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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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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을 읽느냐 하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함성호 (시인)
나는 권하고 싶다. 책을 읽지 말자고. 나에게 있어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대충 두 가지 경우이다. 재미로 읽는 경우 아니면 심심해서 읽는 경우와, 필요해서 읽는 경우.
흔히 말해지듯이 책은 마음의 양식이 아니다. 마음의 양식은 책 따위를 읽는 단순한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책은 철저하게 하나의 수단이다. 거기에서 보여지는 길들은 모두 남의 길들이지 자신의 길들이 아니다. 그러한 만큼 나에게 있어 책은 항상 예의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방대한 정보와 놀라운 지식, 그리고 재미이다. 정보와 지식이 마음의 양식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가끔 ‘구슬이 서말’인 사람들을 본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어디에서 그런 지식을 얻었는지 동서고금의 고전에 통달해 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생각은 그 화려하게 열거된 정보들 속 어디에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서 말인 구슬을 꿰는 자기 생각의 실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네 생각은 뭔데?」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러니까 ‘너의 생각을 말해 봐!’란 것이다. 책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 주지는 않는다. 단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나가는 데에 따르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분석하고 종합해 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는 것은 다른 배움에서 온다. 늘 우리들 옆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들. 도심의 거리에서, 숲에서, 집에서, 휴양지에서, 일터에서, 이로운 것들과 해로운 것들의 행간에서, 좌절과 희망의 순간, 순간 속에서 얻어지는 결코 거창하지 않는 사소한 깨달음들, -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읽어내야 할 궁극적인 텍스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일상적인 삶의 순간 속에서 그 아니러니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한 권의 책이 지니고 있는 생의 무게를 끝까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좀더 많은 정보와 지식 아니면, 재미이다. 재미있으면 『선데이서울』도 좋고, 『야담과 실화』도 좋고, 『건강다이제스트』도 좋고, 음란 비디오도 좋고, 심지어 라캉도 좋고, 들뢰즈도 좋고, 박상륭도 좋다. 만화책도 좋고, 미장원과 은행에 널려져 있는 여성 잡지들도 좋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의 텍스트들이며 나는 잡식성의 괴물이 되는 것이다. 사실,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의 팔할은 만화당(만화방이 아니라 그때 우리는, 만화당이라고 불렀다.)에서였고, 1할은 여성지와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잡지였으며, 나머지 1할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매혹적인 건축물들에서였다. 재미없는 책은 읽지 않았으며 재미있는 책은 미친 듯이 읽어 댔다. 며칠 밤을 새며 싸구려 무협지를 읽었고, 밥 먹을 때도 손에서 만화책을 놓지 않았다. 『바벨 2세』, 『철완 아톰』, 『철인 28호』, 『달려라 승리호』, 『도전자 허리케인』, 『유리의 성』, 『마술 경주』같은 만화들이 그 때 내가 섭렵했던 만화들이며, 『오, 한강』, 『외인구단』, 『아스팔트의 사나이』, 『화이트 홀』이 그 이후에 보던 만화이고, 나는 지금도 『칠석의 나라』, 『용』, 『몬스터』, 『미스터 키튼』, 『시마 과장』을 보러 만화당을 들락거리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바람의 향방, 햇빛의 따가움, 저 바다의 신비, 나무들의 생각도 우리에게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만의 실을 갖는 일이다. 그 실로 단 몇 개의 구슬이라도 꿸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독서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거리에서 특별하지도 않게 굴러 다니는 돌멩이들은 얼마나 오랜 불의 기억과 지구 생성의 기록을 간직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과 함께 독서를 할 줄 아는 이는 행복하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 생각하는 것, 미움과 질투, 사랑과 욕망에 대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자 또한 행복하다. 이 방대한 텍스트들 속에서 어떤 책을 읽느냐 하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책이 아니더라도 그게 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언제나, 세계는 놀라운 읽을 거리로 가득 차 있으니까 말이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하늘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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