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글쓰기대회 > 대회참여 > 독서감상문대회

대회참여

제목 자유라는 허상
글쓴이 김시현 우수상

카프카의 법앞에서를 읽으면서 나는 이 작품이 지독히 비관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시골 남자가 법이 무엇인지 알고 들어가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림과 고통을 인내하며 들어가려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법이 그 끝없는 권태와 고통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상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시골 남자는 기다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작품에서 시골 남자는 여행을 위해 많은 걸 준비했다는 대목이 있다. 여행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고행을 겪을 것을 알며 마치 순례길에 오르듯이 온 것이거나 법이란 것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잡혀 법으로 가기 위해 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어려움을 시골 남자는 예상치 못했다이 문장은 두 번째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결국 두 가설 모두 시골 남자가 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더라도 고난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그것이 무의식 속에 자리잡힌 것이라 할지라도- 기다림을 자처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법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법은 자유를 문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문지기가 시골 남자에게 하는 말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골 남자는 곰곰이 생각한 후, 그러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능하지, 그러나 지금은 안돼.” “이 곳은 너 이외에 그 누구도 입장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너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지. 나는 이제 가서 문을 닫을 것이다.” 문은 시골 남자가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열려있으며 법의 문을 뚫고 새어 나오는 빛도 관찰할 수가 있다. 그 말은 살아있는 동안 자유를 볼 수는 있지만 절대로 자유, 법으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이 죽음을 상징한다면 문지기의 역할은 무엇인 걸까? 카프카는 문지기를 온전한 사람으로도, 신으로도 표현하지 않았다. 문지기는 시골 남자에게 대화를 걸기도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의무적인 일처럼 그려진다. 시골 남자가 세월이 흘러 늙어가 쪼그라 들 동안에도 문지기는 전혀 늙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문지기가 절대적 존재초월적 존재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골 남자를 심판하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 문을 지키는 일에 충실한다. ‘법앞에서작품 자체로서도 작가의 철학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력해 보이며 등장인물인 문지기는 작가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만 같다.

시골 남자의 궁극적 목표는 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법을 자유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우리네 모두에게도 당연한 일이며 누구나가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는 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직 죽음이 있어야만 법으로 갈 수 있기에 앞에서 일어나는 권태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은 필연으로 겪어야만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살아가다 시골 남자처럼 법을 쫓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문을 지나가야만 하고 그 문을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시골 남자가 문지기를 재촉하며 화를 내는 장면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다. 자유의 대가로 무엇이 수반되는지 시골 남자는 알지 못한다. 시골 남자의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으며 본인의 죽음이 다가오자 문은 닫힌다. 평생을 기다려 온 것이 허황된 희망으로 끝나는 순간인 동시에 수수께끼들이 부조리함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만을 위한 입구이며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할 수 없는 곳이 죽음에 임박하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다 못해 닫혀버린다. 마치 시지프가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고 올라갔을 때 자신이 그것을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것처럼, 그렇다면 도대체 그 문은 왜 있는 것인 건가? 법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긴 한 것인가? 라는 질문들에 카프카는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단호히 대답한다. 모두가 추구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너무도 고통스러우며 그것을 앞당기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앞당길 수 없다. 그리고 끝내 죽음이 이르러도 자유로 가는 문은 닫혀버린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에 시골 남자는 노력하고 분노하다 포기했을 뿐이며 그가 계속해서 노력하고 분노했더라도 결말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두 장 남짓한 소설에 삶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의 과정과 결말이 모두 담겨 있다.

작품을 읽으며 시지프 신화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카프카는 이 작품에서 카뮈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처럼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질문을 던지지 않고 베케트와 같이 부조리함 자체에 집중한다. 마치 부조리함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유 없는 불행은 시지프 신화를 그 불행-부조리함-을 표현하는 것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더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반항적 인간으로 나아가지 않고 염세에만 머물렀다 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시골 남자는 마냥 이상적이기만 한 실존주의 철학과 다르게 인간과 가장 닮아 있다. 시골 남자도 처음에는 분노하며 반항한다. 그리고는 선택한다 그 기다림을 인정한 뒤 즐기는 것이 아니라 체념하는 것으로. 이 선택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독자들은 작품을 읽으면서 법이 무엇인지 문지기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지만 시골 남자의 태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시골 남자가 죽고 문이 계속 열려 있었더라면 그것은 삶을 긍정하거나 시골 남자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은 닫혔고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과 죽어서도 끝내 가지지 못하는 자유를 보여준다. 우리는 시지프가 계속해서 돌을 굴려야 하며 고도는 오지 않는 것을 안다. 부조리를 인정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선택한다 고도가 오지 않는 것을 앎에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는 만개한 꽃을 보고 우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 꽃이 지고 나서야 우울해한다. 꽃이 질 것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각하지 않는다면, 만개한 꽃을 보고도 꽃이 질 것임을 알기에 슬퍼한다면 그 꽃을 꺾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죽음이 너무도 두려우면 죽음을 곁에 두는 것처럼 말이다. 부조리를 극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살이다. 계속해서 저항하지 않아도 되며 한 번의 저항으로 그 부조리를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자살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꽃을 꺾을 수 없게 몸을 꽁꽁 묶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 늙게 되었을 때는 그저 혼잣말로 중얼거릴 뿐이다’(140p) 작품 내에서 자살에 대한 암시나 비유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지만 나는 시골 남자가 자살이라는 선택지마저 박탈당했다고 생각한다. ‘변신이 유대인이자 이방인으로서 차별받았던 카프카의 절규였다면 법앞에서는 인간으로서 겪어야만 하는 부조리에 대한 절규이자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은 채 가장 비극적인 사건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자유라는 허상을 죽음에 이르러 깨달은 시골 남자가 더 불행한지, 아니면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삶의 가운데에서 알게 된 내가 더 불행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