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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적 독서론(我的 讀書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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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五榮(수필가)
독서란 남의 글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 목적과 방법이 같지가 않다. 혹은 학문을 닦고 지식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혹은 수양이나 흥미를 위해서, 혹은 도리를 깨치기 위해서, 그 목적에 따라 읽는 방법도 또한 하나일 수가 없다. 공리를 위한 독서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요, 독서를 위한 독서만이 진정한 독서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필요감에 읽는 면학도 필요한 독서다. 다만 나는 본성이 게으른 탓인지 면학의 공이 없다. 지식욕에서 오는 독서, 르모는 것을 알고 환희를 느끼고 자랑하던 열광도 이미 식어감을 느낀다.
이제 내 독서의 의의를 묻는다면 첫째, 자아발견이요, 둘째, 사색소재요. 셋째, 곡소의 광장이다. 다시 말하면 곧 내 생의 파악이요, 내 생의 방편일 뿐이다. 모든 것은 내가 있음으로 해서 있다. 그러므로, 나보다 더 가깝고 친한 것은 없다. 나를 스스로 아끼고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까닭이다. 또, 나 외에 나를 생각해 주고 아파해 주고 측은하게 여겨 주고 장쾌하게 생각해 줄 사람은 없다.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나다. 그러나 내 얼굴조차 나는 직접 볼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먼 것이 나다. 가까운 까닭에 친하고, 가장 먼 까닭에 그립다. 내 얼굴조차 그립거든 하물며 내 속의 마음이랴. 그러므로, 나는 떨어지는 꽃잎에서도 나를 찾고, 우는 벌레 소리에서도 나를 생각하고 지새는 달, 우거진 숲, 우뚝 솟은 돌, 졸졸 흐르는 물 속에서도 내 그림자를 건져 보는 것이다. 독서의 환희란 실로 그 글 속에서 나를 만나보는 즐거움이다.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낙구천'을 여산의 폭포로만 알고, 이 백의 흉중의 폭포인 것을 모르고, '삼고빈번천하계 양조개재노신심,을 제갈량의 심사로만 알고 두 자미의 눈물인 것을 잊을 것인가. 가인의 인도를 받아 연. 지옥을 뚫고 가자, 지고천의 모든 빛이 순백의 장미로 나타나는 것은 천상의 세계가 아닌 『단테』의 세계였던 것이다. 서제에서 독배를 들고 고민하다가 부활제의 종소리를 듣는 것은 「파우스트」가 아니요, 「괴테」의 허망이었던 것이다. 단도를 빼어 들고 왕의 침실로 향할 때, 그 주저와 결심, 의혹과 고민, 단념과 충동, 이것은 「맥베드」의 전율이 아니요, 「세익스피어」의, 긴장된 율동이었었다. 질풍 벽력에 휩쓸려 천 길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깨어라, 일어나라, 아니거든 영원의 멸망을' 하고 부르짖은 것은 「사탄」이 아니요, 「밀턴」의 절규였던 것이다. '모든 허위와 모든 병든 것과 생의 거침을 섬멸하라'고 외치는 독수리같이 강렬한 초인의 목소리는 「짜라 투스트라」의 목소리가 아니요, 「니이체」의 부르짖음이었었다. 병들고 가난한 노인이 안고 가는 불쌍한 개 「아소루카」가 도스도예프스키의 분신이 아닌 줄을 뉘 알며, 아무리 시정우부의 간음과 자살을 냉정하게 그려봐도 그 영혼의 동경과 과잉의 감성은 「보봐리」의 부인이 아닌 「플로베르」의 그것이었었고, 자기의 골수를 빨아먹어 달라고 구데기에게 호소해 봐도 '보들레르 제 손으로 제 살을 꼬집어 본 것 뿐이다. 한 마디로 해서, 이것이 천고의 인생들이다. 관세음이 19층신으로 화하고 억천 분신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이다. 내 그들의 글을 읽음으로써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 함으로써 내 천 길 속에 숨었던 나를 만난다. 이 얼마나 반갑고 기쁜 일인가 내 또한 관세음의 응신이요, 분신임을 안다. 늙어서 젊은이와 거리가 생김은 세대의 차가 아니라 늙기 전의 나를 잊음이요, 출세해서 교만함은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출세 전의 나를 잊음이요, 세속에 물들어 타락하고 영리에 휩쓸려 변질됨은 사람이 다른 게 아니라 그 전의 나를 잊음이니 한 마디로 해서 인간을 잃고 나를 잃은 것이 아닌가. 나를 오래 못 본 탓이다. 이제 책 속에서 천고의 인간들과 만나 그를 인연으로 숨어 있던 나를 만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가. 나는 매양 독서의 환희를 여기서 느낀다.
화로에 불을 피우면 주전자의 물은 끓는다. 물이 끓으면 물 위에 떴던 것은 밀려간다. 이것은 지극히 소박한 관찰이다. 동시에 지극히 미묘한 진리다. 증기 기관차를 비롯한 모든 발명은 여기서 비롯한다.
오늘 수소탄의 시대가 되도, 이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미묘하고 위대한 진리다. 모든 발명은 이 진리의 주해요, 실험일 뿐이다. 이 지극히 소박한, 그러나 지극히 위대한 진리를 몰랐다면 오늘의 문명은 없다.
나는 고전이란, 인간의 가장 소박하고 위대한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었다고 생각한다. 고전의 위대성은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는 데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는 것은 불멸의 진리가 담겨 있다는 증거다. 동시에 여러 사람의 사상을 배태하고 발전해 왔다는 데 있다. 전인의 글을 읽고 얻은 자기의 새로운 사색과 감흥을 적어 놓고 가면, 뒤의 사람이 또 그것을 읽고 얻은 자기의 새로운 사색과 감흥을 적어 놓고 간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의 정신 생활은 계속적으로 전해 왔고 발전해 온 것이다. 노자나 공자의 글을 읽고 맹자의 사상도 나왔고 순자의 사상도 나왔다. 맹자 장자를 읽고 이백같은 시인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나 노자에 머문 것은 아니다. 이 백은 이 백의 즐거움이 있다. 두보는 두보의 즐거움이 있다. 맹자를 읽고 맹자에 머문다면 지금 춘추 전국시대에 살아야 할 것이요, '세익스피어'를 읽고 '세익스피어'에 그친다면 지금 '엘리저배드'의 시대에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사람이 말하는 맹자는 당시의 맹자 그대로는 아니다. 나는 이 백 두보의 시를 읽고 내 인생을 음미하고 내 감흥을 노래해서 좋다.
나는 옛사람의 글을 읽고, 내 체험 위에서, 내 인생을 음미하며, 내 영혼은 천고미도의 사색의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독서는 나에게 무궁한 사색의 소재를 공급해 준다. 그렇다. 독서의 가치는 실로 이 사색의 소재인 점에 있다.
한 세상 잠시 다녀 가는 동안 가지가지 일을 겪어야 했다. 가지 가지 일들을 보고 들어야 했다. 무수한 감회를 느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일마다 울자니 '센치'한 아녀자가 돼야겠고, 일마다 웃자니 청량리 뇌 병원으로 가야겠다. 그러나, 한번 크게 웃고 크게 울어 봄으로써, 적이 후련할 수도 있다. 하나, 울 장소가 없다.
같이 웃고 울어 줄 사람이 없다. 이 때, 수만 리 밖의 잘 웃는 친구를 만나 한번 같이 웃어 보고, 수천 년 전의 잘 우는 친구를 만나 얼싸안고 크게 울어보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들은 일찌기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고, 때로는 통곡이 있었던 것을 나는 안다.
아니, 그들의 웃음과 울음은, 나보다 십배 백배 컸던 까닭에 내 좁은 웃음을 더욱 크게, 내 가는 눈물을 더욱 굵게 해 줄수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내 독서의 환희는 이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절에서 고승을 화장하고 나면 - 이것을 다비라고 하거니와 - 육신은 다 타 버리고, 몇 알의 녹두알 같은 구슬이 나온다.
이것은 득도한 이의 사리라고 해서 탑을 쌓고 길이 모신다.
천만 승려 중에도 사리가 나오는 고승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천지가 생긴 후, 무궁한 세월이 흘렀고, 그 동안 몇 억만 사람이 다녀 갔는지 모르며, 몇 억만 가지 사건이 있었는지 모른다. 다 같이 고난을 겪고, 다 같이 웃고 울다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인생을 생각해 보고, 느껴 보고 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또 그 중에서도 이것을 대변하고, 또 능히 기록하고 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비록 말하고 기록했다 해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후세에까지 전하고, 또 천 만 사람의 공명을 얻고 천만인의 손을 빌어 오늘 우리들이 읽고 즐길 수 있는 글이 진정 얼마나 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이것은 모두 한 줌의 사리다. 억천만 년의 억천만 인이 사라진 뒤에 남은 몇 알의 녹두 알 같은 사리다. 내 문득 챙장을 어루만지며 길이 차탄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글이 아니요, 억만 인의 글이다. 그 사람의 글일 뿐 아니요, 곧 내 글이기도 하다. 내 남의 글을 보고 웃고 우는 것도, 내 한 줄을 읽고 무궁한 사색에 잠기는 것도 곧 그것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또한 무한한 즐거움과 위안과 환희를 느끼는 것은 오로지 내 인생을 보내는 한 방편일 뿐이다.
글을 쓴 사람은 깊은 사색 끝에, 높은 충동 뒤에 참지 못해 붓을 들었다. 자기의 깊은 생각과 충동을 호소하려는 데서 붓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이란 그렇게 편리한 기구는 아니다. 여기서 작자는 표현의 고심이 있고, 독자는 깊은 조예가 요구된다. 언어의 의미나 천착하고 편언척구의 분석에만 몰두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문장을 말할 수 없고, 전설의 부회나 전인의 평주에만 집착하는 사람과는 족히 문장을 의논할 수 없다. 문심과 문안이 없으면 문리와 문정을 모른다고 했다. 글 속에서 작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고, 남의 고심의 흔적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남의 글을 읽으려면 먼저 내가 서야 한다.
내가 없이 어찌 남을 알랴, 그러나 한강의 자로 천길의 물을 재려함이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오직 내 자를 기르고, 내 자의 길이만치 읽을 수 밖에 없으니, 나머지의 심충은 심사로 상량하는 수밖에 없다.
대개 세간의 글을 읽음에 있어서, 한 마디를 읽으면 다음 말이 예상 될 것이다. 예상에 크게 어긋나지 아니하면, 내게 안이한 글이다.
예상과 어긋나면 더 읽어 스스로 밝혀지거나, 다시 읽어 내 오독과 부주의를 수정해 읽을 것이다. 예상과 비슷하되 내 생가보다 미흡하고 용렬하면 이는 하수의 글이라 족히 읽을 거리가 못 된다. 내 생각과 서로 드나들면 비로소 읽을 수 있는 내 친구의 글이다. 예상보다 항상 새롭고 절실하며 새로운 문제를 제기시키면 이는 상수의 글이라 즐겁게 읽을 수가 있다. 말이 항상 의표를 찌르고, 핍진한 감정이 나를 육박하며 미지의 여운을 남기는 듯 항상 심층의 저변을 울리면, 이는 범상하지 아니한 명문일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기에 족한 글이다. 처음 읽어 오직 황홀하고, 알 수 없는 향훈이 나를 도취시키고 참신한 예지의 섬광이 빛나가는가 하면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육박하다가 다시 보면 오직 망망할 뿐이다. 알 것도 같으면서 알 길이 없고 모르면서도 즐거움을 느낀다. 때에 따라 색광이 변하고 금방 평범하던 것이 다시 읽음에 비범함을 느끼고 무궁한 미지의 세계가 나를 고무하는 가하면,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기환이 나를 몽롱하게도 한다. 음악인가 하고 읊어보면 회화인 양 나타나고 진리인가 하고 생각하면 허망인 듯 쥐어지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사색의 무지개가 스스로 걷잡을 길이 없다가 책을 펴면 모든 것이 하잘 것 없이 사라진다. 읽어 뜻을 모르면서도 차마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어 온 몸에 배어든다. 이런 글이 있다면, 일생을 송독할 만한 위대한 기문일 것이다. 대소 심천의 도치가 무량으로 크기 때문이니 문장의 극치는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글이 과연 어느 글이며 얼마나 있을지 모르거니와 적어도 내가 장자를 대할 때면 항상 이것을 느낀다. 특히 '소요유, 제물론' 2편은 운문인 동시에 산문이요. 시인 동시에 철학이요 철학인 동시에 다시 문학이다. 근래 수필 문학이란 용어를 가끔 듣거니와, 진정한 수필의 극치는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모든 문학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장 경탄하는 글을 들어, 내 독서론의 끝을 장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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