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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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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기회와 희망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겪었던 것처럼,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나는 도와주고 싶습니다."
(The worst thing in the world is to live without opportunity or hope.
I want to help others who are trapped by social prejudice or their own lack of self-determination, as I once was.
▶ 서진규 프로필
1948년 경남 동래군 한 어촌에서 태어나 제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풍문여고를 졸업했다. 가발공장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하다가 1971년 미국 가정집 식모살이 하러 단신으로 도미하였다. 결혼한 이듬해 1976년 미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미국, 한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근무했다. 1990년 하버드 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학자의 길을 함께 걷다가 1996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현재 하버드 대학원 국제외교사 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다.
▶ 희망의 메시지
1. 나는 무슨 일에 도전하기에 앞서 항상 세 가지 리스트를 작성한다.
첫째,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둘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세가지 문제에 답변할 수 있다면 현재의 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을 도전하려는 나를 알고 있다면 그 희망은 이미 절반은 이룬 셈이다.
2.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벽, 그것이 내가 열어야 할 문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사람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렇다. 사람들도 하나님처럼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고 싶어한다.
3. 꿈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꿈꾸는 사람을 가혹하게 다룬다.
나 하나의 힘은 미약할 지 모른다. 아니, 분명 미약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의 누군가가 그랬고, 또 그 앞의 누군가가 그랬듯이, 외롭게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 서로 만나고 모여 물길을 이루고,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지 않은가.
▶ 그녀의 삶
영어잡지를 돌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내 희망의 등불은 좀처럼 켜지지 않았다. 등불은 커녕 높은 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내 성적은 대학 장학금을 받을 만큼 뛰어나지 못했고,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다.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967년, 열아홉 살의 나는 사촌언니를 따라 종로에 있는 가발공장에 들어갔다. 공장 안에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장에서 여공들은 저마다 사람모양을 한 나무통을 하나씩 앞에 두고 가발을 엮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멈췄던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위키 리의 <가는 세월>을 부르기 시작하자 여공들은 저마다 손을 열심히 놀려 가발을 엮으며 합창을 시작했다.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 있나요……."
노래 가사는 가슴에 사무쳤다. 나는 그 때 겨우 열 아홉이었다. 열 아홉 푸른 나이에 가발을 엮으며 '가는 세월'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문득 내 모습이 너무도 한심해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앉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내 꼴이 이게 뭐란 말인가. 가난했지만 고등학교땐 반장도 했고, 우등생이었는데, 내게는 희망이 있었는데…… 이게 내 운명의 종착역이란 말인가.' 자꾸 그런 생각이 울컥울컥 치밀었다.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발공장에 취직하면서 작은집을 나왔다. 동료 여공의 소개로 동대문 근처에 있던 육영수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육영수 여사의 배려로 나 같은 여공이나 점원 등 대체로 시골에서 올라와 일하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한방에 여섯 명이 함께 기거했다. 하루숙식비 40원에 아침과 저녁 식사가 나왔다. 우리 방에서는 내가 제일 어렸다. 모두들 언니처럼 내게 잘해주었다. 그들 대부분이 국졸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하고 있는 그들과 함께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나는 늘 불평만 일삼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들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일하던 나이에 나는 어렵게나마 학교에 다니며 공부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사회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여성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매일같이 떠오르는 '죽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했다. 희망을 갖고자 노력했다. 내가 희망을 가지면 그들도 희망을 가지고, 내가 희망을 잃으면 그들도 희망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1976년 11월 9일, 나는 스물 여덟 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군에 입대했다. 낯선 훈련병들과 함께 밤늦게 도착한 앨라바마의 포트 머클란란. 그곳은 내게 외로움부터 안겨주었다. 한국으로 떠나 보낸 성아가 몹시 보고 싶었다. 흐르는 눈물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며시 훔쳐가며 줄곧 성아만을 생각했다.
훈련은 무척 고달팠다. 성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열여덟에서 스무 살의 어린 훈련병들 틈에 끼인 나이 많은 동양인으로서, 팔 개월 밖에 안된 산후 여파에다 한달 전의 유산 후유증까지 겹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젊은 훈련병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손찌검을 하는 남편으로부터 피할 도피처로 삼은 군 입대이기에 더욱 남다른 각오가 있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교관들이 내리는 벌이 부당하게 느껴져 반발하고 싶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면 정말 다 포기해 버릴까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솟았다.
'서진규, 네겐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 죽음을 각오하면 못할 게 없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그리고 지금 너를 괴롭히고 있는 교관들은 너를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해도 네 장래와 맞바꿀 정도로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야.'
차별 속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돕겠다던 내가 이 정도 일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질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었고, 스스로 박차를 가하며 훈련에 임한 덕분에 두 달 동안의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우수 훈련병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얻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와는 또 다른 자신감이 내 안에 가득 차 올랐다.
첫 부임지는 한국, 서울이었다. 1977년 3월, 한국을 떠난 지 육년 만에 귀국하는 길, 비행기 연료공급을 위해 알래스카 공항에 잠시 착륙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내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사실, 주특기 교육을 마치고 내가 처음 받은 발령지는 독일이었다. 나는 훈련이 끝나면 당연히 한국으로 가리라고 생각하였다. 성아가 그리웠고 부모형제가 보고 싶었다.
'한국에 가서 자랑하고 싶었는데, 미국 가면 십중팔구 창녀가 될 거라고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나는 울었다. 울고 있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특무상사가 나를 달랬다. 한 달 동안 피를 말리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중대장이 자기 아는 사람들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육군본부를 설득한 끝에 얻어낸 한국행이었다. 나는 용산의 142 헌병대에 배치 받았다.
나는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나의 보급과 업무능력은 직속 상급부대의 검열관은 물론 8군의 최고 검열관들까지 인정했다. 우리 보급과는 8군 내 중대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검열을 통과했다. 나는 표창장을 받았고, 병장으로 특별 진급까지 했다. 영자 신문인 코리아 헤럴드와 코리아 타임스에 내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 사실은 나 자신의 가치를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내 주위에 있는 장교들은 나보다 계급만 높았지 능력은 나보다 더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표창장과 진급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여자도 남자 못지 않은 꿈을 이룰 수 있고, 가난하고 배경없는 사람도 도전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병의 신분으로서는 차별의식과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장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더욱 다지는 뜻에서 그 동안 접어 두었던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용산 미 8군 영내에 있는 메릴랜드 대학 분교에 등록했다. 다섯 번째 대학이었다. 나는 보급 주특기에 대한 실력만 믿고 병참준위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준위신청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경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준위가 되려면 최소한 십 년 이상의 전문경력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겨우 삼 년에 불과했던 것이다. 맥이 빠져 있던 어느 날, 특무상사가 나를 불렀다. 내게 간부후보생에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특무상사는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했다. 육군 소위!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정성껏 서류를 준비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합격통지를 받았다. 다시 한번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준위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 때 나는 새삼 절감했다.
'한 가지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라. 그 실패는 더 큰 성공으로 가는 우회도로일 수도 있다. 높이, 그리고 멀리 보라'
1996년 11월, 중령진급이냐, 하버드 박사과정이냐의 갈림길에서 하버드대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전역 명령서를 받아들자 손이 떨렸다. 자꾸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지난 이십년 동안 하루도 벗지 않았던 군복, 나의 피부 같은 군복이었다. 군은 계속 내가 남아 있기를 권했다. 나도 남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몸은 군을 떠나지만 군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 수업중에 읽는 155가지 이야기/교육부 독서지도 정책 연구학교/인천학익여고 자료
- 서진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북하우스,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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