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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청] [글나라북클럽 3기 신청] 돌봄선언
글쓴이 이민정

서로를 난잡하게 돌보는 사회를 꿈꾸다

-돌봄 선언을 읽고

돌봄이라는 단어 앞에선 늘 피하고 싶었다. 내 한 몸 건사하는 것이 벅차 출산과 육아를 거부하고, 반려동물을 들이는 것도 사양했다. 언젠가 분명 늙고 아픈 가족이 생기는 일은 물론 나 자신의 나이 듦조차 상상하면 괴로워왔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를 마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는 각자도생을 강조하고 경제적 자유를 얻는 방법을 안내하며,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아웃소싱하고 편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 한 가운데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채 매일 도태되고 있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모든 미디어가 하나 같이 영앤리치(young&rich)를 찬양하는데 나는 어느새 영도 아니고 리치도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포화 속에서 나는 꾸준히 돌봄에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읽게 된 책이 돌봄 선언이다. 런던에서 학술 모임으로 시작된 단체 더 케어 컬렉티브는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친족-공동체-국가 차원에서 구현해야 할 돌봄의 모양을 선언한다. 특히 그들은 난잡한 돌봄의 윤리를 강조한다.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돌봄 요구를 너무 오랫동안 시장가족에 의존해 해결해왔다. 우리는 그 의미의 범주가 훨씬 넓은 돌봄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다.” (p.82)

난잡한 돌봄은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을 돌보는 것, 지역 공동체를 돌보는 것, 환경을 돌보는 것이 동등하게 가치 있는 일로서 적절한 자원과 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p.85)

난잡한 돌봄은 특정한 관계를 넘어선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돌봄은 어떤 관계 맺음의 결과로 생기는 마음이나 책임이 아니며, 오히려 돌봄으로써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다.” (p.196)

돌봄 선언을 읽으며 나 또한 나의 방식대로 돌봄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돌봄의 사회상 또한 이 책과 결을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이들과 함께 지내는 나의 직업 활동, 환경·인권 운동에 참여하는 나의 사회적 활동 모두가 난잡한 돌봄에 들어맞는 것이다. 옮긴이의 글(p.196)에서 언급한 관계에 대한 부분에도 깊게 동감한다.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모르더라도 함께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겨남을 수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돌봄을 단순히 친족 돌봄으로 여기고 시장에 외주화하는 신자유주의적 돌봄은 많은 이들을 소외시킨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인권이 있다면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고 싶다면 비인간 생명들을 자원으로 여기는 인식을 넘어서 인간·비인간 생명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모두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움직임이 더 커지면 좋겠다. 우선은 내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보자.