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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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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원
내가 늘 손 가까이에 책을 놓고 살게 된 것은 순수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내 어린 시절을 보낸 1950년대의 춘천은, 전쟁은 끝났지만 전방에 위치한 도시인지라 거의 문화의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학창시절 문학소녀로 이름을 날리던 어머니는 당신의 독서에 대한 갈증을 어린 딸들을 데리고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 로 해소하셨다. 세계 문학전집에 수록된 고전에서부터 한국 문학전 집의 갖가지 소설들을 우리에게 각색하여 들려주셨다. 그 중에는 우 리들이 듣고 이해 못하는 이야기들도 무척 많았지만 긴긴 밤 화롯불 을 앞에 놓고 아주 재미있게 듣곤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 해, 어머니는 '새벗'이라는 소년잡지를 나에 게 사 주셨다. 도시의 문화와 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 그림 등을 보면서 내가 그 속에 빠져드는 착각에 빠지곤 했 었다.
우리 식구가 서울로 이사를 온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틈만 나 면 동네 만화가게를 찾았다. 전차를 타고 통학을 했던 나는 가끔씩 집까지의 몇 정거장을 걸어서 아껴 모은 차비와 아버지의 심부름으 로 생긴 약간의 용돈을 만화가게에 가기 위해 간직하였다. 만화 속 에서는 내가 공주도 될 수 있었고 어머니를 잃은 외로운 소녀가 되 어 울기도 많이 울었고 온갖 만화의 주인공이 되어 가슴 설레는 경 험을 하곤 했다. 아마 그런 상상의 세계를 동경했던 것이 자라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한 계기가 된 듯하다.
중학교 2학년 때의 겨울, 어쩌다 책가방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께 서 내 가방에서 나온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보시며 내게 내용을 물어 보셨다. 물론 작가의 깊은 내면 세계는 이해할 수 없었 지만 집에 있던 세계 문학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던 나는 내가 느낀 대충의 이야기를 해드렸다. 혹 교과서 이외의 책을 학교에 가 지고 다닌다고 야단맞을까 봐 한껏 주눅이 들었던 나는 선생님의 얼 굴에 퍼지는 알듯 말듯 한 미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손길에 큰 힘을 얻었다.
어머니는 내가 책을 즐기는 것을 아시고 종종 나에게 책을 사주셨 다. 어찌 보면 어머니의 교육방법은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하는 나에 게 공부하라는 말 대신에 하고싶어 하는 일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공부하도록 유도하셨던 것 같다. 우리 모녀는 사온 책을 돌려가며 읽고 내용을 이야기하고 좋았던 문장을 다시 읽어보며 감동에 젖기 도 했다. 어머니는 딸이 비록 어떤 사물을 직접 대하지는 못해도 책 을 통해 간접으로나마 경험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른다.
시집을 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던 나는 그 동안 내가 사 모은 책이 그처럼 많은 것에 놀랐다. 이구석 저구석 굴러다니던 책들, 내가 시 집을 가고 나면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책들을 눈 물어린 시선으로 정리하며 감회에 젖었다. 한권 한권 책을 들춰보면 서 그 책을 샀을 때의 기쁨, 첫 페이지를 넘기며 흐믓하게 들이마시 던 새 책 냄새, 금방 읽기가 너무 아까와 마치 연애편지를 읽듯 아 끼고 아껴가며 읽던 그 어떤 밤의 추억들이 내 기억 속을 주마등처 럼 스쳐갔다.
단칸방에 살면서 다락에 쌓아 놓은 책에 곰팡이가 쓸까 봐 걱정했 던 신혼시절을 거쳐 지금은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작은 책장도 서너 개 늘어놓을 수 있고 내가 갖고싶어 하는 책도 한 달에 한두권 정도 는 사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제도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하셨다.
"얘, 너 지난번에 사온 '혼불' 다 읽었니? 최명희라는 작가가 17년 동안 그 책 하나에만 매달려 썼다지. 어쩌면 그렇게 문장이 아름답다니. 그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왠지 허전한 느낌마저 드는 구나."
책은 내 감정에 아름다운 색을 칠해 준다. 또 삭막할 수도 있는 나의 중년을 풍요롭게 해 준다. 내 어머니가 나에게 베풀어주신 독 서에 대한 열의가 사랑하는 내 딸에게도 자연스럽게 전달됐으면 하 는 바램이다.(1998 대전 중구청 백일장 장원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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