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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술어에 유의하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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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두
서술어, 특히 동사에 관심을 갖고 글을 읽어보길 바랍니다.
실용문의 경우, 먼저 동사가 글 전체를 얼마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열쇠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자, 어떤 글 속에 '섞는다, 재워놓는다, 달군다, 굽는다, 익힌다'라는 동사가 나왔다고 합시다. 무엇에 관한 글일까요. 답은 쉽습니다. 음식물을 조리하는 방법에 관한 글입니다. 음식물은 바로 맛있는 불고기!
불고기를 만들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 커다란 그릇에 간장, 참깨, 참기름, 파, 마늘, 후추 등을 '섞는다'. 양념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양념에 고기를 '재워놓는다', 프라이팬을 '달군다'. 여기에 고기를 '굽는다'. 알맞게 '익힌다'.
아이구 그건 당연하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요리 방법에 관한 글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습니다. 요리 방법을 쓴 글이 어렵다면 누가 음식다운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자리잡아야 한다. 제거되어야 한다. 나서야 한다. 알아야 한다.'와 같은 동사들이 계속 이어지는 글은 어느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물론 답은 하나일 리 없습니다. 주어 자리에 다양한 경우가 올 수 있으니까요.
앞의 동사들은 다음의 글에서 뽑은 것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이제는 증시가 건전한 재테크의 장(場)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주가의 거품이 제거되어야 한다. 정부는 주식 투자는 기본적으로 투자자의 책임이라는 원칙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을 만드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증시의 출렁임이 심할수록 증권당국의 책임은 더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일보 2000년 1월 26일 사설의 마지막 대목)
앞의 글 제목은 '건전 재(財)테크의 장(場) 돼야 한다'입니다. 제목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앞서의 동사들은 '정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원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해 볼까요. 앞의 글 마지막 대목이 정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면 글의 앞 머리에는 어떤 내용이 올까요? 당연히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 나오겠지요! 사실 이 글의 주제는 여러분도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현재) 증권 시장에 문제가 있으니 정부가 앞장 서서 정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입니다.
실제로 앞 머리에서 동원되는 서술어, 특히 동사들은 모두 증권 시장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때 나열되는 표현들을 보겠습니다. (예: '증시가 너무 출렁이고 있다, 문제가 있다,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문제가 너무나 많다, 수수방관하고 있다,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등)
결국 앞의 글은 크게 봐서 (증권시장에) '문제가 있다 - 정상으로 만들어라'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축은 각각 근거와 주장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근거와 주장으로 연결된 글이 논설문(사설도 논설문의 일종이지요.) 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이와 같이 서술어, 특히 동사만 보아도 글의 내용과 주제, 종류까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읽는 글이라고 해도 '특정한 내용과 주제, 종류의 글에서는 특정한 동사들이 나올 것'임을 예측하면 훨씬 빨리 읽어가며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제, 글의 서술어, 특히 동사들에 유의하며 읽어보세요. 동사라는 열쇠를 돌리면 글이 확실히 열립니다!
저번 회에서 글의 서술어, 특히 동사들에 유의하며 읽어 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실용문만 그렇게 읽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다른 글들, 그러니까 문예문의 경우에도 서술어, 특히 동사 중심 읽기가 가능합니다. (*물론 모든 글을 동사만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컨대, 문학 작품의 경우도 서술어, 특히 동사에 유념하면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너무나 난해하다는 이상의 작품 <날개>만 해도 서술어, 특히 동사에 유념하면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날개>는 주인공인 나의 행동을 서술하는 동사가 시간순으로 볼 때 크게 '눕다-걷다-날다'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미 이러한 동사들의 변화를 파악했다면 매우 예리한 지성과 감성을 갖춘 독자입니다. 좀더 자세히 작품 <날개>를 예로 들며 살펴 보겠습니다. 작품 처음에서 주인공인 '나'의 행위는 거의 '눕다'와 관련된 동사들입니다. 그것은 '나'가 방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연구'를 시작하면서 '걷다'와 관련된 동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주인공 '나'는 현실에 완전히 동화되면서 동시에 현실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때 나타나는 동사가 바로 '날다'입니다. 누워 있다가 걷고 다시 날고자 하는 동사로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 바로 <날개>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주인공이 '눕다', 즉 '멈추다, 잠들다, 죽다' 등의 동사가 관련되는 수동적인 차원에서 '걷다'와 같은 동사와 같이 제법 능동적인 차원으로 변모, 마침내 '날다'와 같은 자기 구원적이며 현실 극복적인 차원으로 귀결됨을 <날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날개의 동사 사용 전개 과정이 소설의 주제를 강력하게 암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조금 더 예를 들면서 설명해 볼까요. 이를테면 추리 소설의 경우는 '문제가 되는 동사', 즉 (무엇을) 훔치다/(사람을) 납치하다/(사람을) 살인하다 등의 동사군과 '풀어 가는 동사', 즉 (무엇을) 되찾다/(사람을) 구하다, (범인을) 밝혀내다 등의 동사군이 두 개의 큰 축으로 엮어지며 작품이 구성됩니다.
성장 소설의 경우는 '새로 접하는 동사', 즉 (새로운 감정이나 사건을) 경험하다/(보편적인 갈등이나 고민과 같은 어려움을) 겪다 등의 동사군과 '무사히 해결하여 성장하는 동사', 즉 (새로운 감정이나 사건을) 소화하다/(보편적인 갈등이나 고민과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다 등의 동사군이 역시 두 개의 큰 축으로 연관되며 작품이 구성됩니다.
이제 문예문을 읽을 때 '동사'에 초점을 두고 읽어 보세요. 소설은 물론 시, 수필의 경우도 한결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작품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문학은 단 세 개의 동사로 압축된다는 말도 생각나네요. '태어나서-살다가-죽었다!'
자, 여러분이 읽는 문예문에서 서술어, 특히 동사가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하는지 곰곰이 따져 보기 바랍니다. 글의 핵심과 주제가 환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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