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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전문도서

아Q정전

지은이
루쉰
출판사
창비
페이지수
258
대상
일반

<<책 소개>>
루쉰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단편 10편을 수록한 소설집이다. 1996'창비교양문고'로 출간되었던 것을 판형과 활자, 장정을 바꾸어 새롭게 펴냈다. 이 책에 실린 번역본은 50종이 넘는 'Q정전'의 번역 가운데 루쉰 문학 전문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번역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중국 사회에 드리워진 암흑의 근원을 파헤치고 몽매한 민중을 일깨우는 데 혼신을 바친 루쉰은 신해혁명 전후 무기력하고 비굴한 근성을 지닌 중국 민중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풍자와 해학적인 필치로 가감없이 보여준다. 봉건의 극복과 근대의 실현을 위해 치열한 고투를 벌인 루쉰의 작품들은 여전히 현대적인 빛을 발한다.

<<목차>>

광인일기

쿵이지

고향

Q정전

복을 비는 제사

술집에서

비누

홍수를 다스리다

관문 밖으로

해설 - 중국의 루신과 동아시아문학의 루신 / 전형준

연보

<<리뷰>>
그동안 루쉰과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분들과 글에서 접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법정스님과 리영희선생께서도 루쉰의 작품에 대한 일독을 권한 바 있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 조선 독립혁명가의 위대한 삶]에서 주인공 김산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에 읽은 서경식씨의 [소년의 눈물]에서도 그가 젊었던 시절에 접한 작품 중에서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등장한다.

루쉰과 그의 작품에 대해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는 봉건체제와 군벌, 악질지주 등을 비판 규탄했고, 당시 지식인의 무능을 꾸짖었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이 깨우치기를 고대했던 사상가였다. 좌익 성향의 작가그룹에 속해있었기에 냉전체제를 버팀목으로 하는 한국의 위정자들과 보수학자들이 그를 배척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루쉰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물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 지인들 중에서 '성실한 탐구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 하다. 과 선배 한 명이 있고 비슷한 연배의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가 있을 정도다.(몇 개의 독서모임 참가자들은 제외하고...) 모두가 '밥벌이'와 인스턴트 메시지, 대중매체, 인터넷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편이다.

가끔 언론 기사에 발표되는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의 결과치는 실제로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20세기 초 혼란한 중국 근대사에서 작품 활동을 펼친 루쉰에게 주목하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인터넷 서점의 북카트 속에 루쉰의 작품을 담았음에도 두서 없는 '다독'의 욕심에 밀려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다가 8월 초에 문득 더 늦기 전에 나의 독서 분야에서 '고전'의 비중을 높여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지성씨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고전 목차에서 두 권([발해고][새벽에 홀로 깨어])을 고르고 루쉰의 소설집 한 편인 이 책을 구하였고 지난 주에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굳이 고전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루쉰의 생애와 비슷한 시기, 즉 우리 민족의 근대사 과정 중에 작품을 발표했던 이들을 찾아 그들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공-알라딘>

<<관련 글>>
장희창 교수님의 글 입니다

회장님, 사람 잡아먹지 맙시다!”
역시 현장에 있어야 세상 돌아가는 꼴을 실감할 수 있는 것 같네요. 어제 장산역 인근에서 있었던 삼성전자 서비스센타 해운대 지점 해고직원들의 데몬스트레이션을 지켜보았는데, 사연들이 절절하더군요. 노조 만들었다고, 가차 없이 비정규직 직원들을 해고시키고 사업장을 폐쇄해버리는 삼성의 조치가 너무도 모질더군요. 한 발표자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삼성 회장의 일 년 간 주식배당이 천억 이상인데, 이 금액은 매주 20억씩 로또에 1등으로 일 년 내내 당첨되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라고 말하니 쉽게 이해가 갔지요. 그런 부자가 한 달에 100여만 원 받는 가난한 직원들을 직장에서 내쫓은 겁니다. 중국의 국민작가 루쉰이 말하는 식인(食人)사회가 별거겠어요. 천억 받는 사람이, 천만 원 받는 노동자들을 월급 쪼깨 더 올려 달라 한다꼬 내쳐버리는 사회, 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사회 아닐까요.

루쉰은 <광인일기>(1918)에서 20세기 초 중국사회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봉건유교사회는 식인(食人)사회다.” 소설의 주인공인 광인(狂人)은 봉건에 저항하고 근대를 이루어내려는 계몽인의 한 유형이지만, 봉건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 광인이 역사책을 펼쳐듭니다. 하지만 역사책에 연대(年代)는 나와 있지 않고 페이지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몇 글자만 비스듬하게 씌어있지요. 그래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글자와 글자 사이에 또 다른 글자들이 우글거리며 나타나는 겁니다. 다름 아니라 식인이라는 두 글자가 행간에 우글거리고 있었지요. 말하자면 중국사회는 인의예지를 앞세운 채 4천년 동안 사람을 잡아먹어왔던 곳이라는 겁니다. 무시무시하지요?

루쉰은 묻고 또 묻습니다. 인의예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봉건사회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고, 쉽게 말하자면 윗사람 눈치살피며 숨죽이고 살라는 소리라는 겁니다. 루쉰은 중국의 인민이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무쇠로 된 방안에서 중국인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는 거지요. 신해혁명이 좌절된 후의 루쉰의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집니다.

<Q정전>Q’는 그런 식인사회에서 먹고 먹히면서도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표단수지요. Q는 수모를 당해도 끽 소리 못하고서 금방 잊어버립니다. 이른바 정신상으로 승리하는법만 몸에 익힙니다. 그러면서도 약자에게는 또 모질게 굴지요!

혁명의 소식이 들리고 어쩌다가 아Q가 혁명당원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자, 지금까지 그를 괄시하던 이웃들이 그를 두려워합니다. Q는 주위사람들의 대접이 달라지자, 혁명의 소득을 앞질러 생각하며 공상에 빠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봉건지배세력이 혁명의 징후에 더 빨리 변신하고 더 빨리 적응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지요. 결국 아Q는 약삭빠른 자들의 권모술수에 당하고 맙니다.

프랑스 혁명(1789)이 무위로 돌아간 후의 왕정복고기를 무대로 하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혁명의 서슬에 된통 당했던 귀족들은 다시 올지도 모를 혁명에 대비하여 하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잘 대해줍니다. 봉건지배세력도 알고 보면 시시각각 눈치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권리를 야무지게 챙겨 사람대접 제대로 받아라.’ 루쉰은 그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감옥을 감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광인으로 취급당하고, 영문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개 취급당하는 봉건 유교사회의 질곡을 루쉰은 풍자와 역설로 고발했던 것이지요.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의 중첩 속에서 변혁의 길을 찾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번번이 루쉰의 문학을 거울로 삼는 것은 그러한 질곡의 틀이 아직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말하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다만 그 봉건자본이라는 또 다른 얼굴로 대체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해고된 분들의 면면을 보니, 왜 그리 착하게들 생겼는지. 컴퓨터가 고장 나 고치러 갔다가 알게 된 얼굴도 보이더군요. 박봉임에도 참 친절했지요. 이 무슨 식인사회인가요? 한마디 꼭 하고 싶네요. “회장님, 사람 잡아먹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