년대의 경제적인 근대화는 충효라는 봉건 이념 아래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봉건제는 개인의 돌출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개인은 수직적인 전통에 편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유교적인 봉건문화는 농경사회에 기반한 윤리였다. 농경사회는 계약이 전 사회를 관통하지 않았던 신분제 사회였다. 이 사회에서 대가족의 족장으로서의 아버지는 전권을 행세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생산양식 자체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부여해주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농사짓는 데 있어서 아들의 스승이었다. 도롱뇽이 어디에 알을 낳는가에 따라, 까치가 나뭇가지 어디쯤에 집을 짓느냐에 따라, 그해 농사를 예비할 정도로 오랜 경험이 지혜로 연결되는 시대였다. 언제 못자리를 내고 언제 물꼬를 터야 하는지, 아버지보다 잘 아는 아들은 없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삶의 스승이었다. 아버지의 일은 곧 아들의 일이었으며 그런 연속성으로 인해 아들은 미래의 아버지였다. 따라서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효의 대상이었다.
반면 근대화는 아버지의 죽음 위에 서 있다. 신, 임금, 가족장 등과 같은 절대적인 아버지는 죽었다. 절대적인 아버지가 죽고 나면 그만그만한 크기의 왜소해진 아들들만 남게 된다. 파편화된 아들은 서로 평등한 수평적인 계약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수직적인 아버지와의 관계부정 위에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화를 말하면서 충효를 거론하는 것은 근대화의 패러디나 다를 바 없다.
어쨌거나 근대화는 대가족을 해체시켜 단출한 핵가족을 제도화한다.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파편화된 개인과 개인을 결합시키는 장치로서의 결혼에 이제 사랑이라는 연결고리가 등장한다. 하지만 사랑은 결혼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단 한 번의 사랑이 평생 동안 경제적, 정서적, 성적으로 충실한 동반자를 보증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런 단단한 결혼제도를 보증하기에 사랑은 너무나 허약한 장치다.
사랑은 계급적인 장애와 모든 제약을 한순간에 뛰어넘는, 다시 말해 도구적인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힘이다. 결혼은 안정을 지향하는 제도이다. 안정되고 구획된 삶을 교란시키는 사랑은 결혼에 장애요인일 뿐이다. 게다가 테크놀러지의 눈부신 발전으로 섹슈얼리티가 없는 재생산과 재생산이 없는 섹슈얼리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생물학적인‘자연’으로 유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젊은 여성작가들이 동성애라는 불온한 섹슈얼리티를 거론하거나 불륜의 나비 꿈을 꾸는 것도 하등 기괴한 현상이 아니다. 섹슈얼리티가 자율적인 범주가 됨으로써 결혼은‘선택’한 계약일 뿐이고 잘못된 계약은 언제라도 파기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가족 내에서 남편과 아버지의 위상은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섹슈얼리티의 해방으로 인해 반란을 꿈꾸는 여자와 아내 때문만이 아니라 그런 꿈과 반란을 가능케 한 사회적인 토대 때문이다.
근대화 이후 결혼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준 것은 엄청난 사랑타령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아니라 자본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기 위한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였다. 남편에게는 임금노동의 영역을 배치하고 아내에게는 집안의 영역을 배치하는 성별분업에 기초한 것이 핵가족이다. 아내는 내일의 고단한 전쟁을 치를 남편을 위해 휴식과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 대신 남편은 임금으로 받은 돈으로 가족의 생활을 보장한다. 여기서 사랑의 이름으로 가려진 것은 무상으로 제공되는 여성의 생산/재생산 노동과 섹슈얼리티이다.
가족은 계약이 침투하지 않은 자연적인 공간이며 고로 법/정의/권력이 지배하지 않는 사용가치의 공간이라는 것은 당위일 뿐이다. 근대화와 더불어 재편된 핵가족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돈으로 환산된다. 아들은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가상현실을 드나들면서 정보고속도로의 속도전을 들먹이는 아들 앞에서 농경시대의 느린 지혜를 말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스승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권위와 능력은 돈이라는 경제적 기호로 표준화되고 수치화된다. 월급을 가져다줄 수 없는 아버지는 더이상 아버지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씁쓸하게 보여주는 단편이 김소진의 「아버지의 자리」이다. 여기서 실직한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조차 부끄러운 아버지가 된다. 실직하여 수염이 덥수룩한 아버지가 부끄러워 아버지를 부정하는 딸아이 때문에 유괴범으로 취급되는 초라한 아버지가 근대화 이후의 아버지다. 근대화 이후 아버지에 대한 효는 노후보장보험이 대신한다. 자본의 법칙이 가족의 이상을 스스로 배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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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이 죽여버린 아버지를 슬퍼하면서 아버지를 살리자는 희비극이 연출되고 있다. 아버지 살리기에 편승하는 설익은 연민과 화해를 다룬 작품들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범람과는 달리,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와 사회적인 은유로서의 아버지가 긴장과 갈등을 빚어내는 접점을 지적하는 작품은 제대로 찾을 수 없다.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에서 착하고 성실하지만 경제적으로 실패한 가장은 이혼당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새가 되었다던가? 이동하의 『문 밖에서』 역시 시간의 풍화작용 뒤에 남루해진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보고 경멸해 마지않던 아버지와 타협한다. 아버지 노릇하기의 고단함을 경험하면서 아들은 자신 속에서 아버지를 쉽게 발견한다. 아들에게는 아버지를 죽이려는 살부 충동 자체가 아버지를 반복하려는 충동과 다르지 않다. 내 안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를 죽여야만 역설적으로 내가 아버지의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이 아버지로서의 나의 삶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시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남성작가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연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딸에게 아버지는 어떤가. 딸은 아버지의 이름에 값하는 문화적인 유산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 그 말은 아버지의 권위를 딸은 아무런 문제없이 내 것으로 동일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존의 질서는 아버지의 법이며 이 법은 아들에게 이어지면서 계보를 형성한다. 아버지와의 동일시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요즘 젊은 여성작가들은 너무 쉽게 아버지와 화해한다.
연민과 보살핌의 원리로 아버지를 수용해야 하는 것이 딸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장치가 죽음이다. 죽음은 친일파건, 부역자건, 남로당이건, 가해자건, 피해자건, 차별하지 않는다. 죽음의 공화국에서 차별이란 없다. 아버지라는 사회적 은유를 이처럼 자연현상으로 포용하게 되면 역사의 주체로서 아버지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대해 우리는 가타부타할 수 없게 된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 수용되고 이해되고 용납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혜경과 김인숙의 신작 소설에 드러나는 문제점이다.
『길 위의 집』에서 『그 집 앞』에 이르기까지 이혜경은 줄기차게 아버지의 집을 화두로 삼는다. 하지만 이번 단편집은 『길 위의 집』에서 은용이 보여주었던 칼날 같은 극적 비상이 없다. 『그 집 앞』에는‘아득하고’'그립고’‘쓸쓸하고’‘어스름한’등의 감상적인 형용사들이 남발됨으로써 시간의 황혼과 죽어가는 아버지의 그늘이 암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마치 한 오백 년쯤은 살아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린 무녀의 그것과 같은 피곤과 우울이 텍스트에 드리워져 있다. 이제 희망이라고는 없이 늙어갈 일만 남은 사람의 절망처럼.
「그 집 앞」의 화자인 나는 소실의 딸이라는 이유로 가정교육과 가문을 들먹이는 시어머니로부터 고통받는다. 한 아버지와 두 어머니가 한 집안에 살면서도 머리끄덩이를 휘어잡고 싸우는 광경을 본 일이 없는 화자로서는 지금도 그 시절이 다만 그리울 따름이다. 시어머니는 언제부턴가 며느리를 분재의 곁가지처럼 솎아내고 싶어한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점차 청각을 상실하게 되는 것마저 궁합이 맞지 않는 며느리 탓으로 돌린다. 고급공무원의 딸인 막내동서가 시집온 뒤로부터 시어머니의 가문타령은 더욱 심해진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술 마시는 것으로 억눌러두면서도 화자는 과거를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남편과 함께 몇 잔 한 옥수수술로 인해 구토를 하면서 화자는 자신의 과거도 함께 토하는 실존적인 통찰의 순간을 맞이한다. 두 어머니가 함께 앉아 산자를 만들던 풍경이 그토록 정겹고 그립기만 한 풍경이었던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현실이 체념으로 인해 온화한 풍경으로 윤색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인식에 도달하면서 화자는 상처입은 유년의 풍경을 직시하게 된다.
화자는 시어머니 역시 소실의 딸이었음을 알게 된다. 시어머니가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구역질나는 과거의 토사물을 흙으로 덮는다고 고통스런 과거가 우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혹은 아버지의 바람기로 ‘규범적’일부일처제 가족에서 일탈했을 때, 부끄러운 아버지는 대물림을 하면서 자녀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나비처럼 춤을 춰도 푸줏간집 딸은 여전히 푸줏간집 딸일 뿐이고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소실의 딸은 평생 소실의 딸이란 멍에를 안고 살도록 사회는 강요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자식의 현재를 구속하면서 사회적인 영토와 반목, 불화한다.
이혜경의 단편은 문제적인 아버지를 제시해놓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한다.「우리들의 떨켜」에서 딸은 문자 그대로 아버지에게 수혈을 해줌으로써 아버지와의 핏줄의식을 강화한다. 「가을빛」의 선희는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자신의 자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이 모든 것을 감싸는 것으로 귀결 짓는다. 아버지가 암으로 판명되던 날 집 안의 온갖 시계들이 고장났었다. “밤 사이 거대한 자장이 집 안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거실의 시계도, 주방 창턱의 시계도, 화장대 서랍의 시계도, 손목시계도 멈춰 있었다. 마치 기계적으로 분절시켜놓은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려는 듯이. 아버지가 암이라는 사실에 허무해진 선희는 그날 남편의 몸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임신하게 된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딸아이가 태어나고 아버지의 일회적인 삶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궁을 통해 또다시 삶을 얻을 것으로 선희는 예감한다. 「젖은 골짜기」에서 중년 화자는 역마살로 떠도는 아버지와 평행선을 유지한다. 어느 날 자신의 아들에게서 옛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다. 중년 화자는 거의 삼십 년 동안 새벽 여섯시에 나가 저녁 열두시가 되어 들어오는 생활의 끝에 조그만 의류회사의 상무가 된다. 그 결과는 명예퇴직이다. 그리고 보니 상무니 하는 사회적인 직책이나 월급 등이 ‘순장당하는 시종들에게 걸어주는 화려한 목걸이’에 불과해진다. 그는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가족들과 멀어지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된다. 마누라와 아이들의 얼굴조차 생소해진 뒤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아버지와 만난다. 중년 화자의 삶은 온 힘을 다해 죽음을 향해 뛰어간 삶이었다.
김인숙의 「어버지의 얼굴」은 아버지 노릇을 대신한 맏형의 죽음을 앞두고 자기변명에 바쁜 둘째의 눈으로 그려지고 있다. 죽음을 앞둔 형에 대한 연민과 몰염치한 중산층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변명하는 가운데서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의 고단한 일상을 탈출하려는 자극제로 도박에 빠져드는 남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그 화해의 방식이 문제일 따름이다. 『그 집 앞』을 관통하는 관심사는 죽음이다. 이와 같은 죽음을 “생성과 소멸의 우주적인 비의”라고 해석해버리면, 세속의 아버지는 실존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으로 비상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절대고독 앞에서 아버지의 어떤 과거도 용납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어설픈 온정주의와 감상은 역사적 반성이 요청될 때마다 시시비비 가릴 것 없이 모든 판단은 세월의 풍화작용에 맡기자던 수구적인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치열한 반성 없는 감싸안기가 우리의 역사에서 얼마나 부정적이었던가를 돌이켜본다면 모두에게 공평하려고 하지 말고 문제를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이 더욱 요청된다. 지난 세월 동안 군부 파시즘의 아버지로서 전횡을 휘두른 자도 죽음 앞에서는 무상하다. 그가 휘두른 무소불위의 권력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무상하지 않은가.
지금 이 시점에서 요청되는 것은 아버지를 연민으로 되살리는 데 가세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본의 논리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버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일이다. 그런 점검을 해볼 만한 탁월한 서사를 제공한 작품이 『홍어』다. 『홍어』는 아버지를 철저히 반성함으로써 틀에 박힌 초상화 같은 어머니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어머니를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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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홍어』의 첫머리를 읽다 보면 왈칵 짜증이 치민다. 이청준, 김원일, 이문열로 이어지는 어머니 열전의 그 구태의연한 모성을 회고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이들 소설에서 어머니는 양반가문 아니면 몰락한 잔반의 딸들이었던 만큼 양반 가문의 법도와 양반의식을 한결같이 내재화시킨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양반의식이 곧 인륜의 도리이다. 이들 어머니는 부재하는 남편을 대리할 아들의 입신양명에 모든 것을 걸고 산다. 『마당 깊은 집』과 『영웅시대』의 아버지는 좌익이거나 남로당이다. 그로 인해 부재하는 아버지들은 뒤에 남은 가족들에게 고문이나 신산한 가난을 물려준다. 『축제』에서 홀어머니는 아들에게 주고 또 주고 그것도 모자라 손녀에게 주다가 마침내 정신의 끝자락을 놓고 할미꽃이 된다.
『마당 깊은 집』의 어머니처럼 『홍어』의 어머니 역시 삯바느질로 연명한다. 그들은 가난‘했음에도’가 아니라 가난‘했으므로’ 오만한 존재들이다. 이들 어머니는 봉건적인 의식으로 현실의 간난 신고를 뛰어넘는 탈세속적인 인물들이다. 그래서 아들들은 어려운 시절마다 향수에 젖어 가난해도 품위 있고 당당했던 어머니를 회상한다.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지만 그 세상의 끝머리에 다시 서고 보니 “재봉틀을 돌리는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이” 세상의 전부라고 향수에 젖는 신경림의 시적 화자 역시 이에 해당한다. 『홍어』에 등장하는 소년 화자의 눈에 “이불 속을 뒤척이며 밤을 새운 어머니의 자리옷은 옷고름 하나 흐트러진 데 없이 단정한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홍어』의 어머니 역시 구린내나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도 정경부인의 품위를 잃지 않는다? 어려운 시절마다 유교적인 전통사회가 무슨 유토피아나 되는 것처럼 부추기면서 그 시절의 모성이 현재의 총체적 난국에 대한 구원인 양 설정하는 반동적인 현상이 되풀이되어왔다.
그렇다면 『홍어』 역시 그런 구태를 반복할 심산이란 말인가? 이런 성마름과 조급함은 어린 화자의 눈 높이에 독자가 끌려다니도록 만든 노련한 소설적 장치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세영은 “궁핍이 가진 에로틱한 생리”를 터득한 조숙한 소년이다. 어린 시절이라는 것 자체가 최근의 부르주아 가족의 발명품이라고 할 만큼, 가난은 어린 시절을 단축시킨다. 가난이 아이들을 조숙하게 만든다고는 하지만 세영의 조숙함은 뭔가 수상쩍은 조숙함이다. 직접화법의 대화체가 어린 소년의 목소리라면 서술문은 소년의 눈을 가장한 어른의 목소리다. 열세 살 소년다운 순진한 목소리에 중첩되어 있는 성숙한 성인의 목소리는 누구인가. 조숙한 어린 화자를 소설적인 관행으로 얼마든지 등장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연륜이 주는 지혜와 반성이 없었더라면 깨닫지 못할 것들을 조심스럽게 내비치는 이 성숙한 화자의 목소리가 노리는 효과는 무엇인가. 어린 화자에 걸맞지 않은 문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은 『홍어』의 성급한 읽기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면서 소년 화자의 인식지평을 넘어서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도록 만드는 세심한 기교로 연결된다. 독자는 복화술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내는 균열과 틈새에서 소년 화자의 어머니가 어머니이자 여성으로 부각될 수 있는 공간을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폭설이 내린 어느 겨울에서 다음해 겨울 한 해 동안 소년 화자인 세영이 경험하는 통과의례로 되어 있다. 눈이 오면 산골 마을은 철저하게 고립된다. 유부녀와 정분이 나서 야간도주한 아버지 때문에 이미 고립된 화자의 집은 눈으로 인해 완벽한 ‘적요’ 속에 폐쇄된다. 화자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죄를 대속하려는 듯 근신하면서 살아간다. 벌써 육 년째 아버지는 부재중이다.
하지만 어린 화자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결핍이 아니라 충만으로 느껴진다. 남편이 그리워 어머니가 남편 삼아 만들어준 가오리연을 날리면 ‘나’의 환상 속에서 아버지는 하늘을 나는 새이자 바다에서 유유자적하는 가오리가 된다. 어머니가 문설주에 매달아둔 홍어는 솟구쳐올라 하늘을 나는 가오리연이 되고 ‘나’ 또한 그런 가오리연과 함께 난다. 내가 아버지로 전이됨으로써 ‘나’는 어머니의 욕망이자 어머니를 욕망한다. 나는 어머니와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으므로 어머니에게 타자인 나를 보지 못한다. 모성의 탯줄을 끊지 않았으므로 내가 본 세상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져 있다. 이처럼 끊임없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나’는 충만 그 자체이다.
세영에게 열세번째의 겨울은 삼례의 등장으로 성에 눈뜨는 시점이 된다. ‘걸부생이’로 ‘나’의 집 부엌으로 스며든 삼례는 이들 모자를 외부로 매개하는 존재이면서 화자인 ‘내’가 어머니나 삼례와 다른 성임을 깨닫게 해준다. 삼례가 오면서 ‘나’는 더이상 어머니와 한 이불 속에서 자지 못하고 도장방에서 자게 된다. ‘나’의 자리는 삼례가 차지한다. 나는 몽유병자처럼 삼례를 미행하면서 성에 눈뜬다. ‘내’ 욕망의 성냥불에 비친 삼례는 ‘두메양귀비’였다. 나의 환상 속에서 발가벗은 채로 걸어오는 삼례는 유령이자 도깨비이며 선녀이자 그 모두였다.
삼례를 통해 ‘나’는 어머니의 욕망을 막연히 짐작한다. 삼례가 오기 전에 내가 본 어머니는 양반가문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자존심으로 인해 오직 아버지만을 기다리면서 정물화처럼 죽음을 살아갔다. “어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했으며 안방 윗목 재봉틀 앞에 흡사 만들어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으므로, 내겐 액자 속에 담긴 인물화처럼 안정감을 주었다.” 적어도 나에게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그리움의 자리’를 찾아 헤매는 정숙한 아내이며 다정하면서도 엄격한 어머니 자체였다. 적어도 ‘나’의 시선과 인식지평 안에서는.
삼례가 오면서 ‘나’는 어머니에게서 모성만이 아니라 여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떠돌이 삼례를 집 안에 들여앉히기로 마음먹은 다음부터 “수습의 진도에 가속도가 붙어 핑계만 있으면 당장 끌어안고 입이라도 맞출 듯한 태도를” 보인다. 삼례는 봉건적 이념의 수인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연인이자 어머니의 가슴앓이를 고치는 무녀이며 사업의 동반자다. 삼례의 자유로운 성애로부터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본다. 삼례는 어머니의 무의식이자 욕망 그 자체이다.
그녀는 거지이므로 재산으로부터 자유롭고 부모 없는 고아이므로 가문으로부터 자유롭고, 혼자이므로 성애로부터 자유롭고, 떠돌이이므로 마을 전통과 인습으로부터 자유롭다. 어머니가 그리워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삼례의 불안하고 불량한 자유였다. 마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삼례는 전복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남의 물건, 남의 남편을 예사로 훔친다. 내 남편, 내 아내라는 것이 제도적인 안전장치라는 것을 풍자라도 하듯이.
삼례는 보라는 듯이 일부일처제를 희화화하고 남성들의 이중적인 성 규범을 모방하며 패러디한다. 그녀는 사회가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의 거짓을 드러낸다. 그녀의 불량기는 죽어 있는 마을 전체를 흔들어 깨우는 마력이다. 겨울이 끝날 무렵 떠돌이 삼례는 홍어가 매달렸던 문설주에 씀바귀를 매달아놓고 떠난다. 문설주의 홍어는 씀바귀로 대체된다. 이 씀바귀는 어머니의 욕망이 아버지가 아니라 삼례임을 알려주는 부재증명이다.
삼례가 떠난 그해 여름 한 남자가 마을로 찾아 들어온다. 살림을 차렸다 달아난 삼례를 잡으러 온 그 남자에게서 ‘나’는 역전된 아버지를 본다. 그해 겨울 무렵 홍어처럼 부패하고 몰염치한 아버지의 행적을 알게 되는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어떤 여자가 ‘나’의 집에 아이를 버리고 간다. 그 여자는 아버지의 또 다른 여자였고 아이는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서 얻은 아이였다.
어머니는 친자식인 ‘나’ 이상으로 동생 호영이를 극진하게 보살핀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현모양처의 화신인가? 어머니는 호영의 이유식으로 먹일 달걀을 얻으려고 수탉과 암탉을 함께 사들인다. 그 수탉은 옆집에 사는 방앗간집 남자가 키우는 누룽지에게 물려죽는다. 이 사건 자체가 어머니의 원망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어머니는 옆집 남자와 더불어 아버지를 거세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되갚음은 얼핏 느닷없어 보이는 결말 부분에 잘 드러나 있다.
육 년 동안 진저리나도록 어머니를 기다리게 만든 아버지가 돌아온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가출한다. 아버지에게 보기 좋게 복수한 셈이다. 바람의 유혹에 바람둥이로 떠도는 아버지를 집으로 돌아오도록 주선한 인물이 삼례다.
어머니는 삼례와 공모하여 그 기다림의 자리에 아버지를 남겨둔다. 아버지가 오던 날, 어머니는 지아비를 뒤따라오면서 눈 속에서 씀바귀를 캔다. 씀바귀는 삼례의 환유적 표현이다. 씀바귀를 뜯으면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나 삼례가 되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아버지의 귀향으로 환상과 현실을 오가던 ‘나’는 추락한 아버지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아버지는 어색하게 몸을 꼬고 있는 ‘나’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세영이 사팔뜨기 눈은 아직 고치지 못했군.” 이 한마디에 ‘나’는 개안(?)한다. 아버지의 한마디로 인해 한순간에 ‘나’는 환상과 현실이 융합하는 상상세계에서 벗어나 현실로 걸어들어오게 된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돌아보았을 때,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삼례가 되기 위해 혹은 삼례와 더불어 살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삼례와 어머니 사이의 불량하고 위험한 욕망을 조심스럽게 인정하는 화자는 이미 어린 화자가 아니다. 여성 사이에도 사랑과 동료의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화자는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다. 남성작가가 여성의 여성성을 형상화하는 데는 자기검열이 있다는 사실을 예증이라도 하듯이 이 소설은 그처럼 조심스럽게 다중적인 화자의 목소리에 기대고 있다.
만약 『홍어』의 마지막이 아버지가 되돌아온 그날 밤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부패는 죽음 같은 흰눈으로 뒤덮였고 다음날 아침 흰 고무신을 신고 마당에 내려서는 어머니의 얼굴은 초례청에 들어선 신부 같았다라고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마 『홍어』라는 소설이 이 시대에 다시 씌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부패한 아버지에 대한 아무런 단죄도 없이 그 부패를 다소곳이 끌어안고 아직까지 어머니는 살고 있단다라는 우화로 마무리했다면 그런 어머니는 모든 면에서 부패한 아버지의 타락한 역사를 영속화시키는 노예의 도덕을 재생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무반성적인 과거로의 퇴행현상이 만연되고 있는 시대에 『홍어』는 신선한 충격이다.『홍어』는 전통적인 모성을 추억하는 것처럼 위장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어머니를 삼례의 분신으로 반전시킴으로써 독자의 허를 찌른다. 이런 반전에 의해 『홍어』는 아버지를 단죄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 문학사는 이제 ‘아버지는 홍어였다’라는 명제 하나를 첨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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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시대적 분위기가 주는 압력을 피하려고 『홍어』가 ‘아버지는 썩었다’라는 명제를 은근한 복화술로 말하고 있다면, 그런 가부장적 아버지가 자연스러운 인륜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탈신비화시킨 단편이「술래를 찾는다」이다. 이남희의 「술래를 찾는다」는 노골적이되 『홍어』처럼 자기 검열에 걸리지 않고, 「아버지의 얼굴」처럼 신랄하되 여유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모적인 아버지 죽이기/살리기의 이분법에 매몰되어 있지 않다.
「술래를 찾는다」의 화자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안습명 선생의 자세한 생애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라는 고소설투를 흉내내어 안습명의 엄격한 철학체계를 다시 쓰려고 작정한다. 화자의 이 발언은 안습명이 진리로 내세운 주자학이 소설과 다를 바 없다는 폭로의 출발점이다. 안습명의 전기인 이 단편은 아버지의 담론을 끝간 데까지 추적한 집요한 허구이다.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 술래는 숨어 있는 아이를 찾는 행위의 주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목 자체에 술래가 될 사람을 찾는다는 의미와 행위주체로서의 술래를 목적대상으로 삼아 정신분석해보겠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술래는 누구인가. 술래가 찾는 대상은 무엇인가. 주체로서의 술래를 분석 대상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럴 경우 술래를 분석하는 주체의 자리에는 누가 설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 단편의 핵심이다.
안습명은 주자학을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만든 이데올로그다. 수령 아버지를 위해 주체사상을 정립한 황장엽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황장엽이 두 체제를 오간 반면 안습명은 자기 이론에 충실하여 목숨까지 바친 인물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념에 의거해 습명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거부하다 사약을 받았다.
어려서 안습명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습명의 어머니 김씨는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시서화에 능통했다. 김씨는 당대 규범으로서는 당돌하고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그녀의 남편 안즙은 충효에 충실한 체제편입적인 인물이었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안즙은 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해 전란통에 처자식을 버리고(처자는 잃어도 다시 얻을 수 있지만 부모는 한 번 잃으면 끝이라는 효사상에 충실하여)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버린다. 그 이후에는 임금에게 충성하기 위해 원나라에 오랫동안 머문다. 그 바람에 김씨 부인은 사실 아버지 없는 아들에게 한풀이하듯 엄격하게 교육시킨다. 그러다 아들이 크자 김씨 부인은 아들만 바라보고 수절하지 않는다. 김씨는 스님과 함께 살면서 환암이라는 아들까지 얻게 된다. 고려시대에 과부의 재가금지법이란 악법은 없었다.
이런 연유로 안습명은 어머니의 아들이기를 포기하고 아버지 찾기에 몰입한다. 불교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안습명은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임금을 아버지로 섬긴다. 이후에 그는 명나라에 유학하면서 주자학에 경도되어 미개한 조선을 주자가례로 개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주자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안습명은 토속신앙과 결합한 불교를 사교로 만들면서 불교의 자리에 주자학을 세운다. 주자학을 열렬히 전파하려 한 이면에는 불교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안습명의 무의식이 작용한 탓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복수하듯 과부재가금지법을 제정하도록 하여 여성의 성을 구속한다. 하기는 여성의 성을 억압하지 않고 어떻게 신분질서에 의한 통치가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주자학이라는 공적 담론이 기실은 가족 로만스 안에서 성과 권력과 욕망의 각축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해진다.
이처럼 아버지 세우기는 그 시대의 성적 생산양식과 정치경제학이 조직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연계되어 만들어진다. 아버지는 관계 개념이다. 아버지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만큼 가족이라는 물질적 장치를 바탕으로 사회적, 제도적, 역사적,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아버지가 어떻게 관계짓고 있는지를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토대한 우리 사회의 재벌은 지주/머슴이라는 봉건적인 의식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농사짓는 아버지의 마음(농심)으로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에 응전하려다 맛본 쓴맛을 가족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전근대로 되돌아가 농사지을 농토도 없다. 그러므로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연출하는 아버지의 문제를 천착함 없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식으로 시간의 풍화작용에 아버지 문제를 내맡긴다면, 우리는 ‘한국적인’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이율배반과 부지불식간에 공모하게 될 것이다. (계간 문학동네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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