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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문화 침투의 현황과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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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숱한 나라의 문화 산업 - 영화, 노래, 그림, TV 드라마 등 - 이 수입되고 있지만 아직도 일본 문화만은 터부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일본 문화만은 안 된다."는 주장과 함께, "일본 문화도 개방해서 당당하게 맞서야만 진정으로 일본을 이기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 글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이 같은 문제에 대하여, 관념적인 '개방론'과 감정적인 '국수주의'를 뛰어넘는 논리를 보여 주고 있다.
600억 불의 적자를 생산한 거대한 '하청 공장'
최근 '태평양 시대'라는 말이 정부 여당과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즐겨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흥망 성쇠가 차례로 돌아가는 순서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겠건만 '태평양 시대'의 논리는 바로 그런 발상에 근거하고 있어서 아연 실색할 따름이다. 더욱 민망(憫 )한 건 '태평양 시대'를 전제로 하여 그 주역 국가가 한국과 일본임을 내세워 한일 관계를 신비화하고 미화하려는 시도가 집요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시도는 국가의 십년 앞을 내다보기를 거부하며 불과 몇 년간의 단기적 실속 채우기에 급급한 정권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방적인 관계를 쌍방적인 관계로 위장시키는 한일 관계의 장미빛 청사진이 한국에 그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한일 관계는 이미 국제 정치·경제적 메커니즘에 종속된 채 일본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적 고착화의 시점에 이르렀다. 한국은 국민 감정상의 차원에서만 일본과 대등할 뿐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국은 대일 무역 수지에서 1965년 국교 수립 이후 지난 1990년까지 26년 동안 한 해도 흑자를 내지 못한 채 600억 달러에 육박하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만성적인 대일 무역 적자는 수출이 증가할 때마다, 일본으로부터 기계와 공업용 원자재 그리고 부품 등을 수입해 오는 한국의 '후진적 가공 무역 구조'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산업 구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하청 공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국의 대일 기술 종속은 심각하다. 한국은 반도체를 세계적인 기술 성과로 내세우고 있지만 반도체를 만드는 시설재는 일본 히타치사의 제품이다. 하다못해 VCR 1대를 외국에 수출해도 출고 가격의 8%는 로열티로 일본 기업에게 돌아간다.
'경제 결정론'을 배격하는 그 어떠한 학자도 자본주의 체제하의 문화 경쟁력이 대체로 경제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한일간의 극심한 경제·기술 격차가 양국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또 그렇다면 '태평양 시대'를 앞세운 한일간의 '문화 교류'가 우리 정부에 의해 적극 추진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보아주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문화 침투의 현황과 본질을 규명할 필요성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확산되는 일본 문화 불감증
우리 사회에 일본 문화는 어느 정도로 침투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데에서 일본 문화의 가공(可恐)할 폐해의 개연성(蓋然性)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미국 문화는 지극히 외래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미국 문화의 침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의식을 갖고 있는 편이지만, 일본 문화는 같은 동양권 문화라는 유사성, 일제 35년의 강점, 해방 후 반민족적 친일파 등용과 친일 정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우리 자신이 못 느끼고 살아갈 때가 많다.
이제 일본 문화의 잔재는 우리의 전후 세대와 그 다음 세대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말할 필요 없이 정치와 경제의 대일 예속 구조가 빚어 낸 비극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국내에서의 일본 문화 확산이 무감각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우리의 문화적 불감증이다.
일본의 위성 방송을 시청하기 위해 파라볼라 안테나를 설치한 가구 수는 40만을 넘어섰으며, 부산과 대구 등 영남 일부 지역에는 섹스·폭력·외설 방송의 대명사로 알려진 일본 상업 방송의 전파마저 이미 침투하였다.
일본 대중 가요는 유흥가는 물론, 대학가 카페, 그리고 심지어는 중·고교 분식점에까지 침투하여 활개를 치고 있다. 국민 학생의 절대 다수가 일본 만화와 비디오를 즐겨 보고 있으며, 그 선풍적 인기는 가히 세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의 어린이 TV 프로그램엔 기모노 차림으로 일본 동요를 부르는 장면이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 국내 가수들은 일본에 열심히 드나들며 일본의 체취를 익혀 국내에 소개하기에 바쁘고, 그 틈을 타 일본 가수의 내한 공연마저 이미 이루어진 판국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은 탓인지 비행 청소년들은 하다못해 문신까지 왜색으로 하고 있으며 범죄마저 일본화 되어 가고 있다.
현재 정부가 하는 행태로 보아서는 빠르면 92년, 늦어도 93년에는 일본 영화가 '선별(選別)'이라는 형식으로 국내에 상륙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91년 초 문화부가 발표한 한국과 일본의 '문화 통신사' 연례 교환 계획 등 양국간 문화 교류 확대 방침은 일본 문화의 국내 침투를 공식화하고 가속화시킬 것이 틀림없다. 미제·일제 문화에 찌든 우리 문화의 자생력 확보는 외면한 채 보다 많은 외래 문화의 수입을 통해 우리 문화를 키우겠다니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문화 통신사' 계획은 정부가 한일간 정치·경제·기술 이전의 문제를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하기 위한 반대 급부로 일본에 일종의 선물로 내놓은 '들러리용 문화 정책'의 성격이 짙다. 이 계획이 국민의 여론 수렴은커녕 여론을 떠보는 시늉조차 내지 않은 채 은밀하게 짜여진 한일간의 외교 일정에 맞춰 돌발적으로 발표된 것부터가 그렇다. 그러나 문화는 정치·경제의 들러리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본의 문화 침투가 노리는 것은
정부가 문화를 정치·경제의 '들러리'로 무시하는 이유는 문화 보호를 위한 노력을 정권의 안보나 치적(治績)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용 또는 희생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부가 물가를 잡고 수출 실적을 올리는 것은 크게 생색을 낼 수 있는 일이지만 일본의 문화 침투를 막아냈다고 자랑해 봐야 알아 줄 사람들이 많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문화 침탈의 결과로 나타나는 국가적 손해는 그 형태를 감지하기 어려운 것인 만큼 다음 정권, 그 다음 정권이 떠맡을 것이니 크게 안달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그러나 문화는 분명 정치나 경제 못지 않게 중요하다. 여대생을 대상으로 한 어느 조사에서 체중 미달은 전체의 63%요, 체중 초과는 0.7%에 지나지 않으나 41%의 여대생이 자신을 체중 초과로 생각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깡마른 여성을 섹스 심벌로 상품화시켜 온 외래 대중 문화가 미치는 가공할 영향력을 잘 웅변해 주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 문화는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첫째, 문화는 삶의 총체적 표현 방식인 바, 일본 문화는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풍요에 겨워 퇴폐 향락에 탐닉(耽溺)하는 일본 문화를 우리가 수입하여 우리의 경제 수준에 앞서가는 사고를 하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들을 은폐하고 악화시킬 것이다.
둘째, 문화는 삶의 주요한 구성 요소인 바, 일본 문화는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물리적·심리적 여유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현대인의 삶에서 대중 문화의 소비 시간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에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셋째, 국가간의 문화는 경제 침략의 전단계로서 수출되어 경제 상품에 대한 시장 수요를 형성하고 진작(振作)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경제 침략은 문화의 탈을 쓰고 접근해 들어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넷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는 그 자체가 시장 논리를 따르는 경제적 상품인 바, 일본 문화는 한국 문화의 경제적 근거를 위협함은 물론 한국의 경제적 부를 축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문화 상품의 시장 경제력은 자본력과 기술 수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조차 한국 문화는 일본 문화에 열세를 면하기 어렵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화적 인간상
일본 문화든 미국 문화든 우리의 문화를 외래 문화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문화 투쟁'에 임해야 한다. 문화 투쟁은 단순히 애국심에 의존하여 일본 문화를 배척하자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문화를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면서 재창출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 문화랍시고 으리으리한 박물관에 '박제'시켜 보관해 놓고 행사 때나 끄집어내어 구경거리로 즐기는 건 죽은 문화이지 살아 있는 문화가 아니다.
여론 조사를 해 보면 우리 국민은 절대 다수가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적대감은 일과성(一過性) 감정의 문제일 뿐 경제·문화 상품의 소비와는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문화 투쟁이 사고나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과 실천의 문제여야 한다는 필요성이 발생한다.
우리는 문화를 끊임없이 삶에 밀착시키는 문화 투쟁과 더불어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문화의 하부 구조가 절대적으로 열등한 상황에서 일본 문화를 배격하자는 결의는 소수의 문화 운동가들에게는 얼마든지 실천 가능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지향하는 '자주적 문화'의 궁극적 주체는 일반 민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비판 능력이 성숙되지 않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문화 관세'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국내에 침투하는 일본 문화 상품에 대해서는 판매자와 소비자를 불문하고 높은 세금을 매겨 일본 문화 상품의 사용을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는 동시에 그 재원(財源)을 청소년의 건전한 놀이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대중 문화 소비자의 절대 다수가 청소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에 청소년을 일본 문화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문화가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 국제 경쟁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문화 개방론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문화의 외형적인 산업 기술과 문화의 내부적인 고유 가치를 혼동하는 일이다. 외국 문화의 산업 기술에 욕심을 내다가 자국 문화의 고유 가치를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다는 뜻이다.
물론, 어느 나라의 문화이거나 내부의 고유 가치도 변하기 마련이고 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변화의 과정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것이어야 한다. 외래 문화가 우리 문화를 압도하고, 그럴 듯한 외래 이론에 근거하여 외래 문화의 적극적 수용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횡행하는 우리의 처지에선 '문화적 국수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문화적 국수주의는 자국 문화의 폐쇄적 성향이 너무 강해 외래 문화가 발디딜 틈이 없는 상황에서 매도(罵倒)되어야 할 것이지 문화의 정체성(正體性) 위기를 맞고 있는 현 우리 상황에서는 이미 때늦은 감마저 없지 않다. 생각은 늘 세계적으로 하되 행동은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지역 사회의 차원에서 하는 '세계주의적 국수주의자'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화적 인간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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